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지형(鄭志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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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9.0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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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화동 후장(後長)부락에 우뚝 솟은 오두적각(烏頭赤脚 =흥삼문을 일컬음)은 한 효자와 두 열려의 행적을 기려세운 정려 이다.
효자 정지형 (鄭志亨) 공의 호는 벽계 (碧溪) 이며 이조 순조(純祖)때의 사람 이다. 어려서부터 품성이 효성스럽고 남달리 총명하였는데 부친이 돌아가신 뒤에 모든 예를 다하여 장사를 지낸후 3년동안이나 곡성을 그치지 아니하니 모든 사람들이 그의 효성에 감동하였다. 학문에도 조예가 깊어 송성담(宋性潭) 선생에게 사사(師事) 하여 크게 성리학에 업적이 컸다. 이에 여러 유림들이 천거하고 관찰사 서상정 (徐相鼎)이 계를 올려 1808년(純祖 8년) 4월에 정려를 세우고 통훈대부 사헌부 지평(通訓大夫 司憲府 持平) 을 제수하였다.
고려 김제조씨 (趙氏) 는 정지형 (鄧志亨) 공의 손부(孫婦) 로서 천성이 극히 정숙하며 규범을 잘 지키니 그의 남편 진사 정환석 (鄭桓奭 ) 이 오래 병들어 백약이 소용없게 되자 손가락을 셋이나 잘라 그 피로 목숨을 연명하고 허벅다리의 살을 베어 약을 달이니 그 정성이 하늘에 닿아 7년동안 생명을 더 살게 하였다 . 이에 도백 윤영신(尹榮信)이 상계하고 정려를 세우게 하였다.
또한 증손부 광주(廣州) 이씨는 통덕랑(通德郎) 방섭 (邦堅) 의 처로 어려서는 부친 곁에서 소학 열려편을 외우고 출가하여 시어머니가 병환을 입자 손가락을 찢어 피를 올리는 효성을 보였다. 또한 남편이 오래 병석에 눕자 축대를 쌓아 단을 만들고 하늘에 빌기를 8년동안 하루도 거르지 않았다. 그동안 열번이나 손가락을 찢고 세번 허벅다리살을 베어 남편의 병을 낫고자 정성을 다하였으나 마침내 남편이 세상을 떠나자 자기도 조용히 목숨을 끊어 그 뒤를 따르고 말았다. 효자 문중에 이같은 열려 있음을 널리 알리우고자 도백 이헌식 (李憲植)이 상궤를 올리고 특별히 정려를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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