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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 재일조선인의 두양상

‘1910년 ‘한국병합’ 이듬해 겨우 2천여 명 남짓했던 재일조선인들은 1925년에 약 13만 명을 기록한 이후 급속히 늘어나 1930년에는 약30만 명, 1940년에는 약 119만 명, 그리고 일본이 패전한 1945년 8월에는 조선 총인구의 10%에 해당하는 240만 명으로 불어났다.1876년 조선을 강제 개항시킨 후 일본은 자유롭게 한반도를 왕래했으나, 대한제국의 한인들은 1899년 일본이 발표한 ‘외국인노동자 입국제한법’에 의해 자유롭게 일본에 갈 수 없었다. 그러나 조선에서 실시한 토지조사사업의 결과, 토지에서 쫓겨난 농민들이 임노동자가 되어 해외로 밀려 나올 수밖에 없었다.

일본은 제1차 세계대전의 연합군으로 참여하여 군수공업 중심으로 경기가 활성화되면서 산업이 급속도로 팽창하였고, 저임금의 노동자로 조선인들을 경쟁적으로 모집하기 시작했다. 1911년 오사카(大阪)에 있는 방직 공장이 최초로 조선인 출장모집을 통해 조선인을 고용한 것을 시작으로 1917년 무렵에는 후쿠오카현, 홋카이도 등지의 탄광과 오사카, 효고, 와카야마, 오카야마 등지의 방적공장, 조선소, 제철소, 유리공장 등에서 조선인 노동자를 고용하기 시작했다.1918년 2월에는 조선총독부도 ‘조선인노동자모집취체규칙’을 내놓을 만큼 조선인 노동자의 일본 이주가 급격하게 늘었다.

곧이어 2·8독립선언과 3·1운동이 일어나자, 조선총독부는 '조선인의 여행취체(旅行取締)에 관한 건'을 발표하여, 조선인들의 일본 이주를 사전에 억제했다. 그러나 1920년부터 실시된 '산미증식계획'으로 조선 농민들은 더욱 궁핍해졌고, 일본 기업은 싼 임금의 조선 노동자를 필요로 했기 때문에 1922년 12월 도항 제한은 철폐되고 형식상으로는 ‘자유도항제’가 실시되었다.

일본으로 이주한 조선인 노동자들은 농민이 아닌 단순 노동자, 육체노동자로 일을 했고, 단지 1∼2년, 길어야 3∼4년간 일본에서 돈을 벌고 귀국할 생각이었다. 조선인들이 종사한 직종은 초기에 주로 방직·제사·염색·유 리 공장 등에서 단순 노동자로 일을 했고 인원이 증가하면서 토목공사 노동자, 도로공사 노무자, 운송잡부, 탄소인부, 벌목공 그리고 탄광 광부로 직종이 확대되었다. 나중에는 오물 치우기, 수중작업 등 더럽고 힘들어 일본인이 기피하는 영역까지 담당하게 되었다. 조선인들은 공업의 중심지인 오사카를 중심으로 하는 한신 공업지대와 한반도에서 가까운 큐슈(九州)지방을 중심으로 거주하였으나 점차 전국으로 확대돼 갔다.

이 시기 조선인의 이주는 노동자가 절대적으로 많았지만, 유학생도 상당했다. 1868년 메이지유신을 거친 일본의 선진 문물을 배우려 했던 개화파와 같이 많은 젊은이들이 일본으로 유학을 갔다. 1910년 ‘한일합병’ 당시 일본에는 총 790명의 조선인이 있었는데, 그 중 유학생이 500여 명이고 나머지는 공관원, 시찰인 또는 정치적 망명인 그리고 소수의 노동자가 있었을 정도였다.

당시 일본 유학은 일제 권력에 편입하는 길이자, 반대로 일본 제국주의 실상을 배워 조선 해방의 길을 모색하는 길이기도 했다. 조선 유학생들은 대부분 도쿄에서 여러 단체를 통해 학생 운동을 전개했는데, 그 대표적인 조직이 도쿄조선유학생학우회였다. 1912년에 발족한 도쿄조선유학생학우회는 도쿄 유학생 전원이 자동 입회하는 단체로서, 회원들의 친목을 도모하고, 조선인으로서의 민족의식과 국권회복을 위한 애국심을 고취했다.

