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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해주란 어떤 곳인가?

중일전쟁이 더욱 격화되자 중국 내 민족해방운동 세력들은 항일무장투쟁을 강화해 갔다. 임시정부 중심의 광복군은 충칭을 중심으로, 조선독립동맹의 조선의용대는 화베이 타이항(太行)산을 중심으로 마지막 항전을 벌였다. 연해주는 동경 130.63도, 북위 42.27~48.4도, 유라시아대륙의 태평양 연안에 위치하고 있다. 두만강 건너 서쪽으로는 중국 헤이룽장성(黑龍江省), 동쪽으로는 우리나라 동해와 접해있고, 한반도 면적 4분의 3 정도의 크기이다. 서남방향에서 동북방향으로 길쭉하게 생긴 연해주는 1월 평균 영하 18도에서 7월 평균 영상 17도에 이르는 몬순기후로 농경작을 할 수 있고, 광물·수산·산림자원 등 천연자원도 풍부하다.

러시아 영토의 극동에 위치한 변방이지만 역사적으로 연해주는 그 지역을 차지하는 세력에게 대륙 진출의 진입로이자 해양으로의 뻗어갈 수 있는 출구이기도 한 요충지였다. 그래서 동북아시아 주요 민족들은 연해주를 두고 끊임없이 각축을 벌였다. 오랫동안 고구려와 발해의 영역으로 한민족의 영토였던 연해주는 거란의 요, 여진의 금, 몽고의 원, 중국 한족의 명, 만주족 청의 지배 이후 러시아 영토가 되었다.

1653년 청국은 아무르강 유역에서 동진하는 러시아를 공격하다 실패하자 조선에 소총부대 원병을 요청했고, 조선은 1654년 변급을, 1658년 신유를 파견해 청군과 함께 러시아군을 물리친 적이 있다.(나선정벌) 그러나 16세기 말 러시아는 시베리아까지 진출해 연해주를 극동진출의 요새로 만들었다. 청국과 러시아간에 아이훈조약(1858), 북경조약(1860)이 체결되어 우수리강과 연해주 일대가 러시아에 귀속되었다.

블라디보스토크와 모스크바를 잇는 시베리아 횡단철도의 시발점이기도 한 연해주는 블라디보스토크시, 나호트카시, 우수리스크시, 스파스크달리시 등 러시아의 얼지 않는 주요 항구도시와 산업도시를 보유하고 있다. 연해주의 행정수도인 블라디보스토크시에는 현재 러시아의 태평양함대가 주둔하고 있다. 한민족의 생활권으로서 우리 민족과 인연을 맺고 있던 지역이었으나 발해 멸망 이후 우리에게 잊혀진 땅이었던 연해주. 1860년대 조선을 휩쓴 대기근과 20세기 초 경술국치라는 정치적 요인으로 연해주는 다시 우리 민족의 역사무대로 등장했다.

연해주 포시에트 지역에 한인 13가구 정착하다

두만강을 넘어 노브고르드만 연안 포시에트 지역에 조선인 13가구가 정착하였다는 1863년 기사가 한인거주에 대한 최초의 기록이다. 이들은 몰래 국경을 넘어와 농사를 짓고 추수를 한 뒤 돌아가는 계절출가농업을 주로 했다.

임시로 거주했던 한인들이 연해주에 농토를 개간하면서 차츰 정착하였다. 연해주 당국은 한인들이 부지런히 황무지를 개간하여 농토를 일구고 개발하는 성과를 보고 극동의 노령지역 개발에 유용하리라는 판단에 한인들의 이주를 보호 장려했다. 1884년 조러수호통상조약이 체결된 직후인 1885년 러시아 국적을 가진 한인이 8,500명, 러시아 국적을 가지지 않은 한인이 12,500명, 그리고 계절에 따라 임시로 거주하는 한인이 3,000명으로 총 2만 4천여 명의 한인이 연해주에 머물렀다고 한다. 1888년 조러육로통상조약을 체결한 러시아는 토지를 제공하면서 국적 취득을 조건으로 내건 반면, 조선국적을 고집하는 한인들에게는 국유지 이용권 박탈과 함께, 2년간의 유예기간 내에 조선 귀환을 종용하는 정책으로 변했다. 그러나 한반도와 지리적으로 인접한 연해주는 중국 간도와 함께 조선인 이민자가 줄어들지 않았다.

