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광지 김제시에 왔다면 한번은 가봐야할 관광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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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산사(사적 제496호)금산사 일원은 2008년 12월 사적지로 지정되었다. 599년(백제 법왕)에 나라의 평안과 왕실의 복을 기원하기 위하여 작은 산문이 열리었고, 통일신라시대인 9세기 진표율사에 의해 중창되면서 미륵신앙을 대표하는 사찰이 되었다. 국보 62호로 유명한 금산사 내 미륵전은 동야최대의 실내입불을 모신 곳으로 뮤명하다. 400여년이 넘는 오랜 역사속의 금산사는 조계종17교구 본사로써 70여개의 말사를 관장하며 국보1점 보물 10점의 문화재 보고이기도 하다. 최근에는 고즈넉한 산사의 정취를 느낄 수 있는 템플스테이로 전국적인 명성을 얻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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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골제(사적 제111호)
벽골제는 사적 제111호로 우리나라 최대·최고의 고대저수지로 유명하다. 김제시 부량면 신용리에서 월승리에 걸쳐 약 3km에 이르는 제방이 현존하고 있으며 수여거, 장생거, 중심거, 경장거, 유통거 총 5개의 수문중 장생거, 경장거 2개의 수문이 현존하고 있다. 길이는 3.3km인데 현재는 2.6km만 남아있으며, 제방을 쌓은 데만 연인원 32만여명이 동원된 것으로 추산된다. 광범위한 고대 농경사 및 문화와 토목건축적 의의가 인정되어 1963년 1월 21일에 국가 사적으로 지정 관리되고 있다.
현재 벽골제 단지내에는 농경문화를 테마로 한 벽골제농경문화박물관, 농경사주제관 및 체험관, 전통가옥 체험마을, 아리랑문학관 등이 있으며 각종 전통문화를 즐길 수 있는 체험을 상시 운영하고 있다. 짚풀공예, 목공예, 선비문화체험, 전통한복입기체험, 전통놀이체험 등 다양한 프로그램이 운영하여 인기를 끌고 있다.
또한 벽골제는 제방을 쌓을 당시 벽골제단지는 또한 전국의 유명축제인 ‘김제지평선축제’의 주무대이기도 하다. 올해로 제21회를 맞는 ‘김제지평선축제’는 오는 9월 27일부터 10월 6일까지 10일간 개최되며 문화체육관광부지정 대한민국 글로벌육성축제로 선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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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제 동헌·내아
[김제동헌]
현종 8년(1667)에 건립되었고, 그 후 32년 뒤인 숙종 25년(1699)과 숙종 38년(1712)에 중수하였다. 동헌에 사용한 부재나 꾸민 등이 일반 민가 건축과는 달리 장중하고 장식적인 면모를 많이 갖추고 있다. 동헌은 고을의 수령들이 공적인 업무를 주재하는 관청의 본 건물로 대청이나 집을 이른다.[김제내아]
현정 8년(1667)에 동헌과 함께 지어진 것으로 보이며, 내아는 관리의 가족이 살림하는 곳을 가리킨다. 원래는 지금 남아있는 'ㄷ'자형의 안채 이외에도 부속건물들이 있었을 것으로 판단된다. 전체적으로 간결한 모습이며 동헌과 함께 남아있는 내아로서는 유일한 것으로, 조선시대 일반적인 중·상류 계층의 주택모습을 잘 보여준다. -
김제 향교
김제향교는 조선 태종 4년(1404)에 세워져 정유재란(1597)으로 불탄 것을 인조 13년(1635)에 다시 지었는데 그 뒤에도 몇 차례의 수리가 있었다.
앞면 3칸, 옆면 2칸의 규모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대 사람인(人)자 모양을 한 맞배지붕이다. 조선시대에는 국가로부터 토지와 노비, 책 등을 지급받아 운영되었으며, 현재 지역주민을 대상으로 전통문화화 학문을 가르치는 교육의 장으로 활용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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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경능제만경능제는 동국여지승람의 만경현조에도 능제라고 기록되어 있는 오래된 저수지이다. 본래는 주변 구릉지의 물을 가두는 재래지였으나, 1930년 확장공사를 실시해 운암호의 물을 받아 저장하는 양수저수지가 되었다. 잔잔한 호숫가를 돌아볼 수 있는 산책로가 조성되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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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해사김제시 진봉면 심포리에 위치하고 있으며. 서기 642년 백제의자왕 2년에 부설거사가 창건하였고 인조대왕때 진묵대사가 재건 복구하여 크게 번창시켰다. 절이 서해의 섬들을 바라볼 수 있는 위치에 있고, 서해의 일몰을 한눈에 볼 수 있는 경승지이므로 망해사라 하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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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화산봉화산 정산에 위치한 봉수대는 서해를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군사적 요충지에 세워져 있어 만경강과 동진강의 하구로 들어오는 적선을 곧바로 탐지할 수 있었다. 지금도 주춧돌과 자연석으로 쌓았던 담장의 흔적이 뚜렷하다. 하지만 최근에는 그 돌들을 흙으로 묻고 헬리포트를 만드려 했던 흔적이 남아 있다. 봉수는 횃불과 연기로 소식을 전하던 옛날의 통신방법으로 낮에는 연기를 피우고, 밤에는 횃불을 올려 신호를 하였다. 봉수대에서는 평상시에 하나, 적이 나타나면 둘, 적이 국경 가까이 오면 셋, 적이 국경을 넘어오면 넷, 우리군사와 적군이 싸우면 다섯 개의 불을 피워 위급한 소식을 전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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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랑문학마을
김제시 죽산면 내촌·외리 마을 일대에 조성된 아리랑문학마을은 조정래 작가의 소설 "아리랑"에 등장했던 주요 배경들을 직접 보고 느낄 수 있도록 그대로 재현해 놓은 곳이다.
