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제시 죽산면

역사와 유래

죽산면은 본래 김제군 반산면 지역으로서 명량등 18개리를 관할 하였으며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서포면, 홍산면, 대촌면 월산면과 부량면 일부와 부안 이도면, 백산면 일부를 합하여 죽산면 이라는 이름으로 김제군에 편입되었으나 1995년 김제시·군이 도·농시 통합에 따라 현재의 김제시 죽산면이 되었음

면소개

전국 제일의 미곡생산지로서 서해안고속도로가 관통하고 있고 국도 23호선 지방도 711호선이 종횡으로 면 중심부를 통과하고 있으며 바다에 인접한 지리적 특성 때문에 지금은 공원으로 변한 쓰레기매립장과 오수분뇨처리장 등 환경관련 시설들이 유치되어 있다. 또한 조정래 작가의 소설『아리랑』의 작품상 주무대이기도 하며 서부로는 동진강이 굽이굽이 흐르고 중앙으로는 원평천이 유유히 흐르고 있어 영농과 관련된 관개수로가 발달되어 있다. 행정구역으로는 죽산리, 홍산리, 옥성리, 종신리, 대창리, 서포리, 연포리, 신흥리 8개리 법정리에 48개 자연마을과 92개반으로 구성되었으며 면적은 36.79㎢, 1,600가구에 3,200d여명의 주민이 살고 있다.

죽산리(竹山里)

본래 김제군 반산면 지역으로 대나무가 많아 「대뫼」 또는 「죽산」이라 불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가칠리, 석산리, 명량리, 죽동리, 자고리, 제내리, 화교리, 대장리의 일부를 합하여 「죽산리」가 되었다. 명량은 명량산의 전설에 따라 「울엉이」라 부르던 것을 한문으로 표기하면서 명량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하며, 자고는 비교적 이웃마을의 형세보다 작다(小)는 것을 뜻하는 것으로 「작은것」이라 부르던 것이 변음되어 자고라 불렸다는데 확실치 않다. 석산은 지난날 이 마을 안에 큰 돌이 있어 돌뫼라 불렀는데, 이를 한문으로 석산이라 쓴 것으로 전한다. 이 외에도 대나무가 많다 하여 대골안이라고도 불리던 죽동, 마을이 생겨날 때 늘어선 집들의 모양이 일곱칠(七)자 형으로 되어 있어 붙여진 이름의 가칠, 가칠과 한마을이었으나 마을이 크게 발전하여 행정 편의상 두 마을로 나누면서 죽산의 큰 마을이라는 뜻으로 이름 붙여진 대죽, 마을 동산에 100여년 전 동학군이 무기를 만들었다는 대숲(竹林)이 우거져 대뫼라 부르던 죽산마을이 있다.

홍산리(洪山里)

본래 김제군 홍산면 지역으로 기러기가 앉아 있는 형국이라 하여 「홍지뫼」 또는 「홍산」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외리, 오봉리, 쌍궁리, 내 리, 죽산리의 일부와 월산면의 수월리 일부를 합하여 「홍산리」라는 이름으로 죽산면에 편입되었다. 홍산리에는 5개의 구릉봉이 있는 한가운데 형성된 마을이라 이름이 붙여진 오봉, 내촌(당시에는 내리)바깥쪽에 있는 마을이라는 뜻의 외촌, 화초산 줄기의 산 등으로 둘러싸여 있다는 뜻으로 불리는 내리, 마을 앞산에 있는 두 개의 언덕이 마치 활처럼 생겼다하여 붙여진 이름의 쌍궁마을이 있다.

옥성리(玉盛里)

본래 김제군 반산면 지역인데,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신성리, 대옥산리, 소옥산리, 내재리, 제내리, 신흥리의 일부와 대촌면의 신학리, 소산리, 경제리의 일부, 월산면의 후장화리 일부, 홍산면의 신동리와 명마리를 합하여 대옥산과 신성의 이름을 따 옥성리라 이름지었다. 내재마을을 비롯하여 6개 마을이 있는데, 옛 문헌에 내재에는 내재역이 있어 동진강 유역의 교통 중심지로서 30여명의 관원이 주재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명매기골이라고도 부르는 명마는 화치산에서 뻗어내린 산의 모양이 말을 닮았다 하여 명마라는 이름으로 불렀다고 전한다. 대옥산은 마을 한가운데에 하얀 바위가 있어 백바우라고도 불리는데 180여년 전 살인사건으로 폐촌이 된 이마을에 백(白)씨들이 다시 들어와 마을 이름을 대옥산으로 고쳐 불렀다고 한다. 마을의 지세가 작은 옥쟁반처럼 생겼다 하여 부르게 된 옥산, 새로 터를 잡고 살기 시작하였다는 뜻의 신동, 제방을 쌓아 만들어진 방죽의 안쪽에 있는 마을이라는 뜻의 제내 마을이 있다.

