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제시 문화관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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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인들이 처음 겪은 멕시코의 자연환경

멕시코는 북아메리카의 일부로 남아메리카와 연결시키는 위치에 있다. 태평양 쪽으로 시에라마드레오리엔탈, 멕시코만 쪽으로 시에라마드레옥시덴탈의 두 산맥이 위치해 있고, 파나마지협(地峽)까지 환태평양조산대(環太平洋造山帶)를 형성하며 뻗어 있다. 시에라마드레옥시덴탈산맥은 해발고도가 평균 2,000m, 시에라마드레오리엔탈산맥은 평균고도 1,500m로 동쪽이 낮고 서쪽이 높은 지형을 이룬다. 그 사이에 있는 평균고도 1,700m의 멕시코고원은 국토의 1/3을 차지한다.

북위 19°를 따라 분포한 해발 5,000미터 내외의 화산들에 둘러싸인 멕시코 고원지대는 멕시코의 심장부로, 각종 생산물과 인구의 반 이상이 여기에 집중되어 있다. 국토의 대부분이 고원성 기후지만, 북회귀선이 남북을 가로지르기 때문에 지역적으로 기후차이가 있다. 사막지역인 북부지역은 고온건조하고, 멕시코 고원지대는 온난한 기후로 사람이 생활하기 가장 좋은 기후이고, 유카탄 반도 등을 비롯한 남동부 저지대와 해안지역은 고온 다습하다.

기후와 고도에 따라 식물의 분포도 다양하다. 멕시코 동남부의 1,000m 이하의 저지대와 해안지대는 열대성 우림지대로 코코야자, 바나나, 카카오 등 열대작물을 재배하고, 1,500m 내외는 참외, 귤, 망고 등의 열대 과일과 커피, 사탕수수 등이 재배한다. 멕시코 고원지대를 포함하는 2,000m 내외 지역에서는 멕시코 사람들의 주식인 옥수수, 콩, 호박 등을 재배한다.

특히 한인 이주민들이 처음 정착한 유카탄 반도는 서북쪽으로 멕시코만과 접하고, 동쪽으로 카리브해와 접해있다. 북부는 기온이 높고 건조하며, 남부는 고온다습한 기후로, 19세기 말경부터 사이잘 삼[麻]-로프 등 직물을 짜는 식물-과 에네껜 재배로 유명했다. 멕시코가 독립한 후 정부는 미국과 유럽시장을 겨냥해 에네껜 생산을 정책적으로 지원했고, 에네껜의 생산증가를 뒷받침하기 위한 대량의 노동력 수입이 필요했다.

노예로 팔려간 땅

19세기 후반 대흉년으로 가난을 피해 이주한 간도나 연해주와 마찬가지로 지리적으로 멀리 떨어진 멕시코로의 이주도 가난이 원인이었다. 하지만 이주방법과 경로는 많이 달랐다. 공개적인 모집광고, 대한제국에서 발행한 여권, 또 해당국가의 입국심사 등 절차적으로 보면 오늘날 취업이민과 같은 형식을 갖춘 이민이었다. 그러나 1905년 단 1회로 그친 멕시코 이민은 그야말로 사기이민이었고, 돌아오지 못한 이들은 고국으로부터 철저하게 버려졌다.
멕시코 이민은 전형적인 현대판 노예매매였다. 채무노예제로 불린 이 제도는 스페인 식민 시절부터 멕시코, 과테말라, 페루 등지 광산이나 대형농장에서 광범하게 시행되어 온 일종의 유사 노예제로서 멕시코 유카탄의 에네껜 농장과 남북전쟁 후 미국 남부의 담배, 목화 농장들에서 성행해 그 악명이 높았다.
물적 인적 교류가 전혀 없었던 멕시코의 에네껜 농장으로의 이민은 에네껜농장주협회 대리인이었던 브로커, 마이어스(jones g. myers)에 의해 주선되었다. 마이어스는 1904년 8월 중국과 일본에서의 모집에 실패하자 한국에 와서, 일본 대륙식민합자회사의 서울주재 직원 오바 간이치와 함께 이민자를 모집했다.
황성신문에 모집광고가 7차례나 실렸고, 전국에서 1033명이 모여들었다. 모집광고에는 "묵서가(墨西哥, 멕시코)는 극락 같은 곳이다.", "누구든 병들면 고쳐준다." 는 식의 허황된 내용도 적지 않았다. 노예로 팔려 가는 줄도 모른 채 한인들을 실은 영국 화물선 일포드 호가 인천항을 떠난 것은 1905년 4월 4일이었다.

