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제시 청하면

연혁

  • 1914 이전 : 본래 만경군 지역으로 북일도면이라 하여 장산등 18개 동리를 관할 하였다
  • 1914 ∼ :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만경군 북면의 송상, 송중, 송하의 일부와 김제군 마천면의 관상외 13개동리, 동이도면의 신기리 일부를 합하여 청하산의 이름을 따 청하면이라는 이름으로 김제군에 편입

행정구역 개관

동쪽은 공덕면, 남쪽은 백산면과 만경읍, 서쪽은 만경읍, 북쪽은 만경강 건너 군산시 대야면과 익산시 오산면에 닿아 있는 청하면에서는 동지산(東之山),장산(莊山),대청(大靑),관상(官上),월현(月弦) 등 총5개 리가있다.

  • 가구수 : 998세대
  • 인구수 : 1,965명
  • 행정구역 : 5리 28개 마을
  • 주 소 : 김제시 청하면 청하로 518(54309)

동지산(東之山)리

내신마을(內新)

1920년경 유씨가 처음 터를 잡았고 타지역사람들이 지게로 짐을 지고 가다 쉬어가는 갈대밭 중간에 유씨가 주막을 만들어 운영한 것이 마을의 형성 동기이다. 일제시대 만경강 제방을 쌓아 제방안 이라 불렀고 후에 내신이라고 했다는 설과, 갈대밭 안에 생긴 마을이라 내신이라 했다는 유래가 있다.

척산마을(尺山)

마을 뒤에 있는 산의 지형이 마치 자처럼 길게 생겼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라는 설과 왜구의 약탈을 막기 위해 이곳에 성을 쌓았는데 그 모양이 자처럼 길게 생겨 척산이라는 설이 있다

궁동마을(弓洞)

옛날 척산 마을에 감찰벼슬을 지내던 장씨가 운영하는 정미소가 있었는데 찧은 쌀을 일본으로 운반하면서 많은 인부가 모여 들면서 마을이 형성되었다. 광복 후에 척산에서 분리되어 생긴 마을이다. 마을 뒤에 있는 언덕이 활처럼 굽었다하여 활궁(弓)자를 써서 궁동이라 했다

동지산마을(東之山)

1400년경 이씨가 처음 살았고 내륙지역 동쪽에 있어 앞산의 이름대로 동지산이라 불렀다. 만경대교가 가설되기 전 이곳에 김제, 군산, 옥구를 오가는 동지산 나루터가 있어 주막과 시장이 형성되어 장날이면 인산인해를 이루었던 상업지역으로 중심지가 되었던 곳이다.

동촌마을(東村)

동지산 서쪽, 갈산 동쪽에 있는 마을로 일제초기에 마을이 형성되었고 원래는 연봉마을에 속해 있었는데 1920년 일본인 중시가 신창에 농장을 만들면서 각처에서 사람이 몰려들어 마을이 커지자 마을을 나누면서 갈산 동쪽에 있다하여 동촌이라 불렀다

연봉마을(蓮峰)

마을의 역사는 100여년으로 김해김, 김석봉씨의 선조가 낙향하여 이곳에 터를 잡으면서 마을이 형성되었고 또한 김씨가 많은 자선사업으로 후학들에게 본보기가 되고 있다. 마을의 형세가 연꽃봉오리 같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시장마을(市場)

얼마 전에 타계하신 이한익씨가 8.15 광복 후에 소금장사를 하기위해 처음 터를 잡으면서 마을이 형성되었고 일제초에 신창교회 자리에 일본인이 살고 있었는데 그 후 이씨가 터를 잡자 점차 장사하는 사람이 모여서 시장이 생겨나 마을이름이 유래되었다. 옛날엔 5일장이 있었고 김제-군산간 국도가 지나가고 있다.