아리랑 문학마을은 홍보관, 근대 수탈 기관, 내촌·외리 마을, 하얼빈 역으로 구성되어있다. 홍보관 1층에는 일제에 수탈 되었던 과정들과 항일운동에 관한 내용들이 일목요연하게 정리가 되었다. 홍보관 2층에 들어서면 아리랑가사를 조형물로 조성해 놓은 것이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온다. 이곳은 김제 출신 독립투사들에 대한 설명이 되어있다. 누군가의 남편이고 자식이자 친구였던 이 영웅들은 대의를 위해 죽음의 공포를 무릅쓰고 극심했던 수탈이 삶이 되어야만 했던 부당한 시대의 상황이 그들을 나서게 했을 것이다. 총을 들고 맹렬히 돌진하는 독립군 동상이 이를 상징적으로 표현하는 듯하다.
그외 근대 수탈기관과 소설에 묘사된 수탈민들의 가옥을 재현한 공간이 있으며, 1909년 안중근 의사가 이토히로부미를 저격한 곳인 하얼빈 역을 실제 건물의 60% 정도로 축소·재현해 놓았다. 안중근 의사는 이토를 저격 한 후, 에스페란토어로 ‘코레아 후라(한국 만세)!를 두어 차례 외친 뒤 러시아 헌병에 잡혔다. 그 당시 저격 상황을 그대로 재현해 놓았다. 당시의 증기기관차도 함께 재현되어 생생함을 더한다.
이처럼, 아리랑 문학마을은 남녀노소 누구나,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꼭 한 번은 가봐야 할, 민족의 숨결을 느낄 수 있는 생생한 문화공간이자 역사 교육의 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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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랑문학관2003년 5월 16일 김제시가 소설가 조정래의 대하소설 『아리랑』의 역사적 의의 및 문화사적 의미를 조명하기 위하여 설립하였다. 민 요 「아리랑」이 노동요에 망향가, 만가(輓歌)에 투쟁가로 민족의 노래가 되었던 것처럼 소설 『아리랑』의 징게맹갱이 강탈당하는 조선의 얼과 몸의 또 다른 이름이자 민족 독립을 위해 싸워 나갔던 무수한 민초들의 삶을 배태한 땅이라는 유의미를 부여받은 아리랑문학관은 이러한 소설 『아리랑』이 갖는 역사성과 예술성을 보존하고 전달하는 것을 주요사업과 업무로 삼고 있다. 아리랑문학관은 이러한 역사적 가치와 의의의 소장처로서의 업무와 전달처로서의 업무, 그리고 역사와 문화 교육의 장으로서의 업무를 동시에 수행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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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창이 다리
새창이다리(만경교)는 조선시대 주요 나루였던 '신창진'이 있던 곳으로 만경(김제)과 임피(군산)를 잇는 나루이며 동시에 전주 대장촌(익산 춘포면)으로 이어지는 뱃길이었다. '신창진'은 조운(뱃길을 따라 곡물을 운송)과 어업을 위해 범선(돛단배)과 어선이 분주하게 드나들었다고 전해진다. '신창진'은 일제시대를 겪으며 새창이나루로 불리게 되었는데 일본인 중시가 시장마을에서 군산으로 드나들기 위해 배를 띄우면서 그렇게 불렀다고 전해지지만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일제감정기 이전 부터 이곳은 '신창진'으로 불리웠던 곳으로 일제시대 이전부터 배가 드나들던 나루가 존재했다. 그러나 1933년 일제에 의해 다리가 놓이게 되면서 범선이 다니지 못하게 되어 나루로서의 기능을 상실하였는데 '새창이나루'가 있던 곳에 다리가 세워졌기 때문에 이 다리를 '새창이다리(만경교)로 불렀다.
