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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지민의 서글픈 이주사

일제강점기를 전후하여 한인들의 이주 유형은 대체로 다음과 같이 나누어 볼 수 있다. 1860년대부터 계절출가농업이민으로 시작된 한인들의 이주는 지리적으로 근접한 간도, 연해주로의 농업이민으로 이어졌다. 1905년 전후 하와이와 아메리카 대륙으로의 이주는 취업이민의 시초를 보여주나, 사기 노예이민이나 다름없었다. 1910년을 전후해서는 정치적 망명가까지 늘어 해외로 이주하는 조선인이 급격히 증가했다. 특히 일본의 급격한 산업발달에 따라 조선인 노동자의 ‘취업이주’도 급격히 늘었다. 그리고 일제가 만주를 침략한 후 조선농민을 대상으로 대량의 집단이민을 추진했다. 마지막 유형은 1930년대 말부터 자행된 ‘강제동원’이다.

일제강점기를 전후한 시기 한인들의 이주·이민의 규모를 전체적으로 알 수는 없다. 다만 1945년 일제 패망 당시 해외 한인의 수는 5백만 명에 달했다. 이는 당시 한국인의 20%에 달하는 숫자였다. 그 중 귀환한 수가 3백만 명 정도였고, 돌아오지 못한 사람이 2백만 명에 이르렀다. 자료에 따라 다르지만, 일본에서 140만 명, 중국 만주지역에서 100여만 명, 중국 관내에서 10여만 명, 하와이·대만·오키나와·남태평양 군도 등에서 10만여 명 정도가 귀환했다고 한다. 그밖에 지역은 귀환의 실태 자체가 밝혀져 있지 않은 상태다. 그 가운데 전시기 강제동원의 실상이 들어있다.

성전에 총동원하라

일제는 ‘만주사변’(1931)을 일으키면서부터 이미 전쟁인력의 부족을 느꼈다. 우선 조선을 전쟁수행을 위한 대륙병참기지로서 활용하면서 군수 생산력을 확충하기 위한 노동자 수요도 급증했다. 총독부는 국내외에서 증가하는 노동수요를 대처하기 위해 1940년 노무동원계획을 수립했다. 1940년 9월 현재 조선 내 군수산업에 1만 명, 생산력 확충 35만 명, 수출 12만 명, 운수통신업 35만 명, 토목건축업 28만 명, 생활필수품 및 생산력확충 부대사업 16만 명 총 127만 명의 노무동원계획을 세웠고, 1940년 한해만 42만 5,000명의 신규수급계획을 세웠다. 따라서 40만 명 규모의 새로운 노동자를 창출하기 위해 도시와 농촌인구를 대상으로 동원 가능한 인원을 조사하는 한편, 1939년 직업능력을 파악하여 노동력 수탈의 기초자료로 이용하기 위한 국민직업능력신고를 강제했다.

이러한 기초조사를 바탕으로 일제는 국내외 생산현장에 효율적으로 노동력을 배치하기 위해 노동력의 동원방식을 모집→관알선→징용 등으로 강화했다. 1939년부터 시작된 ‘모집’은 노동력을 필요로 하는 회사나 업주들이 일본 후생성으로부터 모집 할당을 받고 다시 조선 총독부의 허가를 받아, 지정된 모집 장소에서 할당된 노동자를 모집해 신체검사를 실시하고 이들의 명부를 작성한 후, 모집된 노동자들을 인솔해 일본으로 가는 방식이었다. ‘관알선’은 총독부 권력이 노동력 동원에 더 조직적으로 개입하기 위해 정비한 제도로서 1940년부터 부·읍·면 행정기관을 직업소개사업에 종사할 수 있게 하고, 국민총력조선연맹의 지방연맹 조직망을 구축하여 필요한 노동력 동원을 위한 제도를 보완하였다. 그리고 1941년에 조선노무협회가 총독부 산하에 설치되어 동원사무가 일원화되고 강화되었다. 각급 행정단위와 국민총력연맹의 말단 까지 협력하여 노동자를 공출하였고, 이때 경찰과도 긴밀한 협조가 이루어졌다. 이와 같이 적극적인 관알선을 통해 노동자 동원의 목표는 1942년 12만 명으로 크게 늘었고, 실제 9만 6,000명이 일본에 강제동원 되었다. ‘징용제’는 1943년 총동원업무에 종사시킬 필요가 있다고 판단되면 무조건 일방적으로 노동력을 동원할 수 있는 제도였다. 징용은 국가권력으로 노무를 일방적으로 명령하고, 피용자는 거부할 수 없었다. 또 일정 수의 인원을 반드시 채워야 하는 가장 강력한 동원력과 강제성을 띠었다.

