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샌프란시스코로가다

1882년 한미수호통상조약을 체결하고 한국의 사절단이 처음 미국 땅에 발을 들여 놓은 곳인 샌프란시스코는 당시 동양인들에게 상항(桑港)이라고 불렸다. 이곳은 미국 본토로 가는 거의 모든 한인이 처음 도착한 도시이며, 이곳에서 일자리를 찾아 곳곳으로 흩어졌다.

갤릭호를 타고 이주해 온 하와이 노동자들보다도 먼저 1900년 초 샌프란시스코에 한인 25명이 살았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들이 바로 한인 상인의 효시가 된 인삼장수들이었다. 이들은 대개 중국인으로 가장해 중국 여권으로 미국으로 건너가 중국인이 가장 많은 샌프란시스코에서 인삼을 팔았다.

또 미주 본토의 최초 한인 단체인 ‘친목회’, 최초 조국광복 운동단체인 ‘공립협회’, 최초의 신문인 《공립신보》, 해외 한인의 총연합회인 ‘대한인국민회’와 기관지인 《신한민보》, 안창호가 조직한 ‘흥사단’이 모두 이곳 샌프란시스코에서 조직되었다.

그리고 1903년부터 1905년 4월까지 하와이로 이주한 한인들은 7천여 명 가운데 약 900여 명이 귀국하고, 2천여 명 이상이 샌프란시스코와 캘리포니아로 이주해 새로운 삶을 개척했다. 낮은 임금과 가혹한 노동환경에서 지친 초기 이민자들은 사탕수수 농장의 노예계약이 끝나자 샌프란시스코로 향했다.

1910년까지 약 2천여 명의 노동자들이 하와이와 가까운 서부 샌프란시스코와 로스엔젤레스 등지로 이동했다. 이들은 거의 가진 것이 없어 대부분 캘리포니아의 과수농장에서 오렌지와 포도, 복숭아를 따는 농장 노동자로 취업하거나, 오리건주·워싱턴주·몬태나주·유타주에서 철도건설과 광산 노동자로 일했다. 그 밖에도 각 도시에서 가정부나 잡역부 등 단순노동에 종사했다.

미주의 독립운동가들과 대한인국민회

초기 이민사회는 많은 자치단체들을 조직했다. 1903년에 하와이‘신민회’를 시작으로 5년만에 23개의 단체가 생겨났는데, 1907년 이 단체들을 통합해 ‘협성협회’를 만들었다. 샌프란시스코에서는 1903년 안창호를 중심으로‘친목회’가 조직되었고, 1905년에 ‘공립협회’로 조직을 확대해 캘리포니아 여러 지역에 지회를 두고 한인사회의 상호협조와 독립운동을 주도했다. 1905년 남캘리포니아주에서는 장경, 방사겸, 김우제 등을 중심으로 ‘대동교육회’를 조직하여 교육진흥사업을 펼쳤고, 1907년 정치활동을 추가하여 ‘대동보국회’로 확대개편했다.
하와이섬 주변의 배 사진 한인독립운동의 첫 총성은 1908년 샌프란시스코에서 울렸다. 통감부의 외교고문이었던 스티븐스(D.W.Stevens)는 을사조약 체결에 적극 협력하였던 친일인사로, 샌프란시스코에 와 ‘한국인은 일본의 지배를 은혜롭게 여기고 있다.’는 주장을 하면서 미국 내 배일감정을 무마하려는 발언을 하자 장인환, 전명운 두 의사가 저격한 사건이 일어났다. 장인환과 전명운은 모두 하와이 사탕수수 농장으로 이민 와서 1906년 샌프란시스코로 이주하여 막노동으로 생계를 꾸려가던 청년들이었다. 각각 대동보국회와 공립협회에 가입하여 독립투쟁의 의지를 가지고 있던 이들은 친일파 스티븐스가 미국에 와 “한국인들은 일본의 한국지배를 은혜로 여기고 있다.”고 망언을 하자 저격, 사살하였다. 이 사건은 미주 한인사회가 단결하여 독립투쟁을 벌이는 중요한 토대를 마련했다.

이 사건을 계기로 각 단체를 통합하자는 노력이 모여 대한인국민회가 조직되었다. 샌프란시스코에 설치된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는 독립운동과 재외 한인들의 권익을 대표하는 최고 기관의 역할을 했다. 국민회는 한때 130개 지회, 3천 2백 명의 회원을 확보해 재미한인사회의 대변기구로서 그 몫을 다했다.

미주지역의 독립운동은 크게 세 갈래 세력으로 나뉘어 있었다. 안창호가 중심이 된 흥사단은 교육을 통한 인격도야를 지도이념으로 삼은 단체로 1913년에 결성되었다. 박용만의 ‘독립단’은 1919년 하와이에서 결성되어 무력투쟁을 통한 독립운동론을 주장하고 군사학교를 세워 군사훈련을 실시하는 등 독립군을 양성했다. 또 1920년 이승만을 중심으로 조직된 ‘동지회’는 외교를 통한 독립운동에 힘썼다.

