쌍룡추(雙龍湫)와 벽골룡(碧骨龍)

  • 작성자 : 관리자
  • 작성일 : 2019.0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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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량면과 월촌동의 경계를 이루고 흐르고 있는 원평천에 다리가 있다. 이 다리는 김제시내에서 화호로 해서 남쪽 교통을 이어주는 중요한 교량이다. 이 다리의 이름이 포교(갯다리라고도 부른다)이다. 포교에서 서쪽으로 약 100m쯤 내려가면 신털미산 북쪽 끝을 부딪치는 천변쪽에 용추가 있다.

 

또 하나는 옛 벽골제 둑에 형성된 용골마을 남쪽 끝을 흐르는 연포천이 있는데 여기에도 용추가 하나 있어 속칭 세인들은 두개의 용추를 쌍룡추라고 한다. 신털미산 북쪽 끝 원평천의 용추에는 백룡이 살고 있었다고 하며 연포천의 용추에는 청룡이 살고 있었다고 한다.

 

이 쌍룡추에 얽힌 전설이 내려오고 있는데 여기서는 원평천 용추에 살고 있었다는 백룡에 대한 전설을 소개하고자 한다.

 

어느 때부터 인지 백룡을 벽골용으로 부르게 되었다. 그건 아마도 백룡이 신성인데다가 둑을 수호해 주는데서 모든 사람들이 어느덧 벽골용으로 호칭하게 된 것이라 하겠다.

 

지금으로부터 약 780여년전 고려 23대 고종왕 초기 김제조씨의 시조인 조연벽장군이 벽골용으로 인연해서 고관대작으로 출세한 전설의 일단을 간추려 보기로 한다. 조장군이 젊었을 때의 일이다.

 

어느 날밤 현몽하기를 초면부지 백의 노인이 찾아와 말하기를 자칭 내가 백골대제를 수호하고 있는 벽골용인데 내일 날이 밝기 전에 틀림없이 외래흑룡-부안변산룡이 내습하여 나의 집을 뺏으려 하는데 나를 구조할 수 있는 인물은 오직 장군 뿐이오니 꼭 내일 미명에 오셔서 구원을 해 주시면 백골난망이라는 애원의 요청을 받았다.

 

꿈에서 깨어난 장군은 반신반의로 생각하다가 꿈으로만 그저 넘어가기에는 너무도 생생한지라 벽골제에 무슨 일이 일어날 것으로 생각하고 다음날 일찍이 궁시와 전통을 갖추어 메고 현지에 나갔다. 장군이 싸울 태세로 대기하고 있으니 아니나 다를까 간밤 백의 노인의 현몽과 조금도 다름없이 남쪽하늘에서 먹구름이 일기 시작하더니 삽시간에 풍운이 일고 뇌성이 조금도 다름없이 남쪽하늘에서 먹구름이 일기 시작하더니 삽시간에 풍운이 일고 뇌성이 진동하여 지척지간을 분별치 못하게 폭우가 쏟아지면서 벽골제 내외의 물결이 하늘에 솟구치며 백룡과 흑룡의 대전이 육안으로 보이게 되었다.

 

이 대결이야 말로 생사를 판가름하는 혈투가 전개되고 있는지라 때를 놓치지 않고 장군은 활시위를 당겨 단 한 발로 보기 좋게 흑룡을 명중시킨 것이다. 조장군의 화살 하나로 백룡의 승리가 되고 흑룡은 행적을 감추고 말았는데, 지상에는 지름이 2척 가량 되는 대반만한 용의 비늘 1개가 땅에 떨어져 있었다 한다. 장군은 이 용인을 조정에 진상하였는데 당시 고종왕은 이를 다시 없는 보물이라 하여 용상 위 깔이방석으로 이용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장군은 천하 명무의 이름을 떨치고 대작길에 오르게 되었다 한다.

 

한편 결전하던 그날 밤 또다시 백의 노인이 꿈에 나타나 장군의 은공으로 영원히 벽골제에서 삶을 누리게 되었다 하면서 이에 보답하기 위해서 장군의 자손들을 대대손손 흥왕케 할 것이라고 약속하였다 한다.

 

조연벽 장군의 출생지와 주거지는 고려 시대의 지명 「용두동」인데 지금의 김제시 옥산동이다. 조장군은 사룡후에 그 후 벼슬에 크게 오르게 되어 무관으로 나라의 요직에서 활약하였다 하거니와 고종왕 19년(서기 1232년) 임진에 몽고적구병의 내침이 자주 있게 되자

 

대장군으로 부하 장병들을 이끌고 출전하여 처인성에서 적과 결전 끝에 적장 살레탑을 사살하고 적병을 전멸시키는 전과를 거둠으로써 국토 방위에 혁혁한 공훈을 세움으로 조정에서는 그 공로를 치하하여 녹익조공 봉 벽성군으로 벼슬을 내리게 되었다. 또한 장군의 슬하에는 기, 서, 간 이렇게 3남이 있었는데, 모두 관의대작을 역임하였으며,

 

특히 신기한 화재로는 셋째 아들 간 출생지를 모골이 뛰어나고 등에 북두칠성의 용현 7점과 양 어깨에 용비늘이 달려 있으므로, 세칭 벽골룡의 정기를 타고난 사람이라고 하였으며, 25대 충렬왕때 문과에 초시・중시 모두 장원급제한 대학으로 관이 찬성사 문하시중 우의정을 역임하였다. 이래서 문양공의 시호까지 받았는데 벽골제와는 불가분한 인연이라는 전설로 내려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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