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야 책으로 보기 1부

김제벽골제| 2019-04-25| 267

一. 吉 凶(길 흉)

대보름 날이다.

그렇게도 극성을 부리던 삼동설한(三冬雪寒)도 해가 바뀜에 따라 봄기운이 오고 겨드랑 밑에도 제법 훈훈함을 느끼게 한다. 사람들의 걸음걸이도 퍽 활기(活氣)가 돋는다. 며칠전만 해도 살을 에이는듯한 쌀쌀한 바람에 진눈깨비가 날리더니 엊그제부터 말끔히 개이고 오늘은 아주 화창한 날씨이다.

구납(舊臘) 대한절(大寒節)에 몰아친 백설이 성산(城山) 북쪽 골짜기에까지 잦아지고 남녘에서 따스한 봄바람이 분다. 성급한 소년들은 백마금편(白馬金鞭)을 날리고 흥겨워 노닌다.

입춘은 지났다지만 아직 해는 길어지지 않은 것 같다. 짧은 해가 벌써 서산에 기웃 거린다. 저녁때가 되자 처녀 총각들은 설레기 시작한다. 새해를 맞이하여 올해 운수를 보름날 저녁 망월(望月)을 먼저 보는데 기대 해 본다. 망월을 먼저 보는 총각이나 처녀는 올해 장가를 가고 시집을 간다는데서 가장 선망적인 민속(民俗)의 하나이다. 총각들은 총각 나름의 소망(所望)을 품고 뒷동산, 가급적이면 동쪽 하늘 잘 보이는 높 다란 곳을 찾아가는게 상례이다.

처녀들은 처녀의 꿈을 안고 남몰래 후원이나 울타리 안에서 발돋움을 하고 동쪽 하늘을 바라보며 염원으로 불태우고 있다. 이러한 광경은 마을마다 성시를 이루듯 모두 뒷동산이나 언덕위에서 달맞이에 여념이 없다. 개중에는 어른들도 호기심에서 나와 있다. 이럴 때 한몫 끼어 소란을 피우는 글방 도령들이 심심치 않게 놀이에 어울려 주곤 한다.

서당(書堂)도 섣달 그믐께부터 대명절 까지는 휴강이 된다. 그래서 아이들은 하나의 해방감에서 형 누나들의 뒷전에서 마음껏 뛰어논다. 수 많은 사람들이지켜보는 가운데 동쪽 산봉우리에 환하게 두둥실 나타나야 할 망월이 좀처럼 나타나지를 않는다. 애태우며 서성거리는 무리들은 실망하기 시작한다.

『구름이 낀게로군. 오늘 망월 보긴 틀렸구먼?』

『조금 후 구름이걷히면 그때 누구든 망월을 먼저 보면 소원 성취가 되는게 아닌가?』

『아니야. 달이 중천에 떠 오른 것을 보면 효험이 없다지 않아? 예부터 말야.』

『그건 그래. 망월을 본게 아니라 달을 본 것이 되니깐 말야.』

총각들은 주거니 받거니 한 마디씩 한다.

『야. 이제 망월 보기는 틀렸으니까 우리 달마슬 줄다리기나 가는게 어때?』

우두머리로 보이는 총각의 제안이 나왔다.

『그게 좋겠군.』

『망월 못보면 장가 못가나. 제기랄.』
『작년에도 오늘처럼 구름이 끼어 망월을 못봤는데도 장가 가고 시집들만 잘 가네.』

『이런게 다 미신이라구. 어서 가서 신나게 줄다리기나 하세.』

『야, 빨리들 가자. 줄다리면서 실컷 예쁜 색시들이나 놀려 먹자!』

총각들은 한가닥 희망을 안고 떠들썩하니 앞서거니 뒤서거니 자리를 떴다.

어느 안마당에서인지 널 뛰는 소리가 구성진 가락으로 들려 온다.

어느 우람한 담장안 궁궐같은 사랑채에는 두 노인이 마주 앉아있다. 한 노인은 무표정한 얼굴로 천장 한 구석을 바라보고만 있다. 또 한 노인은 돌부처처럼 무딘 얼굴로 피마자기름이 타가고 있는 미영심지를 뚫어지게 응시하고 있다. 이따금 기름타는 소리만이 들려온다. 오랜 시간이 흐르고 또 침묵이 흐른다.