관동대지진과 조선인 학살

‘1923년 9월 1일 오전 11시 58분 44초 도쿄에서 남쪽으로 약 80㎞ 떨어진 곳을 진원지로 하는 규모 7.9의 대지진이 발생, 약 7∼8분간 계속됐다. ‘관동대지진’이라 불린 이 지진으로 목조였던 도쿄의 가옥은 대부분이 불탔고, 여진과 화재가 도쿄 일대 요코하마시, 가나가와현 등에서 3일간 지속됐다. 인적 피해사항은 사망자 99,331명, 부상자 103,733명, 행방불명 43,376명에 달하였고, 물적 피해사항은 가옥 소실 447,128호를 비롯하여 물적 손실이 200억 엔에 달했다. 지진으로 인하여 엄청난 사회적 혼란이 발생했을 때, 도쿄를 비롯한 피해지역에는 “부정한 조선인과 사회주의자들이 방화를 했다.”, “조선인이 방화를 했으며 우물에 독약을 뿌리고 일본인을 살해하며 일본 여인을 강간한다.”는 등 터무니없는 유언비어가 떠돌았다.
이에 당국은 계엄령을 선포하고 군인을 출동시켜 일본인들을 불안하게 했으며, 조선인에 대해 극도의 공포심과 증오심을 갖게 하였다. 또 당시 일본인들은 경제가 불황에 접어들면서 실업자가 증가하였고, 일본에 대거 이입된 조선인 노동자들에게 적대감과 멸시감을 가지고 있었다. 따라서 지역의 복구와 구제를 위해 조직한 자경단은 조선인과 사회주의자들로부터 마을을 지킨다는 명목으로 폭력과 살상 행위를 서슴지 않았다. 심지어 경찰서에 쳐들어가 그 곳에 보호되어 있는 조선인들까지도 손을 묶어 불에 던져 타 죽게 했으며, 심지어 어린이까지 조선인이라면 모두 살해했을 정도로 잔인했다.

관동 대지진 사태는 9월 16일이 지나서야 수습되었으며, 이때 일본인에게 살해된 조선인이 대략 6,000명에서 어쩌면 20,000명이 살해되었을 것이라고 추정된다. 공포가 빚어낸 학살이라고 하기엔 너무도 많은 수의 조선인이 희생되었다. 일본 권력에 의도된 유언비어 조작과 메이지유신 이래 민중들 사이에 확대된 조선인 멸시관이 빚어낸 비극이라고 할 수 있다.

늘어가는 조선 마을

일본은 지진복구사업에 조선인을 동원하기 위해 다시 조선인의 이주를 장려하여, 1924년에는 12만 명, 그리고 1925년에는 13만여 명이 일본으로 다시 건너왔다. 이에 1925년 10월 일본으로의 이주를 저지하는 '도항저지제'라는 법안을 발표했다.

한편 일본의 쌀 수탈을 위한 산미 증산 계획이 추진되는 동안, 조선인 농민의 몰락과 빈궁 현상은 더욱 심해졌고, 1930년대 초반에는 70%의 농가가 해마다 보릿고개를 당하여 초근 목피로 연명하였다. 결국 식민지 농업 정책의 결과 몰락한 농민들은 농촌을 떠나 만주로 이주하거나 도시로 몰려들어 도시 빈민층이 되었다. 국내의 심각한 경제 상황으로 인하여 비록 일본의 '도항저지제'에도 불구하고 많은 조선인들이 일본으로 건너가게 되었다. 물론 이들의 상당수가 밀항의 방법을 택했다.

1929년 세계공황의 여파로 불황은 더욱 심화되어 일본은 조선인 이주를 더욱 제한하게 되었다. 1930년대 ‘일시귀선증명제도’와 ‘도항소개장 발급제도’를 실시하여 조선인의 이주를 억제했다. 이 제도는 일단 도일한 조선인의 경우 조선으로 돌아가지 않고 일본에 정주(定住)하도록 만드는 요인이 되기도 했다. 1936년에는 ‘규례통첩’을 통해 이주의 기준과 절차를 법규화했다.

