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 명 | 시 기 | 제방의 길이 | 저수지의 둘레 | 관개지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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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사기 | 흘해왕21년(330) | 1,800보(步) | ||
태종실록 | 태종15년(1415) | 7,196척(尺) | 일식(一息:30리) | |
태종18년(1418) | 2식 | 1만여경 | ||
신증동국여지승람 | 1415 조선 태종15 | 60,843척(尺) | 77,406보(步) | 9,840結 95卜 |
대동지지 | 2,600보(步) | 80리(里) | ||
증보문헌비고 | 2,600보(步) | 80리(里) | ||
김제읍지 | 1,800보(步) | 76,406보(步) | 9,840결(結) 95부(負) | |
조선환여승람 | 60,843척(尺) | 77,406보(步) | 9,840결(結) 9부(負) 5속(束) |
일찍이 전라도 수군도절제사 박초가 김제군의 벽골제는 신라 때부터 축조한 것으로 실로 동방의 거택(金堤郡碧骨堤, 自新羅已築之, 實東方巨澤。 世宗 11卷, 3年)이라 피력했던바 벽골제의 주변에는 이 거대한 저수지의 규모를 짐작케하는 흥미 있는 마을 이름이 산재해 있다. 벽골제로부터 동남간으로 약 6㎞ 떨어진 정읍시 감곡면 오주리(五舟리(里))가 있는데, 오주리는 배가 들어왔다 하여 속칭 '배들이'라 불리고 10㎞ 떨어진 감곡면 방교리 호락(湖落) 마을은' 호수가 떨어지는 곳'에서 연유한 이름이라고 한다. 그 들 건너에는 김제시 봉남면 용신리에 '용지(龍池)',' 용문동(龍門洞)이 있고 배(舟) 관련지명으로 10㎞ 떨어진 봉남면 대송리 접주(接舟) 및 내광리 내주평(內舟坪)이 있고, 봉남면 양전동 용두(龍頭) 마을에는 용이 살았다고 한다. 이밖에도 동북으로 8㎞ 떨어진 황산 기슭에 강정마을이 있는데 벽골제 물이 머물러 갔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하며 김제시 검산동에는 포교로부터 드나들던 소금배가 전복된 곳이라 하여 소금배미가 있다. 이와 같은 마을들은 벽골제 만수시 호안(湖岸) 마을들로 추정되며 이로부터 벽골제의 거대한 제내규모를 헤아려볼 수 있다
제방의 전체길이는 약 3㎞이다. 위 제방의 그림은 현 벽골제 단지 안에서 촬영된 모습으로 부분일 뿐 평지 약 3㎞ 길이의 거대구조물 벽골제를 확인하려면 별도의 시계를 확보해야 한다.
현 단지 안의 수문으로 제2수문 장생거로 추정하며 벽골제라는 거대구조물이 시계에 잡히지 않는 까닭에 손쉽게 ‘수문’을 ‘제방’으로 등치시키곤 한다. 장생거는 거대구조물 벽골제가 품은 5개의 수문 중 하나이다.
단지 밖으로 연장되는 제방을 따라 남으로 약 2.1㎞ 지점에 현존하는 또 하나의 수문이 있다. 장생거와 다른 모양의 경장거는 훨씬 보존상태가 양호하다. 역시 제방이 품은 또 하나의 수문이다.
제2 장생거와 제4 경장거 사이에 제3 수문인 중심거 자리로 추정되며 마을(용골)이 형성되어 있다.
제방의 북단으로 여겨지며 벽골제 보수시 인부들이 짚신에 묻은 흙을 털어 산이 되었다는 지명전설이 있다. 1415년 중수시 산 위에 벽골제 중수비를 세웠는데 1980년 유적정화 공사시 현 벽골제단지내로 이전하였다.
벽골제 제방의 남단 북쪽으로 추정되며 조선 태종때 벽골제 중수시 중수과정에서 공사에 뒤늦게 당도한 제주의 인부들이 아쉬움에 만들었다는 지명전설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