이윽고 긴 한숨이 터져나왔다.

『할 수 없이 내가 가야겠군…….』

이집 주인인 연평헌(燕平憲) 노인이 혼차말처럼 중얼거린다.

『그게 좋겠군. 비록 말재주는 없으나 이야기는 충분히 해봤는데 신통한 결과를 얻지 못해 면목이 없네.』

이집 주인 연 노인과 친구되는 온막지(溫莫知) 노인이 어딘가 모르게 난처하게 받는 말투였다.

『아니야! 정말 먼 길을 수고했는데 무슨 소리야…….』

『수고는 무슨 수고야 좋은 대답도 못 얻고 왔는데…….』

『어때 주학자는 딴 핑계는 안보이던가…….』

『응…. 그런 기색은 일체 보이지 않던데…….』

『그런데……?』

『내가 보기에는 딴 생각은 없는 것으로 보는데…….』

『 그럼 왜 미온적일까?』

『만자중에서 언약을 해놓고 딴 마음이야 갖겠는가. 주학자 말씀대로 집안 우환으로 밀쳐진 것으로 보는게 타당하다고 인정이 가는걸세.』

『………….』

『너무 심려말게, 내가 보기에는 틀림이 없던데.』

『나도 그렇게 보지만 너무 시일을 오래 끌고 있으니 약간 걱정이 되는걸세.』

『그 고충을 모르는바 아닌지만 조금 기다려보게…….』

『 그럴 수 밖에 없지…….』

온노인은 그렇게도 즐겨하는 술상도 사양하고 자기집으로 돌아갔다.

뒷마을 온노인을 보내고 난 연노인은 화가 치밀어 올랐다.

온 노인의 말이 신통치가 않다. 지금도 택일을 미루고 있으니 말이다. 과년한 막내딸을 금년에는 꼭 혼례식을 올려야 하겠는데 작년에 언약을 해놓은 상대방 편에서는 아직 아무런 말도 없으니 답답할 수 밖에 없었다. 멍청하니 사랑채 앞 뜨락을 거닐던 연노인은 어쩔줄을 몰랐다. 오랜 친구지간에 서슴지 않고 오늘 삼십리 길이나 되는 야서성내(野西域內)
주사달(朱思達) 학자 집을 다녀온 온노인의 노고는 가상스럽지만 아무런 성과도 얻지 못하고 돌아왔다. 안에서는 온노인이 온걸 알면 성가시게 캐물을 것이 두려웠다.

이렇게 저렇게 궁리를 해보았으나 신통한 수가 떠오르지 않는다. 뜨락에다 화풀이라도 하는듯 세차게 발을 구르고 방에 들어섰다.

『여봐라. 술 좀 가져오너라.』

안에다 대고 연평헌 노인은 소리쳤다.

이제 연평헌 노인은 습관이 되어 있다. 즐거울 때나 화가 났을 때는 꼭 술을 찾는다. 술을 가져 오라고 하고서야 정신

『안마님께서 손님이 없으시면 안으로 들어 오시랍니다.』

방문 밖에 선 하녀의 말이다.

『오냐. 지금 들어 가신다고 여쭈어라.』

이렇게 말해 하녀를 보내고 난 평헌 노인은 한참 후에야 큰 기침을 하며 안마당 으로 들어섰다. 그때 막 막내딸년이 술상을 들고 안방문을 들어 서고 있었다.

『어서 들어오세요. 술이 잘 되었는지 모르겠군요.』

섣달에 빚어 놓은 술은 벌써 동이 나고 정초에 다시 빚어 놓은 술을 걸러 오는 모양이다.

『허, 당신 솜씨가 좋아서 술맛이 퍽 좋을거요.』
칭찬을 해주고 아랫목으로 좌정을 한다. 이윽고 막내딸년이 술상을 들어 아버지 무릎 앞으로 고쳐 놓는다.그리고 다소곳이 옆에 앉아 청동 주전자를 들어 녹대접에다 약주를 예쁘게 부어놓고

『아버님 약주일랑 조금만 드시어요.』

『오냐. 그러하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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