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제시 교월동

후장마을 효자각 1

후장마을 효자각 1
  • 효자증통훈대부사헌부지평정지형지려, 열녀성균진사정환석지처선인김제조씨지려, 열녀통덕랑정방섭지처공인광주이씨지려
    • 위 치 : 장화동 후장마을
    • 규격/구조 : 2.8m×2.5m (목조기와)
    • 관 리 자 : 정 철 주

이정려는 장화동 후장마을에 있는데 정지형 공의 본관은 동래이며 호는 벽계(碧溪)인데 조선 순조 때의 아람입니다. 어려서부터 성품이 효성스럽고 남달리 총명하였는데 아버지가 병으로 몸져 눕자 여러 방면으로 약을 구하고 밤에는 마당에 서서 아버지의 쾌유를 빌었습니다. 그러나 회생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시자 예를 다하여 장례를 치른 후 3년동안이나 곡(哭)하는 소리를 끊지 아니하니 많은 사람들이 그이 효성에 감동하였습니다. 이에 고을 유림들이 추천하고 관찰사 서상정(徐相鼎)이 조정에 상주하여 순조 戊辰년(1868년) 4월에 정려를 세웠습니다.

의인 김제 趙씨는 정지형의 손부로서 타고난 성품이 지극히 정숙하여 규범을 잘 지켰습니다. 그이 남편 진사 정환석이 병으로 오랫동안 누워 모든 약이 소용없게되자 손가락을 셋이나 잘라 그 피로 목숨을 이어가게 하고, 허벅다리의 살을 베어 약을 달이니 그 정성이 하늘에 닿아 7년동안 더 살았습니다. 이러한 정성을 관찰사 윤영신이 조정에 아뢰어 정려를 세우게 하였습니다.

광주 李씨는 정지형의 증손부요 통덕랑 정방섭의 아내로 시어머니가 병으로 몸져 눕자 손가락을 찢어 피를 올리는 지극한 효성을 보였습니다. 또한 남편이 오랫동안 병고에 시달리자 축대를 쌓아 단을 만들고 이 곳에서 8년동안 하루도 거르지 않고 빌었습니다. 그동안 열 번이나 손가락을 찢고 세 번 허벅다리 살을 베어 남편을 병에서 구하고자 정성을 다하였습니다. 그러나 보람도 없이 남편이 세상을 떠나자 자기도 조용히 목숨을 끊어 그 뒤를 따르고 말았습니다.

이러한 사실이 널리 알려져 관찰사 이헌식이 임금께 아뢰어 특별히 정문을 세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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