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제시 교월동

고대인물

朱子四書集註를 펴낸 趙簡

공의 본관은 김제로 고려 고종 때의 명장 趙連壁의 셋째 아들로 옥호(屋號)는 悅軒이라 하고 시호는 文良입니다. 공은 김제시 옥산동에서 1264년(고종 5년)에 태어나서 1325년(충숙 12년) 겨울에 별세하였습니다. 공은 태어나면서 신체에 특이한 점이 있었는데 첫째 모골이 특이하고, 둘째 등에 용인형7점(龍鱗形七點)이 흡사 북두칠성과 같이 박혀 있었습니다. 공의 나이 5∼6세 때의 일입니다. 집 옆에는 큰 괴목이 있었는데 공은 이따금 이 나무에 올라가 놀았다 합니다. 공이 어느 날인가 나무 위에서 낮잠을 자고 있었는데, 이 때 마침 동헌에서 잠깐 낮잠을 자던 고을 원님 꿈속에 앞에서 말한 괴목 위에 난데없는 용이 나타나 이 어린아이를 감고 보살피며 꿈틀거리는 것을 보고 깨었습니다. 원님은 기이하게 여기고 나졸을 시켜 알아본 즉 다름 아닌 조간(趙簡)이라는 어린이가 놀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이를 기이하게 여긴 원님은 곧 취학(就學)케 했더니 생각대로 천재적 기질이 있어 인근에서 신동이라 일컬었습니다. 공은 1279년(충렬왕 5년) 문과에서 장원급제한 소년으로 명성을 떨쳤고, 이듬해 문신들을 모아 친시(親試)를 했을 때도 특선으로 뽑혀 왕으로부터 황패(黃牌)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출생지를 용두동이라 불렀고 거가(居家)를 열헌이라 호를 지어 주었으며 직위는 보궐을 제수하여 후학을 기르는데 전력하도록 하였습니다. 공은 평소에도 의관을 정제하고 여가 있을 때마다 글읽기를 좋아했으며, 어버이 상을 당하여 3년 시묘를 하였는데 예절과 법도에 어긋남이 없게하니 이 지극한 효성에 감동한 충렬왕이 정려를 세우라 명하였습니다. 관직으로는 충렬왕 때 경상도 안렴사, 밀직제학, 찰성사, 문하시중, 우의정을 역임한 후 벼슬길에서 물러나 고향에 돌아왔습니다. 그 후 공은 유생들과 경전을 강론하고 충효를 권면하니 사대부들이 말하기를 주자와 정주학의 으뜸이라 하였습니다. 당시 조정 백관과 거유(居儒)들이 문묘에 배향할 것을 주장하였으며, 조선 성종조 20년에는 유림들이 계(啓)를 올려 옛터 유허지에 비를 세우고 제각을 지어 모셨습니다. 지금도 성산 동편 용암서원에 배향되어 이 고장 유림의 추앙을 받고 있습니다.

