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강다리와 옥쇄골

  • 작성자 : 관리자
  • 작성일 : 2019.01.31
  • 조회수 : 730

고려 말엽 용지면 신정리 서정마을은 이 곳 요강다리를 건너 옥쇄골을 지나서 초남이 장터를 거쳐 전라감영으로 가는 길이며 또한 조선조에도 한양으로 가는 길이었다고 한다.

 

이 때의 풍습은 혼인을 하면 1년간 친정에 머물다가 신랑댁으로 신행(혼인 때 신랑이나 신부가 시댁이나 처갓집을 가는 것)을 한다는 데서 전설은 비롯된다. 시댁이나 처갓집을 가는 것은 고려 말기의 일이다.

 

이씨 신랑댁으로 가던 신행길이 현재 부르는 요강다리에서 갑작스런 신부의 요절복통으로 가마에 실은 요강(용변기)을 다리 밑으로 떨어뜨리는 등 말로 다 못할 소동이 일어났다.

 

신부의 출산 기미로 그랬던 모양이나 다리 위에서는 어떻게 할 도리가 없어 하인 종속들은 걸음을 빨리 하여 다리 건너 지금의 옥쇄골에 들어서자 비로소 가마를 멈추고 신부의 안정을 되찾도록 애를 썼다. 그날밤 신부는 진통 끝에 옥동자를 낳았다. 그 옥동자는 탈없이 장성하여 이씨 가문의 중시조가 되었으며 조선왕조 창업에 앞장서 왕도를 잡게 했다는 전설이 있다.

 

그 뒤 그 다리를 속칭 요강다리라 하고 쉬었던 곳은 옥쇄골이라 부르게 되어 현재까지 이르고 있다고 한다. 즉 임금님이 사용하는 도장을 옥새라고 하는데 산고의 진통을 진정하느라 쉬었던 곳에서 옥동자를 낳았다고 해서 또한 그 옥동자가 나중에 나라에 큰 공을 세웠다고 해서 옥쇄골이라 불렀다 한다. 또한 신부가 출산 기미로 요절복통을 할 때 다리 위에서 요강을 떨어뜨렸다 하여 요강다리라고 불렀다고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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