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신 마지룡 정려
- 소재지 : 죽산면 죽산리 111-5
- 시대 : 일제강점기
두 기의 기둥에 비갓을 쓰고 있고 정판이 걸려 있다. 공의 이름은 지룡, 자는 비섭. 본관은 장흥이다. 공은 27세 정묘년에 무과에 올라서 어영장이 되고 병자호란 후 효종을 모시고 심양에 있을때 청나라의 협박으로 300여 군졸을 거느리고 금구 싸움의 선봉으로 출전하여 명나라와 싸우는 청나라를 도왔다. 그러나 임진왜란 당시 우리나라를 도와 준 명나라 은혜를 생각하고 부하에게 화살은 촉을 빼고 총탄은 철환없이 화약만 넣어 쏘도록 명령하였는데 이러한 사실이 청나라에 발각되어 1642년 2월16일 목숨을 잃게 되었다. 공의 시신이 운구되어 올때 '大明忠臣朝鮮義士馬公之樞'라고 명정에 쓰였다. 그 후 숙종 21년 공의 둘째 아들이 나라에 아뢰어 왕으로부터 의를 지키고 죽음으로써 다한 뜻을 높이 찬양하여 후세에 본보기가 되도록 특별히 명하여 공의 묘소 앞에 정려를 세우게 하였다. 정판에는 '忠臣御營將馬之閭'라고 쓰여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