金堤 趙氏 始祖 趙連壁

벽골제는 많은 이야기가 전해 내려오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 하나가 김제 조씨의 시조 조연벽 장군과 벽골용(碧骨龍)에 얽힌 이야기입니다. 조연벽은 어릴 때부터 기골이 장대하고 겁이 없거니와 무술을 좋아하여 날만 새면 말타기, 검술, 활쏘기에 몰두하였습니다. 그러니 김제 고을에서는 그를 당할 사람이 없었습니다. 조연벽은 백발백중하는 활솜씨로 바람에 나부끼는 낙엽을 쏘아 꿰뚫는가 하면 줄지어 날아가는 기러기를 한 살로 떨어뜨릴 정도였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무술수업으로 몸이 지쳐 깊은 잠에 빠져 들어 있었습니다. " 연벽은 일어나거라" 조연벽은 깜짝 놀라 눈을 떴습니다. 눈 앞에 하얀 옷을 입고 하얀 수염이 발등까지 닿는 노인이 서 계셨습니다. " 할아버지는 뉘신지요?" " 놀랄 것 없다. 나는 벽골제를 지키는 벽골용이니라" "그런데 어인 일로?" "네 도움이 필요해서 왔느니라. 내일 정오 부안 변산에 사는 청용(靑龍)이 내가 사는 벽골제를 빼앗으러 올 것 같구나. 그러니 나를 도와 청용을 물리쳐 다오. " " 어찌하면 도울 수 있겠는지요? " " 어렵지 않은 일이다. 내가 청용과 싸움을 벌이거든 청용을 활로 쏘아 맞히기만 하면 된다. " 꿈에서 깨어난 연벽은 날이 밝자 노인이 이른대로 벽골제에 있다가 먹구름 속에서 한나절을 싸우다 기진한 백용이 도망치니 이 때 청용이 뒤쫓아가는 순간을 포착하여 힘껏 활시위를 당겼습니다. 화살은 청용의 배 부분을 향해 날아가 명중하였습니다. 그러자 사납던 청용이 비틀거리며 어디론가 사라졌습니다. 그날 밤 꿈 속에 다시 나타난 벽골용이 말했습니다. " 고맙다. 네 도움으로 나는 영원히 벽골제에서 살게 되었느니라. 나를 살려준 보답으로 너의 자손 대대로 부귀와 영화를 누리도록 할 것이다." 이는 믿기 어려운 전설이지만 김제 조씨 시조의 발원설화이기도 합니다. 조연벽은 무과에 급제하여 변방을 지키는 장군이 되었는데 1232년(고려 고종 19년)에 몽고군이 침략해 왔습니다. 조정에서는 조연벽을 대장군으로 임명하여 방어하게 하였습니다. 대장군이 된 조연벽은 뛰어난 지략과 무술로 처인성에서 적장(살리타)을 사살하고 몽고군을 섬멸하였습니다. 이에 조정에서는 녹익조공 봉벽성군을 가자하였습니다. 장군에게는 技, 瑞, 簡 세 아들이 있었는데 모두 뛰어난 인물이었습니다. 특히 셋째 간(簡)은 태어날 때부터 등에 북두칠성 모양의 용비늘 일곱점이 박혀 있고 양쪽 어깨는 비늘 모양의 갑옷이 달려 있어 보는 이들이 벽골용의 정기를 타고 났다고 입을 모았습니다.

