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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지역 한인거주의 역사

영토가 넓은 중국은 관내(關內)와 관외(關外-관동, 관북 등), 또는 화베이(華北)·화중(華中)·화난(華南) 지방 등으로 불렸다. 관내와 관외의 구분은 산하이관(山海關)이 기준이다. 만리장성 동쪽 끝에 있는 관문인 산하이관은 한족(漢族)이 북방 이민족으로부터 베이징(北京)을 보호했던 전략적 요충지로, 전통적으로 산하이관 바깥쪽을 오랑캐들이 사는 곳으로 여겼다. 관외 지역은 주로 중국의 동북지역, 즉 만주일대를 가리킨다. 화베이와 화중은 황허(黃河), 화중과 화난은 창강(長江, 양쯔강)을 기준으로 나뉜다.

그 가운데 중국 관내지역의 한인거주는 독립운동 전개와 밀접한 연관을 가지고 있다. 조선과 국경을 접하고 있던 간도와 달리, 남만주를 거쳐 중국관내로 옮겨 가거나, 따이렌(大連), 텐진(天津), 상하이(上海)를 통한 중국관내로의 한인이주는 주로 경술국치 이후 1910년대에 급격하게 증가했다. 19세기 후반에는 경제적 이유로 이주했던 반면, 이 시기는 정치적 망명이 눈에 띄게 늘었다. 그리고 만주일대가 일제의 지배 아래 놓인 후 많은 한인들은 남쪽 중국 대륙으로 밀려나면서 중국관내 한인거주가 늘었다. 또 중일전쟁기에는 수많은 한인들이 중국 여러 전투지에 강제로 끌려왔다.

그러나 일제강점기 중국 대륙에 거주했던 한인의 수를 정확히 알 수 없다. 많은 연구가 한인의 97% 가 거주했던 중국 둥베이(東北) 지역 한인사회에 집중되었고, 중국관내지역은 독립운동 관련 연구가 대부분이어서 일제강점기 중국 본토의 한인사회 형성 전반에 대한 연구는 미약한 실정이다.

따라서 항일독립운동사의 전개와 함께 주요한 거점이 된 중국 도시들을 중심으로 한인 이주사를 다루어 본다. 중국의 주요 독립운동의 거점이자 한인거주 중심지는 주로 화베이의 베이징(北京), 화중(또는 화동)의 상하이(上海), 시난(西南)의 충칭(重慶)을 꼽을 수 있다.

임시정부의 깃발을 세우다, 상하이

독립운동의 전개와 밀접한 연관성을 가지고 한인 이주가 증가한 대표적인 도시가 상하이다. 1842년 아편전쟁에 패배한 청이 영국과 난징조약 체결 결과 개항한 상하이는 이후 중국 대외무역의 중심항구가 되었고, 영국·미국·프랑스 등 서구 열강이 중국에 설치한 첫 번째 거류지였다. 상하이는 서양의 중국침략의 발판이 된 곳이지만, 동서양 문화와 사상의 충돌과 혼재가 오히려 혁명운동의 활력을 불어넣기도 했다. 따라서 편리한 교통, 통신 등과 국제적인 환경, 동양 최대의 국제도시로서의 지위는 해외에서 독립운동기지를 건설하려는 많은 독립운동가들을 상하이로 모이게 했다. 주로 애국계몽운동을 전개했던 신규식·박은식·신채호·조성환·정인보·손정도 등이었다. 신규식·박은식 등은 동제사를 조직, 각지의 독립운동인사와 연계를 도모하였고, 김규식·여운형 등은 최초 한인정당격인 신한청년당을 만들기도 했다. 국제적인 교류지인 만큼 사상의 교류도 다양했던 상하이에서 한인들은 민족주의·공산주의·무정부주의 등 다양한 계열의 단체들을 조직하여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3·1운동 후 독립운동가들은 일본 식민통치에 항거하기 위한 총지휘부인 임시정부를 바로 이곳 상하이에 세웠다. 국제도시인 상하이의 지리적 이점을 살려 임시정부를 상하이에 두고, 외교활동에 중점을 두었다. 또 국내외동포를 모두 관할하기 위한 기구로 연락기관인 교통국을 두고 지방행정제도인 연통제를 실시하였으며 국외에 거류민단을 설치하였다. 국내외를 연계하여 군자금 모집, 국내 정보수집, 정부문서 국내 전달, 인물 발굴 및 무기수송 등의 활동을 하였다. 이러한 임시정부 수립 소식을 듣고 많은 애국청년들의 상하이 망명이 이어졌다.