종신리(宗新里)

본래 김제군 반산면 지역인데,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종남리, 신평리, 화교리, 죽동리, 자고리, 대장리의 일부를 합하여 종남과 신평의 이름을 따 종신리라는 이름으로 죽산면에 편입되었다. 수교, 종남, 신동 3개 마을이 있다. 수교는 벼농사를 짓던 사람들이 물을 가두어 두기 위해 보(洑)를 만들었는데, 이 보(洑)가 장마때는 무너미가 되고 평소에는 다리가 되었다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종남은 종신리의 중심이 되는 마을로 진머리 라고도 부른다. 이곳에는 검은 철솥을 만들었다는 솥붙이 가마터가 있었다고 전하나, 지금은 그 흔적을 찾을 길이 없다. 신동은 1920년대 일본인들이 개척하여 그들이 이루고 살았던 마을로 니가촌, 샛터, 동산촌 등으로 불리다가 8.15광복 이후 신동이라는 이름으로 바꾸어 불렀다고 한다.

대창리

본래 김제군 서포면 지역인데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 때 화동리와 대장리, 창리의 일부와 반산면의 화교리 일부를 합하여 대장과 창리의 첫 자를 따 대창리가 되었다. 남쪽으로 명량산이 바라보이는 대창리에는 행정구역 통폐합 때 근처 마을 중에서 제일 크다는 뜻의 대장마을을 비롯하여 장돌,우마,화동,해창등 5개 마을이 있다. 장돌은 대장 서쪽에 있는 마을로 마을 서쪽 약3km지점 갯벌속에 800~900평 정도의 돌산이 있어 장돌이라 불렀다 한다. 해창은 마을 이름의 유래가 확실치는 않지만 해상교통이 편리한 이곳에 나라의 창고가 있었다고 하여 해창이라 불렀을 것으로 추측된다.

서포리(西浦里)

본래 김제군 서포면 지역인데,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불당리, 원기리 창리의 일부와 홍산면의 소제리, 영구리 하원리, 죽산리 일부, 부안군 이도면의 방목리 일부를 합하여 서해 바닷가 마을이라 하여 서포리라는 이름으로 죽산면에 편입되었다. 신용, 불당, 신창, 하원,방목,영구,소제,원기마을 등 8개 마을이 있다. 신용은 유휴지를 개간하여 농토를 만들고 여러 곳에서 농민들이 이주해 와 이루어진 마을로 이주민들이 산다고 해서 ‘동척 이민촌’이라 부르기도 했다. 불당은 ‘부처댕이’라고도 부르는데, 마을이 생겨날 무렵 정진섭이라는 마을사람이 꿈에 부처님의 말씀을 듣고 암자를 지어 세 부처를 모셨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하원은 옛날 마을터에 노란 수탉 두 마리가 싸우는 것을 본 한 노인이 그 자리에 집을 짓고 살았다하여 「노랭이터」라 불렀다는 이야기가 있고 또 원터의 아래쪽에 있어서 원님이 강을 건너 이곳에서 쉬었다 하여 「하원」이라 불렀다는 사람도 있다. 이외에도 옛날 크고 아름다운 나무가 많았다는 방목, 아홉 신선이 모여 놀던 곳이라는 뜻의 영구, 마을 앞에 조그마한 절이 있어 「소절」이라 불렀다는 소제, 마을 원님이 나들이할 때 쉬어 가는 곳이라는 뜻으로 원터로 불리우던 원기마을이 있다.

연포리(連浦里)

본래 김제군 홍산면 지역인데,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연봉리, 유호리, 마포리, 상신리, 하신리, 상포리, 마심리의 일부와 반산면의 신월리 일부, 부량면의 옥동리와 신제리 일부, 고부군 백산면의 대선리,소삼리,대삼리를 합하여 연봉과 마포의 이름을 따 연포리라는 이름으로 죽산면에 편입되었다. 마을 주위에 물이 넘쳐 흐르는 바다와 웅덩이(湖)가 있어 이름 지어진 유호, 사람들이 아홉 신선을 만나기 위해 기다리던 곳이라는 뜻의 대선마을이 있으며, 이외에도 삼진, 부성, 마포, 상포마을이 있다.

신흥리(新興里)

본래 김제군 홍상면 지역인데,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유흥리와 마삼리 일부, 반산면의 신월리 일부를 합하여 신월과 유흥의 이름을 따 신흥리라는 이름으로 죽산면에 편입되었다. 신월은 옛 문헌에 나온 현 신흥리 지역에 있는 마을명 중 하나인데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 때에도 신월이라는 이름을 그대로 사용하였다. 복간은 바닷물이 마을 앞뒤로 드나든다 하여 「보안」, 복이 많이 들어오는 뜻에서 「복간」이라 했다고 하는데, 또한 옛날 제방 사이에 있는 마을이라는 뜻으로 「보간」이라 부르던 것이 변음되어 복간이 되었다는 이도 있다. 이외에도 신촌, 유흥, 복덕마을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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