뛰어난 文臣 李繼孟

공의 본관은 전의(全義)이며 아버지 사정(司正) 李흥과 어머니 인천 蔡씨 사이에서 1458년(세조 4년) 태어나 자는 希醇, 호는 墨谷, 墨岩이라 하였으며, 수(壽) 66세로 타계한 후 시호를 文平이라 하였습니다. 차씨 부인이 공을 임신했을 때 꿈에 학을 보았는데, 공이 태어남에 과연 기품이 있어 범상한 아이들과 달랐습니다. 아버지가 일찍이 별세하시자 어머니가 공의 학업을 맡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품행이 단정하고 재기가 뛰어나 문예와 식견이 출중한 김일손, 남효은 등과 교우(交友)하였습니다. 그 무렵 점필제 김종직 선생이 호남을 안찰하다가 공과 대좌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는데, 점필제가 공을 국사(國士)로 대우하였으며, 한원당 김굉필도 경국제세의 재간을 가진 인물로 평하였습니다. 공은 1483년(성종 14년) 사마시(司馬試) 양과에 급제하였고, 1489년에 또 문과 甲과에 급제하여 성균관 설서로부터 교검, 정언 전적이 되었으며, 고산, 청양 현감을 거쳐 이조의 낭관 사도 봉상, 첨정, 장령 전한입의 동부승지 등 여러 관직을 두루 역임하였습니다. 1498년(연산군 4년)에 점필제의 문인으로 사화(士禍)에 연좌되어 영광으로 귀양 갔다가 1506년(중종 1년) 반정 후 풀려나 대사헌에 제수되었으나, 朴耕의 옥사에 관련되어 다시 진도로 유배되었습니다. 수개월 후에 풀려나와 예조와 병조참판을 거쳤고 그 사이에 호남, 경기 관서의 3도 관창사를 지냈으며 호조참판과 예조판서에 올랐습니다. 1517년에는 주청사로 명나라에 들어가 대명회통에 오기(誤記)된 태조 선대의 행적을 발견하여 귀국 후 보고하였습니다. 그 후 中宮 책립의 주청사로 연경에 다녀와서 일품계로 승진되고 田土 등을 하사받았으며, 1519년에는 병조판서로 제수되었다가 해직된 후 김제 향리에 돌아와 있었는데, 다시 찬성으로 소명되어 벼슬에 나아갔습니다. 공은 사관(史館)의 기주관으로부터 경연, 춘추관, 성균관제학, 세자이사(世子二師) 등으로 비록 원직이 갈려도 겸관은 항상 따랐으니 대사헌, 예조, 호조 참찬 홍와(弘化) 등의 임직을 여러 차례 지냈습니다. 관직에서 물러나고자 여러 차례 소를 올렸으나 허락되지 않더니 1523년 병석에 눕게 되자 어의를 보내왔고 왕세자 또한 조신을 보내 문병하게 까지 되었습니다. 그러나 회생치 못하고 66세 되던 9월 6일에 운명하여 김제시 제월동 선영에 운구 안장하였습니다. 여러 차례 변고를 당하고도 선비의 도를 굳게 지켜 신하의 도리를 다하니 그 명성이 오래도록 빛나고 있으며 전주의 서산사, 여산의 향사, 김제의 용암서원에 배향하고 있습니다.

淸白한 將軍 趙必達

공은 김제 趙씨 문양공 趙簡의 11세 손으로 1600년(선조 33년) 7월 7일 김제에서 태어나 1664년에 별세하니 임금이 예장을 명하여 복죽동에 안장하였습니다. 본시 성품이 강직하면서도 보기 드문 청백리로 알려졌던 공은 일찍이 무과에 급제하여 선전관을 필두로 벼슬길에 나가 순안현령, 보성군수, 양주목사 등 외직을 거쳐 포도대장과 3도통제사에 이르기까지 72군데의 관직을 거쳤습니다. 공은 어느 자리에 있거나 나라 일을 공정히 처리하고 사사로운 이득을 취하지 않아 부임하는 곳마다 청렴결백한 관리로 소문이 자자하였습니다. 공의 행장을 듣고 임금이 시험해보기 위해 제주목사로 제수한 후 얼마 뒤에 파면시키고 암행어사를 보내어 그가 돌아오는 배를 조사하게 하였습니다. 이윽고 배 안에는 짚신 3켤레와 쌀 3되, 군복 1벌, 장검 1, 추(錐) 1 뿐이라는 어사의 보고를 받자 임금은 크게 기뻐하여 만고청백우성장조필달(萬古淸白于城將趙必達)이라는 친필휘호를 내렸습니다. 또한 공은 宋詩烈, 柳楫 등과 더불어 북벌을 계획하고 전쟁준비를 서둘렀으나 효종 임금이 승하하여 계획이 중단되기도 했습니다. 후에 무신 李 이 관직에서 물러남에 숙종 임금이 “경의 후임으로 누가 적합한가”하고 물었는데 이완이 대답하기를 “조필달이 참다운 세상의 그릇”이라고 하였습니다. 1664년(현종 5년) 공이 재직 중에 별세하니 임금이 예조를 명하여 부조를 후히 하도록 하였으며, 예조정랑(朴淸)을 보내어 제사를 치르도록 하였고, 고향으로 운구할 때에 예의를 갖추도록 명하였습니다. 공이 사용하던 유물들이 동진민속박물관과 벽골제 수리민속박물관에 소장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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