1904년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1905년‘을사조약’을 강제해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완전히 빼앗았다. 대한제국의 외교권 상실은 연해주의 한인 이주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일본은 연해주로의 한인이주를 억제했고, 이전까지 생계를 위해 농업이주를 했던 한인들은 불법 망명이민자가 될 수밖에 없었다. 또 나라의 독립을 되찾고자 하는 많은 애국지사들의 정치적 망명도 이어졌다.

신新한韓촌村, 새로운 한인사회를 만든다

‘비탈진 땅이나 습지까지도 그들의 손이 닿으면 다 옥토로 변한다’고 할 만큼 조선인들의 농사 솜씨는 빛을 발했다. 초기 이주자들이 성공적으로 정착하자 한인들이 대량으로 이주해 왔고, 한인촌을 형성하기 시작했다. .

이주 한인들의 안식처이자 교육, 언론, 정보의 중심지요, 독립운동의 요람이 바로 블라디보스토크의 신한촌이었다. 원래 블라디보스토크 시내에는 개척리라는 한인촌이 있었다. 그러나 도시개발로 외곽으로 쫓겨나면서 새로 마을을 만들어 신한촌이라고 불렀다. 한인들은 개척리에 있었던 한인기관들과 계동학교를 신한촌으로 옮겼다. 한인들은 계동학교를 한민학교로 개명하여 새로 시설을 확충했다. 또 마을 입구에 독립문을 세워 국권회복의 의지를 고취하기도 했다. 주민들의 자치조직인 한민회를 만들어 한인사회 공동의 상호부조와 권익을 도모했다.

1908년 4만 7,000명으로 늘어나면서 국권회복 운동도 활발히 전개되었다. 1908년 한해만 의병이 1,451회나 출동했다. 또 창의회, 13도의군(1910.6) 등 항일무장투쟁을 조직했다. 조선이 일본에 강제 병합되자 성명회(1910.8)가 한일합방 무효선언과 반일투쟁궐기를 벌였고, 권업회(1911.5)는 항일민족역량 배양운동을 전개했다. 이어 한인사회는 대한광복군정부(1914)를 수립하였고, 전로한족회중앙총회를 개편한 최초 망명정부인 대한국민의회를 수립(1919.3)하는 등 끊임없는 항일투쟁을 벌였다.

한인지도자들은 교육과 언론을 통해서도 민족혼과 독립의지를 고취시키고자 했다. 연해주에는 초등교육기관부터 사범대학까지 있었고, <대동공보>, <해조신문>, <신한민보>, <권업신문> 등 여러 언론사도 만들어, 만주와 멀리 미주까지 신문을 배포했다.

한편, 1917년 러시아혁명은 세계사의 판도를 바꿀만한 역사적 사건이었다. 연해주 한인에게도 사회주의 물결이 들어왔고, 이동휘 등을 중심으로 최초 사회주의 정당인 한인사회당이 조직되었다. 3·1운동 후에는 여러 개의 공산주의 운동단체가 결성되어 혁명과 독립운동의 전망을 두고 서로 경쟁하기도 했다.

러시아혁명을 저지하고, 연해주에도 간도와 같은 식민제도를 실시하고자 했던 일본군이 시베리아에 출동했다. 항일투쟁을 위해 단결한 연해주 운동세력들은 러시아 혁명군과 함께 항일 빨치산 전쟁에 참가해 피 흘려 싸웠고, 1922년 일본군을 연해주에서 철수시켰다.

그 과정에서 한인 운동세력은 ‘4월 참변’-러시아 혁명군의 공격으로 일본 거류민이 다수 희생되자, 일본군이 신한촌을 습격해 한인들을 학살한 사건-과 ‘자유시참변’-조선인 군사조직 재편과정에서 한인 군사단체 내에 내분이 일어나 극동공화국 수비대와 함께 고려혁명군이 대한의용군을 공격하여 큰 사상자를 낸 사건-이라는 큰 시련을 겪어 많은 혁명가들을 잃었다.

극동에서 한인들을 제거하라

이런 정치적 격변 속에서도 연해주 한인의 수는 계속 증가했다. 그러나 혁명 러시아는 한인들의 연해주 거주를 더 이상 허용하지 않았다. 극동지방이 일본의 지배에서 벗어난 1922년 10월 25일 이후부터 소비에트 정부는 토지를 분배해 준다던 약속 대신, 한인의 재산을 몰수한 후 집단농장화를 추진하였다. 동시에 국경을 안정시킨다는 명목으로 연해주 한인들을 아무르와 하바로프스크 이북지역으로 강제 이주시킬 계획을 수립했다.

