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제시 백산면

이석정생가

이석정생가

  • 종 목 : 지방 기념물 제21호
  • 명 칭 : 이석정 생가(李石亭 生家)
  • 지정일 : 1974년 9월 24일
  • 소재지 : 김제시 백산면 상정리 206외 5필지
  • 시 대 : 조선시대
  • 소유자 : 李氏 宗中 (私育)
  • 관리자 : 이재진

이곳은 조선(朝鮮) 말기(末期) 실학(實學)의 대가(大家)이신 석정(石亭) 이정직(李定稷)선생(1840∼1910)의 생가(生家)입니다. 석정 이정직(字: 형오(馨五))선생은 어려서부터 신동(神童)이라 알려졌으며, 간제(艮濟)선생과 더불어 조선조 말기의 뛰어난 유학자로 그는 27세에 중국에 가는 사신을 수행하여 북경에 머무르는 동안 중국의 시문학에 대한 고증(考證)과 논평, 성리학에 있어서의 정주학(程朱學)과 양명학(陽明學)에 대한 변해와 논평 그리고 칸트등 서양철학에 대한 연구와 동서철학의 절충론 등 여러 방면에서 많은 연구성과를 거두었으며, 그는 이것을 종합하여 뒤에 연석산방미정고(燕石山房未定藁) 25책을 남겼습니다. 그는 뒤에 향리에 돌아와 후진을 양성하면서 어음학(語音學), 천력학(天歷學), 술수학(術數學) 등 다방면에서 걸친 저술을 남겼습니다. 선생의 생가는 150여년 전에 건립되었으며, 조촐하게 지어진 평범한 농가의 모습을 지니고 있습니다. 초가지붕의 안채는 20㎝의 축대 위에 세워졌습니다. 평면은 동측에 배치된 부엌에 이어 큰방과 윗방 달렸으며, 부엌 남측에 머릿방을 두어 호남지방에서는 매우 드문 고패집이 되었습니다. 큰방과 윗방 원래 막혀 있었으나 근래에 터서 한 공간이 되었습니다. 두 방의 전면에는 마루를 놓았으나, 마루로는 각각 띠살문 드나듭니다. 큰방에서는 부엌쪽에도 작은 문을 달아 직접 출입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부엌의 한 귀퉁이에는 벽을 쌓고 문을 달아 식당방을 따로 꾸몄으며 이곳을 도장처럼 사용하였습니다. 머릿방의 전면은 봉당 그대로이며, 전면에는 두짝 열 개의 띄살문을, 동측에는 역시 띠살문 외여닫이를 닫았으며, 후면에도 역시 같은 종류의 문을 달아 결국 3면에 문을 내어 놓았습니다. 석정 선생은 이방에서 운명하였다고 전해집니다. 안채 정면에는 전면 3칸, 측면 1칸의 사랑채가 있었으며, 평면은 1칸의 부엌과 2칸의 방으로 구성되었습니다.

안위장군 묘

안위장군 묘

  • 종 목 : 지방 기념물 제102호
  • 명 칭 : 안위장군묘(安衛將軍墓)
  • 지정일 : 1999.11.19
  • 소재지 : 전북 김제시 백산면 조종리 산4-5
  • 시 대 : 조선시대
  • 소유자 : 강복식
  • 관리자 : 안종래

조선 중기의 무신인 안위(1563∼?) 장군의 묘입니다. 안위는 자는 대훈(大勳)이며 본관은 순흥(順興)으로 김제출신입니다. 문의공(文懿公) 문개(文凱)의 후손이며 참판(參判)에 증직된 경신(敬信)의 아들입니다. 선조 25년(1592) 영유무과(永柔武科)에 급제하여 대동찰방(大同察訪)에 임명되었고, 선조 30년(1597) 백사(白沙) 이항복(李恒福)의 천거로 거제현령(巨濟縣令)이 되어 정유재란(丁酉再亂)이 일어나자 통제사 이순신의 지휘 아래 왜선 20여 척을 격파하여 선조로부터『무경칠서(武經七書)』를 상으로 받았습니다. 후에 임진왜란 때의 전공자로서 선무공신(宣武功臣) 20명 가운데 한 사람으로 뽑혔습니다. 뒤에 전라병사(全羅兵使)에 오르고 동계(桐溪) 정온(鄭蘊)의 상소로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이 되었습니다. 1636년(인조 14년) 병자호란(丙子胡亂) 때에는 74세의 고령으로 왕을 호종하기 위해 상경하던 도중 은진(恩津)에 이르러 화의가 성립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돌아왔습니다. 묘는 대산 마을 뒤편 야산에 위치하고 있는데 봉분의 직경은 7.3m 둘레는 23.2m 높이는 1.4m 정도로 타원형입니다. 묘 앞에는 상석·장명등(長明燈:무덤 앞에 세우는 돌로 만든 등)이 있고, 장명등 좌우에는 문인석이 각각 1구씩 있으며, 주위에는 소나무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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