1940년을 전후한 시기에 강제동행된 조선인 노동자는 주로 각종 탄광, 토건업 그리고 군수공장에 배치되었다. 이들은 일본인이 군인으로 징발된 빈자리를 보충하는 것이지만 일본인보다 저임금과 열악한 근무조건, 위험한 업무에 배치되어 고된 노동을 감당해야 했다. 특히 석탄 광산에 배정된 조선인 광부는 일본의 전체 석탄 노동 인구의 31%에 해당될 정도의 엄청난 인원이었으며, 대부분 일본 큐슈 및 홋카이도의 광산에 배치되었다.

이들 강제동원자는 황국신민화 교육을 통해 정신무장을 하고 간단한 작업교육을 1주일 정도 받은 후 곧장 갱 안 막장에 투입되었다. 일본어도 서툴고, 직업교육이라곤 받아 본 적 없는 농촌출신 조선인들은 무리한 생산 강요와 위험한 작업환경에서 빈발하는 사고로 수없이 죽어갔다.

한사람도 빠짐없이 동원하라

모집·알선·징용이 생산 현장의 정규 노동력을 조달하는 데 활용된 강제동원 수단이라면, 근로보국대는 정규 노동력을 보완하고, 주로 국내 동원 수단으로 실시되었다. 근로보국대는 1938년 6월 ‘학생생도의 근로봉사작업 실시에 관한 건’이라는 통첩이 발표되면서 학생들을 근로보국대에 편입시켜 생산 활동에 투입하였고, 각 도에서 일반인을 대상으로 한 근로보국대도 조직되었다.

일제의 마구잡이식 강제동원으로 농촌에 일손이 부족해졌다. 총독부는 촌락 단위로 공동작업반을 만들거나 생산책임제를 실시하여 식량증산과 부족한 노동력 동원을 추구했다. 일제는 중일전쟁 전후로 ‘생업(生業)을 통한 보국(報國)정신’을 강조하고 국민개로(國民皆勞)운동을 전개했는데, 농촌 노동력재편과 연계되어 있었다. 이러한 총력운동의 실천조직으로서 근로보국대가 전국적으로 결성되었던 것이다. 또 근로보국대로 편입되어 규율있는 단체활동을 통한 근로를 훈련함으로써 전시동원에 언제든지 적응할 수 있는 예비훈련의 역할도 했다.

1941년 이후 근로보국대는 단계적으로 확대 편성되어 동원되었고, 보국대원 일부가 특별대를 통해 관알선 등에 대비하고 있었다. 이러한 조직동원의 예비 훈련을 바탕으로 1944년 8월 ‘징용령’이 실시될 수 있었다. 그리고 1945년 3월 노동동원과 관련된 법령을 ‘국민근로동원령’으로 통합, 노동통제를 군대식을 재편했다.

이렇게 1939~44년까지 근로보국대로 동원된 인원은 총 480여만 명이다. 또 여기에 1944년 현재 일본으로 강제 징용된 인원 72만여 명, 군속 14만여 명을 합치면, 총 567만 명이 강제동원 당했다. 당시 14~49세의 남자 인구수와 맞먹는 수치의 노동력이 힘든 노동을 강요당했다. 여기에 징병과 여자근로정신대 등을 합치면 그 수는 더 늘어날 것이다.

군속이라는 이름으로 자행된 인간공출

일제는 정규군 외에 군속이라는 군요원도 강제 동원했다. 원래는 일본군이 직접 공장이나, 토목, 건설현장에서 ‘군모집’형식으로 군속을 충원했으나, 전쟁이 장기화되고, 태평양전쟁으로 전선이 넓어지면서 ‘특수징용’의 형태를 띠고 대대적인 동원이 자행되었다. 패전 때까지 육군이 7만여 명, 해군이 8만여 명을 군속으로 끌고 갔고 동남아시아지역에만 4만 7,000명을 끌고 갔다고 한다. 이렇게 끌려간 군속들은 남방의 비행장, 철도 건설현장, 군이 운영하는 군수공장이나, 운수요원이 되었고, 나중에는 포로수용소의 감시원으로 사역당하기도 했다.

1942년 6월 일제는 태평양전쟁이 확대되자 포로감시요원으로 일할 군속을 모집하였다. 이들에게 후한 대우를 대대적으로 선전한 조선총독부는 군속신분에도 2개월간 군사훈련을 시켜 일본군 병사로 만들었다. 그리고 인도네시아, 필리핀, 뉴기니아, 미얀마, 태국 등 각처 포로수용소에 배치했다. 일제가 패망한 뒤 포로수용소 감시원들은 연합군에게 전쟁범죄자로 심사를 받았고, 그 결과 148명의 조선인 군속이 전범으로 처벌받았다.

