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제시 교월동

구산마을 효자비

구산마을 효자비
  • 위 치 : 옥산동 구산마을
  • 규격/구조 : 6m×3m×4m(비각 목조기와)
  • 관 리 자 : 나 종 권

위 세분의 정려는 김제시 옥산동 구산마을에 있습니다.

「나응삼」공의 본관은 나주이며 자는 중장(仲章)입니다. 공은 어려서부터 효행이 남다르고 재예와 학문이 뛰어나 어진 선비들의 기대 속에 자랐습니다. 그러던 공이 20세에 이르러 출세와 부귀영화에 마음을 두지 않고 오직 아들된 도리와 형제의 우애를 소중히 행하고자 온 힘을 다하였습니다.
공은 아버지가 병으로 몸져 눕자, 자면서도 옷을 벗지 아니하고 맛있는 음식을 멀리하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아버지의 병환이 위급해지자 손가락을 잘라 흐르는 피를 입에 흘려 넣어 깨어나게 하고 변을 맛보아 병세를 살피며 하늘에 병이 낫게 해 주기를 간절히 빌었습니다. 그러나, 보람도 없이 아버지가 세상을 뜨시니 공의 슬픔은 이루 다 말할 수 없었습니다. 예를 다하여 장례를 치르고 무덤 곁에 움막을 세워 3년동안 시묘살이를 하는데 아침 저녁 제물을 손수차리며 추울 때나 더울 때나 상복을 벗지 않고 모든 예절 지키기를 성현(聖賢)과 같이 하였습니다.
이와 같은 공의 효행이 임금에게 알려져 조선 명종조에 이르러 공의 행실이 삼강행실록(三綱行實錄)에 오르게 되었습니다.

나이가 들자 공은 구산 기슭에 아담한 집을 짓고 살면서 일체 동구밖 출입을 삼가고 온종일 단정히 앉아 경전을 읽고 토론하며 학문을 닦으니 말 한마디, 행실 하나 모두가 정성을 근본으로 충과 효의 도리였습니다. 이와 같이 모든 행적이 세상에 알려져 나라에서는 그 효행을 기리고자 정려를 세우고 벼슬을 내렸으나 나아가지 않고 끝내 사양하였습니다. 그러자 임금께서 더욱 어여삐 여겨 공의 이름과 초상화를 병풍에 담아 가까이 두시며 공에게 구산처사(龜山處士)라는 호를 내리고 그의 행실을 후세에 널리 알리도록 하였습니다.

「나표」공은 구산처사 나응삼의 아들로 자는 사진(士眞)이며 호는 절효(節孝)입니다.

공은 부모를 봉양하는데 스스로 음식을 갖추어 입에 맞게 하고 부모가 좋아하는 것을 알면 그것이 고을에서 나지 않는 것이라도 꼭 구해다 바치고야 말았습니다. 그리고, 항시 좌우를 살피며 얼굴을 부드럽게 하여 부모의 말씀을 받들어 모시기를 남이 알지 못하는 가운데 지극한 정성으로 하였습니다.
어머니가 종기가 나서 약이 효험이 없자 공은 종기의 고름을 입으로 빨아내어 낫게 하였고, 아버지가 병으로 눕자 변을 맛보아 병세를 살피며 밤낮으로 간호하고 하늘에 대신 죽기를 빌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정성에도 불구하고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슬픔에 못 견디어 몸이 상할 지경이었지만 예절을 갖추어 장례를 치렀습니다.
그리고 3년동안 무덤 곁에 움막을 짓고 돌보는데, 어느 날 깊은 밤 묘지 근처에 불이 나서 그 불길이 움막까지 이르게 되었습니다. 공은 울면서 하늘에 기도를 드렸습니다. 이 때 갑자가 반대쪽에서 바람이 불어와 불길을 잡게 하였습니다.

선조 21년 나라에서 같은 집안의 나사침(羅士枕)이라는 사람과 함께 공에서 벼슬을 내렸는데, 사침은 벼슬길에 나갔으나 공은 끝내 사양하였다. 주위에서 권유하기를 벼슬길에 나가 크게 이름을 떨치는 것 또한 효도이니 사양하는 것도 도리가 아니라고 하였으나 공은 끝내 나아가지 않았습니다. 그 후에도 여러 차례 조정의 부름을 받았으나 끝내 사양하고 인조 4년 88세의 수를 누리고 세상을 떠났습니다. 고을사람들이 공의 호를 절효라 짓고 그의 덕행을 조정에 상주하였으나 표창이 늦어지더니 효종 5년에야 정려를 내렸습니다.

「나한명」공의 본관은 나주요 자는 군탁(君倬)입니다.

공은 성품이 온화하고 재주와 행실을 고루 갖추었으며 학문이 깊었습니다. 어려서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모든 예를 다하여 장례를 치르고 후에 계모의 상을 맞아서도 똑같이 지극한 정성을 보였습니다. 아버지가 몸져눕게 되자 변을 맛보고 고름을 입으로 빨아내며 손가락을 잘라 입에 피를 흘려 넣어 깨어나기를 바라다가 끝내 돌아가시니 슬픔으로 몸이 상할 지경이었습니다. 장례를 치르는 날, 큰비가 내렸으나 오직 장사지낼 땅에 비가 내리지 않아 사람들은 공의 효성을 하늘이 알기 때문이라고 크게 감동하였습니다. 장례 후 3년동안 시묘살이를 하는데, 먹지 못하여 몸이 쇠약해지고 지탱하기 어려운데까지 이르렀으나 공은 멈추지 않았습니다.
공은 학문에 힘쓰며 착한 일을 인생의 즐거움으로 삼고 효도하지 않는 사람은 집안에 불러들이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효성을 관찰사가 조성에 아뢰어 정려를 세우게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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