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제시 문화관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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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도의 역사

간도의 지리적 범위는 정확히 규정되어 있지 않다. 대체로 만주 동남부, 즉 현재 두만강 북쪽 옌벤(延邊)조선족자치주에 해당하는 지역을 일컫는데, ‘북간도’라고 주로 불러왔다. 그리고 백두산 서쪽의 압록강 이북지역과 쑹화장(松花江) 상류, 압록강의 중국 측 지류인 훈장(渾江) 일대가 ‘서간도’이다.

간도라는 명칭은 두만강 북안의 광제욕(현 룽징〔龍井〕 선구촌)과 함북 종성 사이에 있는 모래섬(사이섬, 間島)을 가리켜 이름지은 것이라고도 하고, 조선 후기 이주해 온 조선 농민들이 개간한 땅이라는 의미의 간도(墾島·墾土·艮島)라고 불렀다고도 한다. 간도에서 영신ㆍ명동학교를 운영한 윤정희가 1930년대 간행한 것으로 추정되는 『간도개척사』를 보면 경진년(1880) 회령부사 홍남주가 가난한 주민들을 구제하기 위해 두만강 북쪽 마라동(馬羅洞)을 개간할 것을 권유하고 그 일대를 간도(間島)로 명했다고 하니 이로부터 조선인들은 두만강 북쪽 일대를 일컫는 지역명으로 간도를 사용했다고 할 수 있다.

대륙성 기후로, 산지에 강수량이 많아 하천의 수량이 풍부하고, 1월 평균기온 -14.1℃, 7월 평균기온 21.6℃인 간도는 주로 곡저평지(谷底平地)에서 쌀·콩·조 등의 곡물을 생산한다. 특히 벼농사는 한국인이 이주한 뒤에 발달하였다. 또 산지에는 삼림이 우거져 중요한 임업지대를 이루고, 동쪽에는 각종 지하자원이 매장되어 있어 공업발달에도 유리한 자연환경을 가지고 있다.

19세기 후반 한인들이 정착하기 시작한 간도는 역사적으로 고구려, 발해의 활동무대였다. 이러한 민족의 옛 땅에 대한 애착과 지리적 접근성 때문에 함경도, 평안도 일대 변경지대에 살던 가난한 농민들이 쉽게 국경을 넘었다. 계속해서 한인들의 이주가 급증하자 이 지역을 둘러싸고 조선과 청 사이에 국경분쟁이 불거졌다.

200년간의 봉금령 해제

원래 간도 일대는 명 대신 중원을 차지한 청이 1658년 봉금지대(封禁地帶)로 선포하여 중국인과 조선인의 이주를 금지했다. 만주가 청조 조상의 발상지라는 이유와 만주족의 경제적 자원과 비옥한 토지를 보호하기 위해서였는데, 이 지역은 조선 국경 거주자들에게도 인삼 등을 채취하고 수렵과 벌목을 하던 생활무대였다.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금법(禁法)을 무릅쓰고 도강하는 한인들이 계속 늘어 조선과 청국 간에 외교 쟁점이 되자 청은 오라총관(烏拉總管) 목극등(穆克登)의 주도로 1712년 백두산정계비를 설치하여 국경을 획정하고 월경금법(越境禁法)을 더욱 강화했다.

19세기 중엽 한인들이 압록강·두만강을 건너 간도와 연해주 등지로 이주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기아와 빈곤의 타개에 있었다. 그 이전에도 두만강·압록강을 건너 간도 땅에 농사를 짓고 가을이면 타작한 곡식을 가지고 돌아오는 계절출가이민(季節出家移民)이 있기는 하였다. 한인들의 간도 이주가 본격적으로 늘어난 때는 함북·평북지방을 비롯한 서북지역에 대흉년이 든 1869~70년 2년간이었다. 대흉년에 초근목피로 겨우 연명하던 서북지방의 주민들은 영양부족에 굶어죽는 이가 부지기수여서 1869년 기사년(己巳年)을 기사년(饑死年)이라고 부를 정도였다.