100년전 에네켄 농장으로 간 1033명

1905년 4월 4일 1033명의 한인이 인천 제물포항을 떠나 5월 12일 유카탄 반도에 도착했다. 노동계약이 끝나는 4년 뒤엔 금의환향하리라며 멕시코로 향했던 한인의 '묵서가 드림'이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멕시코에 도착한 한인은 성인 남성 702명, 여성 135명, 어린이 196명이었다. 가족단위가 257가구에, 홀로 간 사람도 196명이나 됐다. 그 가운데 대한제국 퇴역군인이 200명으로 가장 많았고, 소작인·잡부·전직 하급관리에 양반들도 섞여 있었다. 이들은 유카탄 쁘로그레소 항에 도착해 거기서 기차를 타고 30분 거리인 유카탄의 수도 메리다 벌판에 도착했다. 한 번도 경험한 적 없는 살인적인 더위에 노천생활을 하던 그들은 에네껜 농장주들에게 노예경매처럼 팔려 가 흩어졌다.

유카탄 에네켄 농장

원래 멕시코 이민은 4년 계약노동이었다. 계약 만료일인 1909년 5월 12일을 앞두고 한인들은 샌프란시스코의 대한인국민회 북미총회 앞으로 계약 만료일에 앞서 한인들의 제반 문제를 도와 줄 특사를 파견해 줄 것을 요청했다. 대한인국민회에서 견묵위원(遣墨委員)으로 방화중(邦化重)·황사용(黃思溶)을 파견하여, 그들의 자활과 법적 문제를 돕도록 했다. 멕시코 이민자들의 상징 '애니깽'으로 더 잘 알려진 에네껜(henequen, 마야어)은 가시가 많은 선인장으로 건조한 땅에서 자라는 여러해살이 식물이다. 5년이 지나면 1년에 두 번씩 잎을 딸 수 있다. 길이 1~2m의 잎은 주위에 억센 가시가 있고, 초록색 잎의 껍질을 벗기면 질긴 섬유질이 나오는데 이것을 선박용 로프 등을 만드는 데 사용하였다.

당시 해운산업의 번창과 더불어 선박용 로프 수요가 폭증했기 때문에 유카탄 반도의 에네껜 농장은 1920년대 인조섬유로 대체되기 전까지 전성기를 맞았다. 폭증하는 수요에 맞춰 에네껜 농장에도 대량의 노동력이 필요했다.

25개 이상의 농장에 분산 배치된 한인들은 움막같은 초가집이 가구당 한 채씩 할당되었다. 이들은 24시간 감시를 받았고, 농장 내 매점을 통해서만 물품을 구입하는 강제 구입제도, 그리고 외상을 통해 계속 빚을 지게 만들어 발을 묶어 놓는 채무노예의 굴레에 갇혔다.

일본의 개입

‘우마나 가축만도 못한 노예생활을 하고 있다.’는 이들의 비참한 현실이 국내로 알려지자 고종황제는 8월 1일 이민회사와 교섭해 동포들을 송환할 방책을 구하라는 칙유를 내렸다. 그리고 정부는 일본관제 시찰단으로, 탁지부(度支部) 대신 민영기(閔泳綺), 표훈원(表勳院) 총재 민병석(閔丙奭)과, 일본을 방문중인 외부협판 윤치호(尹致昊)를 파견해 하와이와 멕시코 동포들을 시찰하라는 훈령을 내렸다.

윤치호가 도쿄에 도착한지 5일 후 도쿄에서는 미육군장관 태프트와 일본수상 가쓰라 사이에 비밀협약이 맺어지고 있었다. 일본이 필리핀에 대한 미국의 지배를 인정하는 대신 미국은 일본의 한국지배를 승인한다는 내용의‘태프트·가쓰라 각서’가 교환되었다. 대한제국의 국권은 이제 일본 손에 떨어진 것이나 다름없었다.