일본내 거주 한인이 늘어가자 한인들의 집단거주지도 형성되었다. 초기 관부연락선을 타고 시모노세키 항에 도착한 조선인들이 오사카, 후쿠오카로 퍼져나갔다. 강제병합 후 1920년대까지도 재일조선인들은 대부분 쿄토, 오사카, 고베지역에 살았다. 상공업의 중심지로 노동력 수요가 많았기 때문에 조선인이 이곳에 몰렸다. 1920년대 후반에는 나고야 공업지대로 조선인 이주분포가 확대되었다. 조선인 거주지는 주로 함바(노동자 숙소)나 회사 사택, 토지소유자가 불명확한 저지대, 하천 등지에 만들어졌다. 일본 내에서 가장 하층 노동자였던 조선인의 거주지는 당연히 가장 더럽고, 불편한 데 만들어졌다. 그러나 조선인들끼리 모여 사는 마을이 유일한 쉼터이자 안식처였다.

도시의 하층민으로 사회 불만세력으로 응집할 가능성이 짙은 조선인들을 동화시키기 위해 일본은 조선인 친목회(협화회)를 만들게 했다. 이 친목회를 통하여 조선인들의 울분과 일본에 대한 적개심을 달랠 뿐만이 아니라 일본에 동화하도록 하고 나아가 일본에 정착할 것을 장려하기도 하였다.

민족 독립과 계급 해방을 위해

1918년 1월 미국의 윌슨 대통령이 '민족자결 14원칙'을 발표하자, 이에 고무된 동경 유학생들은 1919년 1월 6일 동경 간다구(神田區)에 있는 조선 기독교청년회관에서 조선의 독립을 요구하는 결의문을 채택, 조선의 독립을 만방에 호소하는 유학생 대회를 개최하였다.
이광수에 의해 작성된 독립선언서 초안 1부는 한반도에 전해 졌을 뿐만 아니라 국문 이외에 일문 과 영문으로 번역된 독립선언서가 각국 대사관, 공사관 그리고 일본의 장관, 귀족원, 중의원, 조선총독 등에 우편으로 발송되고 각 신문사에도 배포됐다.
1919년 2월 8일 유학생 약 600여 명이 참가한 가운데 동경 조선기독교 청년회관에서 역사적인 2·8 독립선언서가 낭독되었다. 2·8 독립선언서는 한반도에서 3·1운동이 일어나기 20일 전에 낭독돼 서울의 3·1운동에 영향을 주었다. 이 역사적 사건을 주도한 청년 학생들은 몇몇을 제외하고는 지속적인 항일운동의 선봉에 서게 되었다. 이들은 국내로 돌아가거나 상해로 건너가 항일투쟁을 벌였고, 일본에서도 계속 싸웠다.

3·1운동 이후 조선총독부가 조선인에 대하여 무단정치에서 문화정치로 정책의 전환이 있는 것과 같이 일본 정부는 일본에 유학하는 조선인 유학생들에 대해서도 반일 활동을 저지하면서 한편 온갖 회유책을 썼다. 1919년 이후 일본에서의 반일투쟁은 여러 가지 형태로 전개되었다. 1922년 니가타현 수력발전소 건설현장에서 재일조선인 노동자 1백여 명이 학살당한 사건이 재일조선인 사회를 뒤흔들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오사카에서 ‘조선인노동동맹회’가 결성되었고, 이어 각종 사상단체, 청년단체, 학생단체, 노동조합들이 결성되었다. 그러나 1929년 하반기 코민테른의 일당주의에 따라 재일조선인 민족운동은 일본 내 사회운동으로 방향을 전환하여 일본 계급운동과 반제국주의 운동에 주력하는 흐름과, 독자적인 조선인 투쟁에 주력하는 민족주의적 성향의 흐름으로 나뉘게 되었다. 그러나 각종 역사적 사건의 기념일이 되면 사상과 조직을 떠나 함께 기념하고 반일시위를 계속했다. 35년간 끈질긴 저항이 있었기 때문에 꿋꿋하게 재일조선인의 정체성을 지키며 살 수 있었다.