두만강과 압록강을 넘어 간도 일대에 정착하는 한인들은 1881년에 이미 1만여 명에 이르렀다. 이미 황무지를 개간하고 거주하던 조선 농민들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고, 이 지역에 대한 러시아와 일본의 침투를 막는 한편, 산둥지방 한족(漢族) 농민들의 이주를 장려하기 위해 청 정부는 봉금령을 폐지했다. 1883년 펑천(奉天)과 조선, 지린(吉林)과 조선 사이에 지방무역협정 체결로 청과 조선 간에 변경무역이 개선되면서 200여 년 지속된 봉금정책이 청산되었다. 청 정부는 옌지·훈춘에 초간국(招墾局)을 설치하여 조선이민의 거주를 승인하였고, 관내와 요동에서 이주민을 모집하여 북간도 이민정책을 추진하기 시작했다.

황무지를 새로운 농토로 일군 농민들

봉금정책 해제 후 한족(漢族)의 이주를 장려하였으나 교통이 불편하고 거리가 먼 북간도에 한족의 이주는 늘지 않고 조선인들의 이주는 줄을 이었다. 두만강변의 무산·종성·회령 등지에서 도강한 이주민들은 강기슭의 산골짜기를 따라 해란강 이남 일대, 곧 두만강변에서 멀지 않은 분지와 산기슭에 한인 촌락을 형성하였다. 그 뒤 이주민의 수가 급증하면서 한인들은 더욱 멀리 북상하여 북간도 도처에 한인마을이 자리잡게 되었다.

이에 청 정부는 이주민의 새로운 유입을 제한하고, 기존 거주민에 대해서는 치발역복(雉髮易服:머리를 땋고 호복을 입을 것)과 청으로의 귀화를 강요하였다. 이들 조선인의 쇄환(刷還:외국에서 유랑하는 동포를 데리고 돌아옴)문제가 불거지자 1883년 서북경략사(西北經略使)에 임명된 어윤중은 종성부사로 하여금 백두산을 답사하여 청과의 경계를 정하도록 하였다. 이때 토문강과 두만강이 전혀 별개의 강이라는 주장이 나왔다. 이어 두 차례의 국경회담이 있었지만 합의를 보지는 못했다.

청 정부는 1885년 현 룽징시 2곳과 훈춘시에 통상분소를 설립하고 이주 한인들을 정치적으로 통제했다. 이어 세 곳의 통상국을 월경간담국(越境懇談局)으로 고치고 두만강 이북으로 길이 350 km, 너비 25km 되는 광범위한 지역을 개간지구로 설정하여 한인 이주와 황무지 개간을 추진하였다. 그러나 당시 토지는 한족 또는 만주족만이 소유할 수 있었기 때문에, 많은 한인들은 아무리 황무지를 개간하여 논과 밭을 만들어도 개간한 땅을 이들에게 빼앗기고 30~40%의 소작료를 지불하는 방청살이(소작농)를 해야 했다. 지주의 머슴과 같은 일을 했을 뿐 아니라, 중국 관청에 민회세, 수리세, 소세, 소금세 등 각종 세금을 감당해야할 만큼 초기 이주자들의 생활은 결코 평탄한 것만은 아니었다.

한편 ‘을사조약’ 체결 후 간도에 거주하는 한인들의 의병활동을 저지하기 위해 일본은 조선통감부 간도출장소를 설치하고, 재판권까지 부여함으로써 한인들을 수시로 검문하고 처형하였다. 이에 대항해 만주에 거주하는 한인들은 기회 있을 때마 다 집단적인 저항을 했다.

이와 같이 불리한 여건에도 불구하고 한인들의 이주는 매년 증가하여 1894년까지만 해도 7만 8,000명이던 한인 인구가 한일 합방을 당한 1910년에 10만 9,000명(당시 간도 인구 약 13만여 명)을 돌파하였다.