'새창이다리'는 우리나라에서 두번째로 준설된 콘크리트다리로 최초의 콘크리트다리는 전주 남부시장쪽에 위치했던 '싸전다리(1922)'라고 한다. 이 새창이다리(만경교)는 6.25때 폭격을 당한 곳이며 노후되었기 때문에 차량통행을 제한해 1989년 개통한 만경대교가 새창이다리 역할을 대신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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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산교회
1905년 미국선교사 테이트가 처음 세웠으며, 1908년 현재의 자리로 옮겨왔다. 남녀칠세부동석이던 시절 남녀에 대한 배려로 내부를 ㄱ자형태로 만들어 남쪽에는 남자석, 동쪽에는 여자석으로 나누어 예배를 보았으며 상량문 역시 남자석은 한문으로, 여자석은 한글로 성경구절을 써 놓았다.
금산교회는 뿌리깊은 남녀유별이란 과제를 ㄱ자형의 교회 평면을 차용한 건축해법으로 해결했다는 점이 주목할 만하다. 보존상태가 양호 할 뿐만아니라 한국식과 서양식교회의 특징을 결합시켜 초기 교회건축의 한국적 토착화과정을 살필수 있는 구조를 지니고 있는 건물로 판정받았다. 1997년 7월 18일 전라북도 문화재자료 136호로 지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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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류성당
천주교 수류성당은 1895년대 호남지역 3개 성당 중 하나로 유서깊은 역사를 자랑하며 동양권에서 가장 많은 신부를 배출한 곳이다. 당초 목조건물이었던 천주교 수류성당은 6.25때 소실 되었고, 1959년 벽돌식으로 재건된 건물이 현재까지 남아있다.
1896년 박해를 피해서 순창에서 임실, 고창에 이르기까지 각지에서 이곳으로 모여든 신도수가 무려 5000명에 이르렀다. 지금은 500명 정도로 인근주민의 90%가 신도인 교우촌이다.
모악산 자락과 어우러져 마음의 고요를 불러올 만큼 평온함을 느끼게해주고 영화 "보리울의 여름" 촬영지로도 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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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신사
양귀자의 소설 ‘숨은꽃’(1992년 이상문학상 대상)의 무대이기도 한 귀신사는 소설 속에서 귀신사를 ‘영원을 돌아다니다 지친 신이 쉬러 돌아오는 자리’라고 표현하고 있다
의상대사가 문무왕 16(676)에 세운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보물 826호로 지정된 대적광전과 보물 1516호 소조비로자나삼불좌상 외에 삼층석탑, 석수 등 많은 유형문화재가 있다.
귀신사는 금산사의 위세에 눌리고 지금은 작은 절처럼 보이지만, 임진왜란때 승병의 양성지이기도 하였고 한때는 금산사가 말사이기도 한 시절이 있었다.. 절의 규모를 짐작하게 하는 것은 귀신사를 들어오기 전에 논 가운데 자리하고 있는 귀신사 부도와 귀신사에서 서쪽으로 100m 떨어진 곳에 자리하고 있는 청도리 3층석탑이 있다. 한때 8개의 암자를 거느렸다고 하니 청도리 3층석탑은 귀신사에 딸린 암자에서 건립한 것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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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산법종교본부김제 증산법종교 본부 영대와 삼청전은 김제 증산법종교 본부로 증 산도 교주 강일순(姜一淳) 부부의 무덤을 봉안하면서 형성된 성지를 유지 관리하기 위해 세운 건물이다. 1949년 증산도 교주 부부의 무 덤을 봉안하면서 삼청전을 지었으며, 1952년 2층 목조 묘각인 영대 를 건립하였다. 묘각인 영대는 2층의 목조 건물로 강일순 부부의 유해가 안치되어 있으며, 삼청전도 2층 목조 건물로 내부는 통층이 며 증산미륵불이 모셔져 있다. 이외에도 교당 안에는 태평전, 숭도 묘, 전하전, 경춘대, 대령전 등 웅장한 건물이 즐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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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만금방조제동진강과 만경강 하구 일대에서 진행되고 있는 새만금 간척 사업은 전라북도 군산, 김제, 부안에 총길이 33㎞의 방조제를 축조해 총 면 적 401㎢의 토지를 조성하는 대규모 사업으로 새만금 방조제는 지 금까지 세계에서 가장 긴 방조제로 알려졌던 네덜란드의 자위더르 방조제[32.5㎞]보다 500m 더 길어 세계에서 가장 긴 방조제가 되었 다. ‘새만금’이란 명칭은 김제·만경 방조제를 더 크게, 더 새롭 게 확장한다는 뜻에서 예부터 김제평야와 만경평야를 아울러 일컫 던 금만평야에서 ‘금만’을 ‘만금’으로 바꾸고 새롭다는 뜻의 ‘새’를 덧붙여 만든 조어이다. 오래 전부터 옥토로 유명한 만경평 야와 김제평야와 같은 옥토를 새로이 일구어 내겠다는 뜻을 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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