상하이는 국제적인 정보 생산지이자 교류장이었다. 독립사상 고취와 일본의 침략사실을 대내외적으로 알리기 위해 한인들의 출판 활동도 다양하게 전개되었다. 임시정부는 1921년 7월 임시정부 사료편찬부를 설치하고 9월말 전4권의 《한일관계사료(韓日關係史料)》를 완성하는 한편 박은식이 지은 《한국독립운동지혈사(韓國獨立運動之血史》를 간행하였다. 기관지로 《독립신문》·《신대한보(新大韓報)》·《신한청년보(新韓靑年報)》·《공보(公報)》등을 간행하여 독립정신을 홍보하고 국제정세 등을 국내외 각지에 알렸다. 한편, 이동휘, 김만겸, 여운형 등은 사회주의 사상의 전파를 위해 상하이에 조선문인쇄소를 차리고 마르크스와 레닌주의 서적과 간행물을 번역, 출판하여 여러 경로를 통해 한인들에게 사회주의 사상을 전했다.

1920년대 후반 약산 김원봉이 이끄는 의열단과 백범 김구가 조직한 한인 애국단의 의열투쟁이지지부진한 임시정부의 활동을 이어갔다. 1926년 김구는 파벌 다툼과 대립으로 겨우 간판만 유지하던 상하이 임시정부의 국무령에 취임했다. 이전의 평화적 방법에 의한 독립운동의 한계를 느꼈던 김구는 애국단을 만들어 공격적인 테러 작전을 통해 침체된 독립운동의 물꼬를 트고자 했다. 이봉창의 천황암살미수사건이나, 1931년 ‘상하이 사변’ 후 중국침략에 열을 올리던 일제를 향해 폭탄을 던진 윤봉길 의사의 상하이 의거(1932년)는 한국독립에 대한 여론을 대외적으로 널리 알렸고 침체에 빠져있던 민족해방운동에 활기를 불어넣었다. 그러나 1920년대 후반 가족과 친지까지 데려와 삶의 터전을 일궜던 상당수의 애국지사들은 일제의 탄압을 피해 가족과 함께 상하이를 떠나야만 했다.

한편 만주사변, 중일전쟁을 일으켜 중국을 침략한 일본군이 상하이에 진출한 1932년과 1938년에는 한인거주자의 수도 두 세배 증가하여 3,000여 명에 달했다. 이는 일제의 전쟁수요에 따라 유입된 한인의 규모도 증가했음을 보여준다. 이후 한인사회는 전시특수를 노린 상인들과 출세를 노린 친일파들이 절대다수를 차지했다.

조선 독립의 길을 찾다, 베이징

화베이 지방은 역사적으로나 지리적으로 한국과 일찍부터 상인의 왕래가 잦았던 지역이다. 특히 정치·경제·문화의 중심지인 베이징과 항구도시인 텐진(天津)에 한인들이 많았다. 일본이 조선을 강제병합하자 독립운동가들을 비롯한 한인들의 이주가 급증하였다. 1937년 중일정쟁 발발 후에는 일제가 강제로 한인들을 집단 이주시키거나 전쟁에 동원한 결과, 해방 당시 베이징에 3만 5,000여 명, 텐진에 1만 5,000여 명, 타이위안(太原)에 1만 5,000여 명 정도가 거주했다고 한다. 물론 독립운동가도 있었지만, 대도시에서 금제품을 밀매에 종사해 사회문제가 된 한인 부류도 있었다.

이전까지만 해도 베이징과 가까운 텐진에 주로 한인 관리와 상인들이 거주했으나 1905년 이후 정치적 망명자들이 늘었다. 신민회에 참가한 조성환은 신민회 동지들과 함께 1906년 베이징으로 망명, 만주와 연해주를 무대로 독립운동의 터전을 다지기 위해 노력했다. 신채호는 1915년 베이징으로 와 연구와 집필에 몰두했다. 1918년 홍명희·변영만·이광수 등도 베이징에 체류했다. 1919년 2월 이회영은 베이징에서 동생 이시영·이동녕과 독립운동 방법을 논의했다. 이를 계기로 베이징과 중국 관내 지역으로 이주하는 한인이 점차 증가했다.