수전농민의 기질

이주민의 수가 격증하게 됨에 따라 황무지 개간도 활발하게 진행되어 급격하게 농경지가 늘어났다. 이를 일러 1880년의 경진개척(庚辰開拓)이라 한다.

한인들이 북간도에 이주 정착하게 되자 각지에서 벼농사가 행해졌다. 북간도 한인들이 처음으로 수전농(水田農)을 실시하였던 것은 1900년 전후로 알려져 있다. 한전농사를 짓는 중국인들이 버리는 소택지나 수렁을 한인들이 개척하여 논으로 개간하여 옥답으로 바꾸어 놓는 것을 보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동북에서의 조선족들의 수전개발은 1875년에 처음으로 시작되었다. 퉁화지구에 정착한 조선족농민들은 처음으로 수전을 개척하여 벼농사에 성공하였고, 이후 북만주에서 남만주에 이르기까지 벼농사가 확대되었다.

초기의 수전개발은 상전벽해(桑田碧海)를 만드는 것과 같은 고역이 뒤따랐다. 만주의 칼바람을 맞으며 언땅을 뚫고, 물길을 막아 수로를 확보하고, 200년 간 방치된 땅에 제멋대로 우거진 갈대와 버드나무, 잡목들을 모두 뽑아내야 했다. 궂은 날, 마른 날 가리지 않고 김매고, 물대기를 하여 수전을 일궜다.

수전개발의 가장 어려운 점은 수로확보였다. 일제가 과장하고 조작한 사건이지만, 한·중 농민간에 수로를 둘러싼 분쟁이었던 만보산사건(1931)만 보아도 알 수 있다. 자연환경과의 싸움만이 아니라, 중국 원주민과 지주들의 수탈과 마적떼의 약탈을 견뎌야 했고, 옥답으로 일구어 놓으면 땅 주인이란 중국인이 나타나 일순간 쫓겨날 수밖에 없는 수모를 겪으면서도 이주 한인들의 수전농민의 기질은 꺾이지 않았다.

망국의 이주민, 독립운동 기지를 건설하다

‘을사늑약’을 전후한 시기부터는 한인의 간도 이주가 경제적인 면에서뿐만 아니라 정치·사회적인 면에서도 상당한 변화를 가져왔다. 일제에 의한 국권침탈과 경제수탈이 가중되는 상황에서 국권회복을 도모하고 일제의 탄압을 피하기 위한 정치적 망명자, 곧 항일독립운동자의 이주가 급격히 늘어났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정치적 동기에서 망명 이주한 한인들은 확고한 민족의식을 가지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그 들 중 상당수가 국내에서 정치·경제·사회적으로도 비중있는 지위를 가지고 있는 인물들이었다.

1905년 러일전쟁 승리한 후 뤼순에 관동도독부를 설치하고 룽징에는 조선통감부 간도파출소를 설치한 일제는 1909년 청과 ‘간도협약’을 체결했다. 한인들이 거주하는 간도지역이 한국의 영토임을 주장했던 일제는 간도를 청에 넘겨주는 대신 안봉선(安奉線) 등 철도부설권과 탄광채굴권 등 만주에서의 이익을 확보하여 중국침략의 발판을 마련했다. 그리고 간도협약에 따라 통감부간도파출소를 폐지하고 간도일본총영사관, 5개의 상부지(商埠地)에 영사분관과 경찰서를 설치해 한인들에 대한 통제와 감시를 강화했다. 이로써 이주 한인이 피와 땀으로 개간한 옥토는 일본제국주의의 대륙팽창정책에 희생되고 말았다.

그러나 1905년 을사조약 전후부터 1910년 경술국치를 전후한 시기 항일운동에서 살아남은 의병(義兵)과 국내외의 민족운동자들은 서북간도를 비롯한 남북만주 등지에서 독립운동의 터전을 마련하기 위한 노력을 멈추지 않았다.

