검 산 동( 劍 山 洞)
본래 김제군 입천면 지역으로서 마을 뒤에 있는 산의 지형이 마치 칼(檢)처럼 생겼다 하여『검산리』로 불려졌다 한다. 그러다가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입천면의 대검리, 소검리, 용곳리, 순동리의 일부와 백산면 상말리 일부, 금구군 일북면 난봉리 일부를 합하여 『검산리』라는 이름으로 김제면(읍)에 편입되었다. 그 뒤로 마을이 나누어지고 이름도 바뀌어서 대검산, 소검산, 화동골로 불리다가, 다시 행정구역 명칭을 따서 검산 1구(화동곡), 검산 2구(소검산), 검산 3구(대검산), 검산 4구(성당촌), 검산 5구(됫배-升岩), 검산 6구(양지편)로 불렀는데, 사람들은 화동골, 소검산, 대검산, 성당촌, 호잠, 상록, 양지편이라는 이름을 즐겨 불렀다. 1989년 1월 1일 김제읍이, 김제시로 승격됨에 따라 김제시에 편입된 『검산동』에는 화동(花洞), 소검산(小劍山), 대검산(大劍山), 성당(聖堂), 호잠(湖잠), 상록(常綠), 양지(陽地), 7개 마을이 있다.
- 소금배미
- 대검산 남쪽 들 가운데 있는 논을 가리킨다. 바닷물이 포내 앞까지 드나들던 옛날 소금을 가득 싣고 오던 배가 이곳에서 거센 풍랑을 만나 뒤집었다. 그런 일이 있은 뒤 이곳은 논으로 변하였는데, 소금배가 뒤집힌 논이라 하여『소금배미』라고 부리었다. 지금도 가뭄이 심하면 그 옛날 뒤집힌 소금배 탓인지 제일 먼저 논이 마른다고 한다
- 장군묘(將軍墓)
- 대검산 동쪽에 있는 밀양 박씨의 후손 박석정(朴石精)의 묘이다. 1592년 선조 25년에 일어난 임진왜란 당시 박석정은 바람 앞의 등불 같은 나라를 구하려고 스스로 의병을 모집하여 지금의 진안 곰티재에서 왜적을 맞아 싸웠다. 그러나 힘이 모자라 박석정은 전사하고 말았다.
순 동 (蓴 洞)
순동은 본래 김제군 입천면 지역으로서 소못에 순채가 많이 있어 순동이라 하였다 한다.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대리(大里), 진관리(鎭管里), 대검리(大劍里)의 일부를 합하여 『순동리』라는 이름으로 김제면(읍)에 편입되었다. 그 뒤로 행정구역 이름을 따 순동 1구, 2구, 3구로 불리기도 하였지만, 사람들은 원순동, 대리, 농원으로 불러왔다. 1989년 1월 1일 김제읍이 김제시로 승격됨에 따라 김제시에 편입되어 김제시『순동』이 되었다. 순동에는 원순동(元蓴洞), 대리(大里), 농원(農園) 3개 마을이 있다.
- 한우물방죽
- 한우물 동북쪽에 있는 방죽으로 『대리제(大里堤)』라고 부른다. 이 방죽에서는 지하수가 사시사철 그치지 않고 흘러나와 아무리 가뭄이 심해도 물이 마르지 않아 이 물로 마을 주위의 농경지에서 농사를 지었다. 크다는 뜻으로 『한우물방죽』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 의견비(義犬碑)와 개비방죽
- 원순동과 농원 사이에 고가도로가 있고, 그 고가도로 조금 못 미쳐에 88서울올림픽을 기념하는 화단이 조성되어 있는데, 그 가운데 의견비가 세워져 있다. 이 의견비는 원래 철도서쪽 산언덕에 있던 것으로 호남선 철도가 복선화 되면서 지금의 자리로 옮겨졌다. 높이 58㎝, 폭 40㎝, 두께 15㎝ 화강석으로 만들어진 의견비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 오고 있다. 옛날 지금의 김제시 옥산동에 살던 김득추(金得秋)라는 사람이 어느 날 외출했다가 집으로 돌아 오는 길에 술이 취하여 그만 풀위에 쓰러져 잠이 들었다. 이 때 마침 산불이 일어나 김씨가 잠들어 누워 있는 곳으로 불길이 번져 왔다. 참으로 위태로운 순간이었다. 이 광경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개는 주인을 살리기 위하여 순동 저수지로 달려가 온몸에 물을 적신 후 돌아와 주인이 잠들어 누워 있는 곳 주위에서 불이 번지지 못하도록 뒹굴었다. 그러기를 수백번, 개는 마침내 주인의 목숨을 구하고 지쳐서 죽고 말았다. 개의 거룩한 희생으로 생명을 건진 김씨는 개의 죽음을 슬퍼하여 그 자리에 개를 묻고 후하게 장사지낸 후 의견비를 세워 넋을 기렸다. 이 의견비의 서북쪽에 조그만 방죽이 하나 있는데, 개의 비석이 서 있는 방죽이란 뜻으로『개비방죽』이라 불려졌다.