일본 각지로 강제 연행된 조선인들

1919년 이후 일본에서의 반일투쟁은 여러 가지 형태로 전개되었다. 1922년 니가타현 수력발전소 건설현장에서 재일조선인 노동자 1백여 명이 학살당한 사건이 재일조선인 사회를 뒤흔들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오사카에서 ‘조선인노동동맹회’가 결성되었고, 이어 각종 사상단체, 청년단체, 학생단체, 노동조합들이 결성되었다.
1931년 만주를 침략한 일본은 1937년 중국, 1941년 미국 하와이 진주만을 공격하여 전선을 태평양까지 확대했다. 1937년 중일전쟁의 발발로부터 1945년 8월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는 8년 동안, 일본은 전쟁을 위해 막대한 인원을 동원하고 물자를 소비하였다. 이 시기 일본에 의해 강제동원 된 조선인 수는 그 이전의 몇 배나 되는 규모였다.
일제는 1938년 4월 국가총동원령의 공포와 함께 1939년 7월 노동력 동원계획을 발표하였다. 그리고 조선총독부에 ‘조선노무자 일본 본토 이주에 관한 건’을 전달했다. 따라서 조선총독부에 의해 강제 연행된 조선인들이 일본으로 입국하게 되었다.

일본에 강제연행된 조선인들은 주로 고된 육체적 노동이 요구되는 석탄광산, 금속광산, 토목공사 현장에 끌려갔는데, 그 작업에서도 가장 위험한 갱내 작업 인부 70%가 조선인들이었다.

이렇게 1939년부터 1945년까지 일본 본토로 강제동원 된 조선인은 70여만 명으로 추산되며, 여기에 군인·군속 36만여 명을 합하면 강제동원된 조선인은 100만 명을 넘을 것으로 여겨진다.

이들은 초기에 이주한 조선인 노동자들과는 조금 달랐다. 강제연행 되어 온 이들은 사회와 격리된 탄광촌이나 밀림 속 토목공사장에서 함바라는 집단숙소에서 생활했다. 일본어 습득과 노동숙련도가 떨어졌던 이들은 위험하고 고된 노동현장에 내몰린 상황에서 늘 ‘도망’이라도 쳐서 고국으로의 귀환을 간절히 바랬다.

재일조선인, 재일한국인, 재일코리안

일본의 한인 이민사회를 정리하면서 이들에 대해 명칭이 재일동포, 재일교포, 재일조선인, 재일한국인 등으로 다양했다는 점을 환기해 볼 필요가 있다. 이러한 다중적인 용어로 불렸던 이유는 바로 재일동포사회가 한반도의 분단의 연장선에 있기 때문이다.

일본 내 240만 명 정도 남아있던 한인들은 해방이 되고도 약 1백만 명 정도가 남았다고 한다. 이미 일본에 생활기반이 생겼거나, 고향에 식구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 잔류할 수밖에 없었던 사람들이었다. 물론 미점령군이 귀환 시 반출재산을 손짐과 현금 1,000엔으로 제한한 이유도 있지만, 해방된 조국이 두 동강 나 맘대로 돌아갈 수 없으리라고는 상상도 못했을 것이다.

몇 년만 더 벌어 고향에 땅이라도 장만할 돈을 마련하면 돌아가리라 마음먹었을 그들은 우리말도 모르는 자식들 교육이 가장 걱정이었고, 고국으로의 귀환과 생업에 대한 권익 보호가 시급했다. 1945년 10월 조직한 재일본조선인연맹(조련)이 바로 이 때문에 생겨났다. 총련의 전신이기도 하다. 이들이 일본 좌파와 연계해 민중운동에도 참여하자, 일부 우파는 1946년 10월 재일조선인거류민단(민단)을 조직하게 되었고, 국내와 마찬가지로 해방공간 남북과 좌우의 갈등이 일본에서도 재현되었다.

해방공간 한반도는 내부의 갈등과 균열 때문만이 아니라 외세가 조장하고 조작한 탓에 더 비틀렸듯이, 그 연장선에 있던 재일조선인사회가 겪었을 불안과 고통은 짐작할 수 있다. 또한 이들은 여전히 해방되지 못한 식민지의 볼모로서 일본 사회에서 온갖 차별과 설움을 당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이제껏 재일동포 사회를 이러한 출발점에서 보지 않고, 남북 대결의 연장선에서 바라봐 왔다. 이제는 식민지 백성으로 가난에 겨워, 혹은 강제로 끌려가 타국에서 살아남기 위해 벌였던 그들의 분투에 대한 온전한 평가가 필요하다.

  • 담당부서 : 벽골제아리랑사업소
  • 연락처 : 063-540-29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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