군속은 대체로 2년 계약이었으나 기간이 만료된 다음에도 계속 붙잡아 두었고, 급료도 한푼 지급받지 못한 경우가 태반이었다. 일본군 군인의 비인간적 대우와 차별 때문에 조선인 군속의 저항은 날로 높아갔다. 인도네시아 자바에서는 조선인 군속 3명이 반란을 일으켰고, 다른 인도네시아에 배속된 조선인 군속들은 ‘고려독립청년당’을 결성해 독립운동을 추진하기도 했다. 그러나 대부분의 군속은 패전군 일본군의 소속으로 전범으로 취급되어 고초를 겪었다.

전장의 총알받이로 끌려간 청년

침략전쟁이 중일전쟁으로 확대되자 조선청년들을 전쟁에 직접 동원하기 위해 1938년 육군특별지원병령을 공포한 일제는 징병제 실시 전까지 ‘학도특별지원병령(1944)’에 의해 1만 8,000명 가량의 조선청년들이 일본군에 지원했고, 그 가운데 전문대생과 대학생 4,300여 명이 전쟁터로 끌려갔다.

1943년 2월 일본군이 과달카날 섬 전투에서 패하여 전세가 불리해지자 1943년 병역법을 개정하고, 1944년 8월 징병제를 실시, 패전할 때까지 약 20여만 명이 징집되었다. 1944년부터 국민총력조선연맹의 총동원운동으로 징병제 실시에 대한 대대적인 선전활동을 펼치면서 강제로 징병에 동원했고, 이들에 대한 환송식이 마을마다 역마다 애국부인회, 국민총력연맹 명의로 성대하게 치러졌다.

징병검사를 받은 후 징집된 조선인 청년들은 조선에 있는 여러 훈련소에서 짧은 기간 훈련을 받은 뒤 중국과 동남아 최전선부대로 보내졌다. 이렇듯 무모한 전쟁터에서 전투중에, 또는 풍토병에 시달리다 죽는 이도 많았다. 그러나 일제가 벌인 전쟁터에서 희생되거나, 부상, 혹은 행방불명된 조선인의 수가 과연 얼마인지, 살아서 무사히 귀환한 수는 얼마인지 전혀 알 길이 없다. 패전 후 전쟁책임과 전후보상을 우려한 일제의 은폐로 그 규모를 가늠하기 쉽지 않다.

성노예로 끌려간 소녀들

일제강점으로부터 벗어난 지 62년이나 되었지만, 아직도 진실은 은폐된 채 피해자들의 절규만이 생생한 문제 중에 하나가 일본군 위안부이다. 일제는 부족한 노동력을 보충하기 위해 1944년 여자정신대근무령을 만들어 12세에서 40세까지 여자 수십만 명을 일본과 조선 내 군수공장에 강제 동원했다. 이들은 군수공장에 일한 경우도 있지만, 상당수 인원은 근로정신대 공출을 미끼로 중국와 남양지방의 전쟁터로 보내져 군인 상대의 위안부가 되었다. 이렇게 끌려간 조선 여성의 수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대략 20만 명으로 추정된다.

'일본군 위안부’는 90% 이상이 17세∼20세 가량의 처녀였다. 이들은 일본 군인이 배치되어 있던 만주, 중국, 대만, 홍콩, 태국, 필리핀, 말레이시아, 수마트라, 인도네시아, 몰카제도, 뉴기니아, 비스마르크제도, 캄보디아, 미얀마에까지 보내졌다. 그리고 후방의 일본 홋카이도와 사할린 광산에까지 위안소가 설치되었다.

또 취업을 빌미로 사기당하거나, 유괴, 납치, 인신매매와 같은 수단으로 조선 여성들을 강제 동원하기도 했다. 동원의 방법은 다양했으나 징집업자(징집자, 위안소 경영자, 소개업자)는 일본 경찰과 군의 지휘·보호·감독 아래 있었고 그들의 묵인 하에 조선 여성의 강제동원이 원활히 진행되었다고 할 수 있다.

영문도 모르고 끌려간 소녀들은 일본군의 성노리개로 전락했고, 일본군에 대한 거부와 저항은 곧 죽음을 의미했다. 위안소는 군대의 이동에 따라 이동했고, 전투가 없는 틈마다 일본군에게 학대당했다. 이들은 몇 년 사이에 성병 혹은 폐결핵 환자가 돼 죽거나 혹은 일선 군인과 같이 전사하기도 했다. 더 잔혹한 것은 군 위안소 설치 사실 자체를 은폐하기 위해 집단학살하거나 옥쇄(玉碎-일본 천황에 대한 충절을 지켜 패전 후 자결을 강요)를 강요했던 사실이다.

이와 같이 비참한 생애를 맞이한 조선의 젊은 여인들은 그 존재마저 부정당하고 있다. 일본은 아직도 군에 의해 조직적으로 ‘성(性)’동원한 사실을 부정하고 있으며 그 규모조차 정확하게 파악할 수 없게 은폐하고 있다. 조국에 돌아와서도 숨어 지내던 생존 위안부 할머니들의 용기있는 증언으로 60여 전 야만의 현장을 기록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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