1924년 당시 베이징에 거주하는 한인은 상하이 보다 많은 1천 명에 달했다. 지정학적으로 무장투쟁이 활발한 중국 동북지역과 임시정부의 소재지인 상하이의 중간지점인 베이징은 독립운동에서도 만주의 무장독립론, 임시정부의 외교독립론, 실력양성론의 영향을 골고루 받고 있었다. 따라서 베이징에서의 한인들의 독립운동은 다양했고, 이 운동이 다른 지역에 영향을 미치기도 했다.

독립운동세력 간에 연락 거점이었던 베이징은 한인들의 드나듦이 다른 어떤 지역보다 컸다. 이 시기 베이징에 있던 한인 독립운동가들은 베이징을 떠나 임시정부 조직에 참여하기 위해 상하이로 향했다. 그러나 독립운동노선을 둘러싸고 이승만 중심의 임정노선에 반대하는 세력이 베이징에 다시 모이기도 했다. 1920년대 후기에 주목할 것은 공산주의자와 민족주의자 모두 대동단결을 호소하여 대독립당 조직촉성회가 결성되어 민족유일당 운동을 벌였다는 점이다. 결실을 거두지는 못하였으나 이후 민족통일전선운동의 징검다리가 되었다.

한편 베이징에서 활동한 한인공산주의자들은 주로 《혁명》《보도》 등 다양하고 많은 간행물을 만들어 연해주, 만주, 하와이, 일본과 국내까지 배포했다. 이들은 공산주의를 선전하면서 혁명적·진보적 수단으로 한국의 독립을 실현하고자 했다.

또 베이징한인 주요한 구성원이었던 유학생들은 유학생회를 만들어 활동을 전개했으며 독립운동단체로서 손색이 없을뿐더러 많은 청년학생들이 직접 독립운동 전선에 나섰다.

1930년대 중반 이후에는 동북지역에서 조직적으로 이주하는 경우도 많았다. 일본 관동군이 중국 동북지방을 완전 장악하자 한인들은 동북지역을 떠나 중국 관내 지역으로 옮겼다. 1933년 동북에서 활동하던 지청천이 베이징으로 옮겨와, 난징(南京)으로 진출했고, 베이징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하던 한인민족주의자나 공산주의자들은 더 남부로 이주했다. 이후 베이징지역 한인 독립운동은 세력이 약화되었다.

항일전선에 총집결하라, 충칭

관내지역 독립운동 세력이 1938년부터 중국의 임시수도가 된 충칭에 도착한 시기는 1939년 무렵이다. 임시정부는 1945년 8·15광복까지 상하이(1919)·항저우(杭州, 1932)·전장(鎭江, 1935)·창사(長沙, 1937)·광둥(廣東, 1938)·류저우(柳州, 1938)·치장(1939) 등지로 청사를 옮기며 끈질긴 독립운동을 전개했고, 그 마지막 항전지가 충칭(重慶, 1940)이었다.

먼저 김원봉 계열이 도착하였고, 이어서 임시정부 요인들과 가족·친지, 독립운동세력들이 충칭에 모여들었다. 광복진선 3개 정당이 통합 논의를 계속한 결과, 1940년 5월 8일에 하나로 통합하여 한국독립당을 결성하였다. 비록 우파진영만의 통합이기는 하지만 이로써 광복진선 결성 이후 줄곧 추진해 왔던 우파진영 3당 통합이 이루어졌다.

한국독립당 결성 후 임시정부는 1941년 ‘대한민국 건국강령’을 발표하였다. 더 나아가 민족좌파의 대표자인 민족혁명당이 임시정부에 합류하여 민족해방운동 전선을 통일시켜나갔다. 한편 임시정부는 한국광복군선언문’을 발표하고(1940) 한국광복군을 창설하였으나 중국 국민당 정부의 인준을 받지 못했다. 비록 중국군사위원회의 지휘를 받는 상황 아래서도 당초 3개 지대로 출발했다가 곧 5개 지대로 확대되었다. 그리고 1942년 광복군은 조선의용대와 통합하여 군사력의 통일도 이루었다.