백학동(白鶴洞)
백학동은 본래 김제군 입천면 지역이었다. 그러다가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포내리, 선정리, 대덕리와 진관리, 용곳리, 대리의 일부와 일북면 난봉리 일부를 합하여 『백학리』라는 이름으로 김제면(읍)에 편입되었다. 그 뒤로 행정구역 명칭을 따 백학 1구(용곳), 백학 2구(진관), 백학 3구(포내), 백학 4구(대덕), 백학 5구(선인동)로 불러 오다가 1989년 1일 김제읍이 김제시로 승격됨에 따라 김제시『백학동』이 되었다. 백학동은 백로가 밭에 내려 앉는 형국(백로하전혈)의 산이 마을들을 감싸고 있어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 자물수명당
- 용자칠총을 지나 포내와 선인동 갈림길 남쪽 기슭에 나지막한 산이 있는데, 그 산 중턱에 묘 하나가 있다. 이 묘가『자물수명당』이다. 언제인지는 잘 모르나 남도(南道)에 사는 장씨라는 사람이 서울을 다녀오다가 묘가 있는 자리에 이르러 자물써다. (자물쓰다-까무러치다는 뜻)그러나 무덤을 쓸만한 땅 한 평 없을 만큼 가난해서 마을 사람들은 하는 수 없이 장씨를 그 자리에 묻어 주었다. 그 뒤로 장씨의 자손들이 하나 둘 힘을 펴더니 끝내 가세가 불같이 일어나 부귀영화를 누렸다. 그래서 그 묘가 있는 곳을 일컬어『자물수명당』이라 불렀다고 전한다.
- 행주성
- 포내 앞 들 가운데 나지막하고 조그만 산이 있다. 그 산의 형국이 꼭 배와 똑같이 생겨서『행주성』이라고 했다 한다. 전에 배가 이곳까지 들어올 때에는 이곳에 배를 매어 두었다고 한다.
상 동 동(上 東 洞)
상동동(上東洞)은 동쪽이 용지면, 남쪽이 검산동, 북쪽은 백산면이 서쪽으로는 흥사동과 인접해 있다. 본래 김제군 백석면 지역인데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금동리, 상수리와 석정리, 사거리, 괴방리의 각 일부와 모촌면의 신성리 수하리의 각 일부를 병합하여 『상동리』라 해서 백산면에 편입되었는데, 1989년 1월1일 김제읍이 김제시로 승격되면서 시(市)구역 확정에 따라 김제시에 편입되어 『상동동』으로 되었다. 상동동에는 삼수(三水), 부동(釜洞), 석정(石井), 신성(新成) 4개 마을이 있다.
- 장고개
- 삼수동에서 5일마다 서는 김제장으로 넘어가는 고개라는 뜻으로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사거리에서 남쪽 김제농업고등학교 실습지 유리온실단지 사이로 해서 승방(升方)마을로 넘어가는 고개를 가리킨다.
- 석정제(石井堤)
- 석정 마을 남쪽에 있는 연못이다. 석천(石泉-돌샘)에서 나오는 물을 가두어 두기 위해 만든 연못으로 근처 골짜기에서 벼농사를 짓고 있는 농민들에게는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연못이다. 그러나 야산 개발로 수리시설이 잘 되어 쓸모 없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