가난에 쫓겨, 나라 잃고 떠나 왔지만, 간도의 한인들은 고생 속에서도 마을마다 학교를 세워 아이들을 교육하고, 독립운동 자금을 모아 탄탄한 독립운동의 요람을 만들었다. 1906년 룽징 서전서숙을 시작으로, 만주 일대에는 신흥무관학교 등 여러 민족학교가 세워졌다.

그들이 서북간도 일대를 독립운동의 기지로 삼은 이유는 압록강과 두만강만 건너면 국내에 쉽게 진입할 수 있는 지리적 이점뿐 아니라, 그 곳에는 이미 10만여 명에 달하는 한인사회가 형성되어 있었기 때문에 인적·물적 기반을 확보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주 한인은 20년대 50만 명, 30년대 100만 명, 40년대 150만 명으로 늘었다.

서북간도를 비롯한 만주지역의 독립운동은 3·1운동 직후부터 시작된 독립군의 항일무장투쟁으로 발전하는데, 특히 1920년 일본군을 대파한 봉오동·청산리전투가 대표적이다.

청산리 전투 후 ‘간도참변-항일무장투쟁운동을 무력화시키기 위해, 1920년 일본군이 만주로 출병하여 무고한 한인을 대량으로 학살한 사건’과 자유시사변 등으로 만주·연해주의 독립운동은 한때 분산되고 침체했다. 그러나 각 단체들 사이의 통합운동은 꾸준히 계속되어 만주 일대 한인사회의 자치정부로 발전한 참의부·정의부·신민부 등 자치 정부가 결성되었다. 상하이의 임시정부는 인민과 영토가 없는 망명정부였음에 비해 이 삼부야말로 주권과 인민과 영토, 군사력까지 갖춘 실질적인 자치정부였다고 할 수 있다. 북로군정서(김좌진), 대한독립군(홍범도), 조선혁명군(양세봉), 동북항일연군 등 무장 항일투쟁 집단도 계속 이어졌다.

한편 일제는 1925년 중국 동북지방의 독립운동자 색출을 위해 펑톈(奉天) 군벌과 ‘미쓰야협약(三矢協定)-조선총독부 경무국장 미쓰야와 펑톈성 경무처장 우진 사이에 맺어진 것으로 만주 일대 한인 독립운동 세력을 색출, 탄압하는 구실이 된 협약’을 체결하였다. 중국도 재만 한인을 일제 침략의 앞잡이로 인식해 이들을 몰아내기 위한 수단으로 이 협정을 이용하였다.

1931년 ‘만주사변’ 뒤 중국인과 조선인이 일제에 맞서 함께 싸우기로 하고, 광활한 산림지대 등 지세를 이용한 항일 유격전을 만주 일대에서 벌였다. 한민족 고대사의 상징적인 지역인 만주는 20세기 들어서 독립운동의 요람이자 무장항일 투쟁의 근거지가 됐다.

만주지역에서 펼쳐진 독립운동은 국내와는 물론, 인접한 러시아 연해주 한인사회의 민족운동과도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3·1운동 이후에는 상하이에 수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와도 긴밀한 협조를 이루면서 민족독립운동을 전개해 나갔다.

만주 독립군의 이러한 항일의 전통은 1937년 중일전쟁 때까지도 계속 이어져 독립군사(獨立軍史)의 중요 부분을 장식하였다. 무장독립운동은 1930년대 중국공산당과 함께 동북인민혁명군·동북항일연군으로 발전해갔다. 특히 1930년대 후반 이후에는 무장항쟁이 민족통일전선으로 전환되고 ‘재만한인조국광복회’가 성립되어 독자적인 민족통일전선운동을 펴나갔다. 이와 같이 만주지역에서 펼쳐진 항일무장투쟁은 일제에 의한 민족수난기에 식민지 그늘에서 신음하는 조선인들에게 희망을 주었고, 이후 해방을 맞이하는 데 밑거름이 되었다.