임시정부는 항일독립운동세력의 통일정부를 구성한 자신감으로 연합국에 대한 외교활동과 함께, 대일 전쟁에 연합국의 일원으로서 지위를 확보하기 위한 군사합작도 도모했다. 미국 oss(미 전략첩보부)와 합작으로 국내 투입 유격요원을 훈련시키고, 국내정진군(國內挺進軍)을 편성하였으나, 일본의 항복으로 실현되지 못했다.

조국의 독립과 해방을 위한 항쟁의 불꽃이 충칭에서 타올랐다. 아직도 충칭 현지에는 조선민족혁명당과 조선의용대 본부 터, 한국광복군 제1지대 본부 터, 광복군 총사령부 건물, 임시정부 오사야항 청사 등이 남아 있다.

독립군과 일본군으로 총부리를 겨눈 형제들

중일전쟁이 더욱 격화되자 중국 내 민족해방운동 세력들은 항일무장투쟁을 강화해 갔다. 임시정부 중심의 광복군은 충칭을 중심으로, 조선독립동맹의 조선의용대는 화베이 타이항(太行)산을 중심으로 마지막 항전을 벌였다. 조선의용대 주력부대는 총으로 맞서 일본군과 싸우겠다는 일념으로 일본군과 교전이 벌어지고 있던 화베이 타이항산으로 이동했다. 깎아지른 절벽으로 이루어진 봉우리들이 끝없이 이어진 타이항산은 하나의 거대한 산맥이었다. 그 산맥의 중앙분지에 위치한 마전마을엔 중국공산당 군대인 팔로군 전방총사령부가 있었다. 이 팔로군 사령부와 함께 조선의용대는 항일투쟁을 전개했다. 일본군이 물자유입을 막기 위해 외곽을 봉쇄한 탓에 추위와 배고픔, 외로움과도 싸워야 했다. 1942년 일본군 6만 병력의 공격에 맞서 싸우던 진광화, 윤세주 등 조선의용대는 끝내 타이항산에서 산화하였다.

한편, 전황이 불리해지자 1943년 일본은 조선인 학생에 대한 강제징병을 실시했다. 그해 가을 전문대생과 대학생 4,300여 명이 일본 육군 이등병이 되어 전선으로 끌려갔다. 중국전선으로 끌려간 학병 중에는 목숨을 걸고 독립군을 찾아 탈출한 용감한 학병도 있었다. 무려 6,000리나 되는 장정(長征) 끝에 마침내 충칭 임시정부에 도착한 청년들이 김준엽, 장준하, 윤경빈 등이었다. 탈출에 성공한 33명은 한광반에서 단기훈련을 받고 광복군 3지대에 편입되어 일본 관동군이 아닌, 대한민국임시정부 광복군으로 조국의 독립을 위해 싸웠다.

이렇게 일제에 의해 전쟁터로 끌려간 관동군 출신 한인의 수는 2~3만 명에 이르렀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 가운데 소련군에게 포로가 된 자가 1만여 명, 나머지가 소속부대를 이탈해 각자 생환의 길을 찾았다. 관동군 출신 한인 중에는 일본 육군사관학교나, 만주 군관학교를 졸업한 장교급 한인이 있었는데, 이들은 자발적으로 일본군인의 길을 선택한 자들로 관동군의 장교가 되어 독립군 토벌 전쟁에 앞장섰던 자들이다.

그 외에 각종 소년병학교 출신의 지원병이 있었고, 군부대를 지원하는 공병대와 같은 군속도 관동군 소속이었다. 허울 좋은 지원이지, 사실상 반강제적 동원에 끌려온 이들이었다. 전선이 확대되면서 남방지역 포로가 많아지자 포로감시원으로 동원되었던 이들은 해방후 bc급 전범의 멍에를 쓰기도 했다. 그리고 관동군의 성적 노리개가 된 일본군 위안부도 20만 명이상으로 추정된다.

중국이라는 이웃 나라에서 독립군과 일본군으로 총부리를 겨눴던 형제들은 1945년 8월 15일 해방이 되자 소련군의 포로 또는 연합군의 포로 신세가 되었다. 특히 관동군 출신들은 일본군의 앞잡이로 찍혀 중국인들에게 공격 표적이 되었기 때문에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서는 어떻게든 조선으로 귀환해야만 했다. 광복군도 조선의용군도 해방된 조국의 해방 전사로서 귀국하는 길은 남이나, 북이나 다 쉽지 않았다. 미소 강대국에 의한 한반도 분할점령이 이들의 귀국길도 갈라놓았고, 더디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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