한편 하와이의 신명부인회, 부인교육회, 대한부인구제회와 캘리포니아의 대한여자애국단은 동포구제사업과 함께 항일독립운동의 후원사업을 펼치는 여성단체들이었다. 그밖에도 영남부인회, 부인호상회, 애국부인회 등이 조국의 독립운동 지원에 나서는 활동을 펼쳐 여성들도 독립운동의 주역으로 당당히 한몫을 다했다.

곳곳에 뿌리내린 한인사회

1920년대를 지나 한인 이민자들은 캘리포니아 일대에서 노동과 농사를, 로스엔젤레스와 시카고·뉴욕에서는 채소상이나 식당업 등을 하며 정착지를 점차 넓혀 나갔다. 1920~40년대 미국 본토에 한인 이주자가 얼마나 살고 있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다만 1,500~2,000명 정도가 거주하고 있었고 이들 대부분이 캘리포니아에 살고 있었으리라고 추측하고 있다. 특히 남캘리포니아주 리들리는 포도, 오렌지, 복숭아 등 과일 생산지로 유명한 곳인데, 하와이에서 본토로 건너온 한인들이 이곳에 정착촌을 만들었다. 그 중에서 김호·김형순은 ‘김형제상회’를 세워 농산물 운송과 위탁업, 묘목사업 등으로 성공하여 한인 최초로 백만장자가 되었다고 한다.

네바다 주에서 쌀농사에 성공해 벼농사의 왕으로 불렸던 대농장주 김종림은 윌로스 한인 전투비행사 양성학교 설립(1920)에 재정지원을 했다. 당시 캘리포니아에 망명해 있던 노백린은 공군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김종림의 재정 지원으로 최초의 한인 전투비행사 양성학교를 설립해 한인 비행사를 키워냈다.

초기 유학생들과 오렌지 농장 노동자들은 로스엔젤레스 동쪽에 있는 리버사이드에 초기 정착촌을 형성하다가, 자식들의 교육문제나, 노후에 농장일을 접고 1910년대부터 로스엔젤레스로 옮겨 가기 시작했다. 안창호도 1914년 이곳으로 옮겨와 흥사단 운동의 뿌리를 내렸다. 이것이 LA한인사회의 시작이었다.

뉴욕에서는 유학생들 중심으로 독립을 위한 선전활동이 활발하게 펼쳐졌다. 1920년대 중반부터 뉴욕은 북미대한인유학생총회의 동부지구 거점이 되었으며 대한인국민회와 동지회의 지부도 있었다.

세계정치와 외교의 중심지였던 워싱턴은 미주 한인의 독립운동 중심지이기도 했다. 1차대전 후 한국의 민족운동자들은 미국과 윌슨대통령의 ‘민족자결주의’에 기대를 했고, 특히 3.1운동이 일어나면서 미주한인사회에서도 본격적인 외교 및 선전활동을 펼치게 되었다. 이승만은 워싱턴에 구미위원부를 설치, 외교 선전활동을 수행하였다. 태평양전쟁기에는 중한민중동맹단의 한길수와 재미한족연합위원회의 전경무 등이 워싱턴에 진출하여 이승만과 경합을 벌이기도 했다.

필라델피아도 독립운동의 중심지였는데, 1905년부터 서재필이 이곳에서 인쇄업과 문방구업을 경영하면서 활동기반을 닦아왔기 때문이다. 국내에서 3.1운동이 일어나자 서재필은 이승만, 정한경 등과 더불어 필라델피아에서 미동부지역의 3.1운동이라 할 수 있는 ‘제1차 한인회의’를 개최했고 이어서 ‘대한민국통신부’를 설립하여 미국의 여론과 일반국민을 대상으로 하는 선전활동을 전개하였다.

미국 중서부 로키산맥 일대 콜로라도주, 와이오밍주의 탄광에서도 한인들의 발자취를 찾을 수 있다.

이렇게 미국 곳곳에 뿌리내린 한인사회는 정착을 위한 노력과 독립운동을 위한 열정도 있었지만 어두운 한인사회의 갈등도 있었다. 이승만과 그 반대파 간의 내분과 주도권 다툼으로 한인들의 독립운동은 통합의 열매보다는 분열과 불신의 깊은 상처를 남겼고, 분쟁을 해결하기 위해 많은 재판비용을 소모했다. 이러한 모습은 한인들의 독립운동에 대해 미국사회에 부정적 인상을 심어주기에 충분했다.

한편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한인들은 미군의 신분으로 여러 전선에 나가 싸웠다. 이 전쟁이 일본을 상대로 한 항일 전쟁이자 조국의 독립을 앞당길 수 있는 기회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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