신창마을(新滄)

1905년경 일본인 중시가 시장마을에 살면서 군산과 왕래를 위해 나룻배를 이용하면서 사람들이 모여 들어 마을이 형성되었다. 새로 생긴 나루터라는 뜻으로 새창이라고도 부르며 후에 신창으로 바뀌었다. 가을이면 전국 최대의 망둥어 낚시터가 이루어져 새로운 명소로 부각되고 있다

갈산마을(葛山)

조선초 세조 때 왕권다툼에 휘말려 고군산열도에 유배되었던 왕족의 후손이 이곳에 와 터를 잡고 살면서 마을이 형성되었다. 당시 이곳은 갈산포구로서 서해바다와 접하고 있어 고군산열도와 왕래가 빈번하였다. 칡덩쿨처럼 뻗어나온 마을 뒷산에 수백년 묵은 칡나무가 있어 칡매로 부르던 것을 칡갈(葛), 뫼산(山)자를 써 갈산이라고 한다.

장산(莊山)리

청하산마을(靑蝦山)

조선 말 묘금도 유씨가 터를 잡고 갯벌을 일구며 살던 중 자손이 번창하여 유씨 집성촌을 이루다가 후에 여러 성씨가 합쳐져 마을이 형성되었다. 마을형성 시 갈대가 빽빽하다하여 갈메라고 불렀는데 청하산 아래에 있다하여 청하산이라 불렀다 한다.

구장산마을(舊莊山)

조선 단종 때 평택사람 최인성이라는 분이 처음 터를 잡았고 이 마을이 청하면의 구심점이 된다하여 구장산이라 했다는 설과 마을 모습이 개가 짖는 형국이라 구장산이라 부르다가 해방 후 옛장산이라는 뜻으로 구장산으로 고쳤다는 설도 있다

제상마을(堤上)

조선시대 중엽 조양 임씨가 처음 터를 잡았다고 하는데 조선 경종 때 전주최씨 21대손 현관이 공주에서 내려와 이곳에 머물면서 전주최씨 집성촌을 이루었다한다. 마을 앞에 있는 큰 연못 위에 마을이 형성되었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며 입구를 하란지라 부르는 것도 이곳이 연못의 구석지이기 때문에 새우가 알을 낳는 곳이라는 뜻으로 붙여진 이름이다

신월마을(新月)

지금부터 200년전 1790년 무렵 형성되었다는 마을로 처음에는 밀양 박씨가 터를 잡았고 그 뒤에 청주한씨를 비롯하여 여러 성씨가 들어와 마을을 이루었다. 신월이라 한 것은 거산평(巨山平)에 물이 가득 차면 달처럼 보인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거산마을(巨山)

300년전 밀양 박씨 규정공파 및 몇 가족이 터를 잡고 살면서 마을이 형성되었다고 하는데 지금도 후손들이 10대째 살고 있다. 마을 형국이 거미를 닮아 거무, 또는 겹살리로 부르던 것을 후에 큰 사람이 많이 나왔다하여 거산으로 부르게 되었다

신금마을(新金)

300년전 청송 심씨 심집이 병자호란으로 나라가 어지러워 벼슬을 버리고 이 곳에 터를 잡아 마을이 형성되었다. 금채절각(金採切角) 이라는 명당이 있다는 형세에 따라 북아시, 골멀, 위뜸, 아래뜸으로 불렀는데 모두들 신금이라 부른다.

대청(大靑)리

대청마을(大靑)

조선 선조 때 이씨가 처음 터를 잡았고 교통이 발달하지 못했던 옛날 벼슬아치들이 먼 길을 갈 때 이곳에서 말을 갈아 탔다하여 백마동, 박막동이라고 불렀고 관리들이 말을 갈아 타던 역이 대청역 역마촌이라고도 불렀다. 마을의 구조가 7뜸으로 되어 있고 백련으로 유명한 청운사가 있다

대신마을(大新)

마을의 역사는 200여년 이상이며 처음 신태인에 살던 최씨가 이사 와서 부자로 살다가 떠나고 후에 여러 성씨가 차례로 들어와 마을이 형성되었다. 비산비야의 모양이면서 지금까지 큰 재화 없이 평탄하게 살아오고 있다. 청하초등학교와 대신교회가 있다.