이런 형편에 윤치호의 멕시코 시찰은 좌절되었다. 대한제국의 외교공관을 전면적으로 철수시키는 마당에 뜻밖에 외교적 결실을 맺을지 모르는 윤치호의 멕시코 방문을 일본이 방치할리 없었다. 그리고 11월 17일 을사늑약이 체결됨으로써 대한제국은 일본에 외교권을 강탈당했고, 멕시코의 이주민들은 망국의 역사 저편에 파묻히게 되었다.

멕시코 각 지방회 명의로 보내진 독립자금

원래 멕시코 이민은 4년 계약노동이었다. 계약 만료일인 1909년 5월 12일을 앞두고 한인들은 샌프란시스코의 대한인국민회 북미총회 앞으로 계약 만료일에 앞서 한인들의 제반 문제를 도와 줄 특사를 파견해 줄 것을 요청했다. 대한인국민회에서 견묵위원(遣墨委員)으로 방화중(邦化重)·황사용(黃思溶)을 파견하여, 그들의 자활과 법적 문제를 돕도록 했다.

견묵위원이 도착했다는 소식에 몰려든 동포들의 모습은 처참했다. 새벽부터 밤늦도록 에네껜 잎을 하루에 수천 잎씩 잘라내면서 가시에 찔려 생긴 상처로 얼굴과 온 몸은 온전한 구석이 없었다. 위원들은 먼저 감옥에 갇혀 있는 한인들을 석방시키기 위한 법정투쟁을 벌였다. 당시 동포들은 불법적으로 계약이 만료되었는데도 억류되거나 유배당한 자들도 있었고, 심지어 다른 농장에 되팔려 간 경우도 있었다. 그리고 노예로 신음하던 먼 이국땅에서 멕시코 한인들이 1909년 5월 9일 대한인 국민회 북미총회 산하 메리다 지방회를 설립하도록 도왔다.

3일 후 자유의 몸이 되었으나, 당초 계약서대로 임금을 받은 경우가 드물어 무일푼의 자유를 얻었을 뿐이었다. 노예생활에서 풀려났지만 생활은 더욱 빈곤했고, 생계를 위해 다시 에네껜 농장으로 들어간 이들도 적지 않았다.

그런 그들에게 1910년 ‘한일병합’의 소식은 청천벽력과 같았다. 이제는 돌아갈 조국마저 잃어버린 신세가 되자 조국이 독립할 때까지 귀국을 포기한 한인들은 멕시코 전역으로 퍼져 나갔다.

메리다 지방회를 만든 한인들은 멕시코 전역 어디를 가나 학교와 교회를 세웠고, 담배를 파는 행상과 중노동의 품팔이로 생계를 연명하면서도 국민회 회원으로서 의무금을 비롯한 각종 세금과 의연금을 내는 데 충실했다. 멕시코 각 지방회 명의로 상해 임시정부에 보내는 후원금도 아끼지 않았다.

멕시코 꼬레아노의 삶

1921년 3월 멕시코 보다 좀 더 생활이 낫다는 쿠바로 288명이 제2의 이민을 떠나는 등 멕시코 진출 한인의 유랑은 계속되었다. 그러나 그들이 사탕수수의 나라 쿠바로 가자마자 설탕 값이 폭락하는 바람에 다시 에네껜 농장으로 돌아온 자들도 있었다.

1941년 일본의 진주만 공습으로 태평양전쟁이 본격화되자 멕시코 한인들은 일본인으로 오해받지 않기 위해 고심했고, 한편으로는 멕시코·쿠바 정부와 긴밀히 연락하며 반일운동을 펼쳤다.

그러나 조국이 해방을 맞은 이후에도 그들은 돌아오지 못했다. 조국이 그들을 잊었기 때문에 더 현지에 동화될 수밖에 없었던 한인들의 후손이 현재 5대까지 이르렀다. 메리다 일대 5,000명 등 멕시코 전역에 3만 여명의 한인들은 여전히 꼬레아노로서의 삶을 이어가고 있다.

  • 담당부서 : 벽골제아리랑사업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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