새로운 감옥, 집단부락

일제는 대공황을 타개하기 위해 ‘만주사변’을 도발, 만주국을 세우고 이후 14년 동안 만주를 지배했다. 만주국 성립을 계기로 만선일여, 오족협화의 구호 아래 일제는 조선인들에게 ‘2등국민’이라는 지위를 부여한다는 기만적인 차별정책을 취했다. 조선의 자본가들도 만주를 기회와 성공의 낙원으로 받아들이고 일제의 만주지배를 정당화하는 데 기여한다. 많은 조선인 상공업자들이 만주에 진출하였고, 친일교사나 의사, 파출소 순사에서 만주군 장교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친일인사들이 만주라는 새로운 이상향을 향해 이주했다.

반면, 항일무장세력에 대한 탄압은 더 치밀해졌다. 만주의 항일무장세력이 만주 농민과 긴밀한 유대를 가지고 그들을 인적·물적 모태(母胎)로 하여 무장투쟁을 전개한다고 판단한 일제는 항일무장세력과 이를 원조하는 농민들을 아예 격리시키기 위해 집단부락정책을 실시했다.

일제는 항일유격지대 내에 산재해 있던 촌락들을 불태우거나 파괴하고 이들 지역에 거주하던 주민들을 방비시설이 갖추어진 집단부락에 강제로 수용하였다. 그리고 이들의 일상생활을 통제·감시함으로써 항일유격대의 부락 내 잠입이나 주민과의 접촉을 막았다. 집단부락의 구조를 보면 부락 주위에는 흙이나 나무 혹은 돌로 성벽이 둘러쳐져 있고, 성벽 위에는 전기 철조망이 설치되었다. 그리고 성벽의 사방에는 포대가 설치되어 있었고 대문에는 자위단(自衛團)이나 경찰이 상주하면서 부락민들의 출입을 일일이 검사·감시하였다. 그들은 이를 통해 항일 게릴라의 부락내 잠입이나 부락민의 항일 게릴라와의 접촉을 차단하려고 하였다.

일제가 건설한 집단부락의 효시는 1916년부터 1931년까지 지린성(吉林省) 건안현(乾安縣) 107개소를 들 수 있다. 이를 계기로 조선총독부에서는 1933년부터 간도지역에 28개소의 집단부락을 건설하였다.

그리고 조선총독부에서 추진한 만주 집단이주정책에 의해 이주해 온 농민들은 이 집단부락에 주로 수용되었다. 당시 국내에서 격화되고 있던 계급갈등을 완화시키고, 만주 일대를 중국침략의 후방과 식량기지로 만들기 위해 조선에서 매년 1만 가구를 이민시키기로 하고 ‘만선척식회사’를 설립, 조선 농민들을 집단 이주시켰다. 1937년부터 1941년 사이 2만 4,000여 호의 농민들의 이주되었다. 이들도 집단부락으로 이주되어 감옥살이나 다름없는 생활을 했다.

이 공작에 의해 1933년부터 1939년까지 건설된 집단부락 수는 1만3451개소에 달했으며 여기에 수용된 사람들은 수백만 명에 달했다. 결국 집단부락 정책이 효과를 거둠에 따라 만주항일무장투쟁은 1940년을 전후로 상당히 위축되었다.

해방 당시 간도 일대에 거주 한인의 수는 230만 명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 가운데 100만 명 정도가 귀국한 것으로 보인다. 이들은 일본군과 소련군의 전투를 피해, 또는 자신의 토지를 빼앗겨 어쩔 수 없이 귀환한 자들이다. 만주국이 붕괴하자 중국 관헌에게 농토의 소유권과 경작권이 몰수되어 많은 수가 빈민과 피난민으로 전락했다. 일부 한인들은 중국혁명의 와중에서 혁명군의 일원이 되기도 하고, 반대로 첩자로 몰려 고향의 국경을 등지고 더 멀리 유랑하게 되기도 했다. 일부 귀환한 이들 중에는 농사지을 땅을 구할 수 없어 만주로 재이민을 떠나는 이도 있었다. 조국은 해방되었으나 해방된 조국에 그들이 편히 안길 품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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