관상(官上)리

관상마을(官上)

조선 중엽 전씨, 송씨, 오씨, 조씨 등의 성씨를 가진 사람이 모여 마을이 형성되었고 참판, 좌량, 정령, 현감의 벼슬한 사람이 많이 살게 되자 관촌리라 부르다가 관동 위에 있다하여 관상으로 불렀다. 동네에는 몇 백년 묵은 팽나무가 있어 마을의 형성이 오래됨을 고증하고 있다

관신마을(官新)

조선시대 말엽 관상에 살던 송씨가 분가하여 이곳에 터를 잡고 살기 시작하면서 그 뒤에 오씨, 김씨, 이씨, 진씨 등이 들어와 살면서 마을을 이루었다 한다. 벼슬한 사람들이 새로 들어와 마을이 형성되었다하여 관신이라고도 하며 매년 백중날에 3개 마을 주민이 청하중하교에서 노인을 모시고 경로잔치를 베풀어 많은 귀감이 되고 있다.

관동마을(官洞)

이 마을 당골에서 옛기와가 나오는 것을 보면 삼국시대에도 마을이 있었던 걸로 추측되고 있고 마을에 처음 들어온 사람은 전씨와 송씨이고 그 뒤에 오씨, 조씨, 강씨 등 여러 성씨들이 들어와 살면서 마을이 형성된 걸고 보고 있다. 조선 말엽 벼슬한 사람들이 많이 살아서 마을이름을 관동이라 했다

석동마을(石洞)

조선시대 초기 피난 온 전주 이씨에 의해 마을이 형성되었고 당시 돌이 많이 있다고 하여 석골이라 불렀는데 광복 후에 석동으로 고쳐불렀다. 이 마을 주민들은 웃어른에 대한 효성심이 지극해 귀감이 되고 있다

월송마을(月松)

조선시대 말엽 난리를 피해 내려온 해주 오씨의 산 선비가 터를 잡고 살면서 마을이 형성되었고 사방에 소나무가 우거져 우거진 소나무사이로 보이는 마을이 달처럼 보인다하여 월송이라 했다.

농원마을(農園)

당제 서남쪽에 생긴 마을로 맨 처음 터를 잡고 살아온 사람은 이씨이고 마을 형성은 해방직후 하나, 둘 사람이 모이면서 그 당시 신촌이라 했는데 6.25이후 마을이 융성하자 농원으로 고쳤다. 인심 좋고 주민의 협조가 잘 돼 모범적인 마을로 소문나 있다.

월현(月弦)리

장천마을(長川)

고려시대 안씨 일가가 터를 잡고 살면서 마을이 형성되었다. 지금의 만경강이 큰 내에 불과했던 옛날 그 뚝이 공덕까지 이어진 긴 내였기 때문에 긴 내 옆에 있는 마을이라는 뜻으로 마을이름을 장천이라 했다.

석한마을(石寒)

고려시대 정석홍씨가 처음 터를 이뤘고 동래 정씨의 집성촌이면서 마을 이름을 돌챙이라고도 부른다. 바닥을 파보면 전 지역이 돌바닥으로 구성되어 마을 지명이 유래되었다. 마을에는 사적으로 지정된 동래 정씨의 효자각이 있다.

월현마을(月弦)

고려시대 초기 최씨 일가가 터를 잡고 살면서 마을이 형성되었는데 마을의 지형이 초승달처럼 생겼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마을에는 최씨가문의 효자문이 있다.

성남마을(城南)

조선 말엽 정치경이라는 사람이 이곳에서 금빛나는 곳을 발견하여 외지의 형제를 불러 들여 금을 캐면서 마을을 이루었다 한다. 주위의 성을 쌓고 문지기를 두어 성을 지키게 했는데 문지기들의 마을을 성너머, 정씨마을을 성안이라 부르다가 그 자리에 금성제라는 방죽을 만들고 농사를 지었다. 성을 허물어지고 마을이 성남쪽에 있다하여 성남이라 불렀다한다.

목교마을(木橋)

조선시대 중엽 부안에 살던 임씨가 이 곳에 처음으로 터를 잡고 살면서 마을이 형성되었고 마을 형성 시 마을 이름은 동쪽에 있는 태산의 이름을 본 떠 태뫼, 태메라고도 하였다. 그 후 마을 입구에 흐르던 조그만 시냇물에 나무다리가 놓여있어 마을 이름을 목교라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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