러시아 혁명정부는 연해주에 거주하는 다수의 한인들의 존재를 부담스러워 했다. 극동지역에 거주하는 한인들은 일본군 진출의 빌미가 될 수 있었고, 일본인과 구별이 안 되는 한인들이 첩자로 활동할 가능성이 있다고 우려했다. 러시아로 귀화하지 않은 한인들의 민족주의 성향도 그들에게는 부담이었다. 1922년부터 한인 이주계획은 끊임없이 제기되었다.

그러나 러시아공산당은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한인을 추방시킬 계획에는 적극적이었지만, 새로 이주할 구역에 정착기반을 준비하는 데는 소홀했다. 하바로프스크의 비탈진 바위나 습지로 옮겨진 첫 이주계획은 사실상 3천여 명 규모의 강제이주에 그쳤다. 먹을 물도 없었고, 사람이 도저히 살 수 없는 땅으로 추방된 것과 다름없었다.

유형열차에 실려 강제이주 당한 고려인들

1930년대에 접어들어 소련과 일본사이에 긴장이 고조되자 연해주 한인은 이제 국제정치의 희생양이 되었다. 1931년 일본군이 만주를 침략해 점령하자 우수리강을 사이에 두고 소련군과 직접 충돌하게 되었다. 그래서 일본인과 구별이 어려운 한인들의 존재는 소련군에게 부담이 되었고, 심지어 선량한 한인들을 일본군의 첩자로 몰았다. 이러한 긴장 속에 1937년 7월 일본이 중일전쟁을 일으키자, 스탈린은 중국과 상호 불가침조약을 체결하고 연해주 한인의 강제이주를 결정했다.

스탈린은 지령을 통해 한인이주 정책을 지시했다. 스탈린은 한인을 적성민족으로 규정하고 강제이주 전에 한인출신 공산당 간부와 군인장교뿐 아니라 지식인 등 지도급 인사 2,500여 명을 모두 체포·처형해 반대세력을 제거했다. 그리고 연해주와 사할린을 포함한 극동지방 한인 17만여 명을 9월부터 12월까지 4개월에 걸쳐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시켰다.

소련당국은 강제이주에 대한 반발을 막기 위해 2~3일 전에 출발일자와 며칠 분의 식사만 준비하라고 통보했다. 출발당일에는 군인들이 한인 마을을 포위한 후, 남편과 아내가 유럽인이거나 어머니가 러시아인인 경우를 제외하고 모조리 열차에 태워 객차, 화물차, 가축운반차에 실었다. 그리고 40여일을 달려서 중앙아시아 우즈베키스탄과 카자흐스탄에 속하는 반사막지대에 내버렸다. 열차가 정차하면 한인들은 제일먼저 대소변을 해결하고, 추운 날씨에 물과 땔감을 구해 식사준비를 했으나, 불시에 강제 승차시켜 출발하는 바람에 제대로 끼니조차 해결할 수 없었다. 추위와 굶주림, 비위생적인 열차환경 때문에 많은 노약자들이 도중에 희생되었다. 시베리아 횡단열차가 곧 감옥이었고, 무덤이나 마찬가지였다.

중앙아시아 황무지를 옥토로 바꾼 고려인들

극동에서 40여 일간 1만여 ㎞를 달려 도착한 중앙아시아의 겨울은 혹독했다. 강제이주당한 한인들은 극동에서 겪어보지 못한 학질과 풍토병에 시달렸고, 거주할 집도, 농사지을 땅도 마련되지 않은 반사막의 땅에 움막을 짓고 버텼다. 한인들이 정착한 초기 2년 동안 사망자가 11,800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소비에트 정부는 강제이주 후 한국어 사용은 물론 거주이전도 금지했고, 한인 청년들에게는 대학입학과 군복무를 허용하지 않고 탄광, 군수공장, 북극 산림벌채 등 강제노역에 동원했다. 그러나 소수 민족으로서 차별과 학대를 받으면서도 한인들은 부단한 노력을 통해 중앙아시아 황무지를 옥토로 바꾸고, 그곳에 쌀, 야채, 목화 등을 재배해 성공함으로써 소련 중앙아시아의 모범적인 소수민족으로 자리잡았다. 그리고 사회진출의 제약 아래서도 자식 교육에 힘을 쏟았던 한인사회는 과학기술, 교육 분야에 많은 인재들을 배출했다.

스탈린 사망 1년 후인 1954년 거주제한을 폐지하자 일부 한인은 연해주로 귀환했으나, 대부분은 중앙아시아에 그대로 정착해 오늘날 중앙아시아에 거주하는 한인은 40만 명에 이르고 있다.

  • 담당부서 : 벽골제아리랑사업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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