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윤교(鄭允僑)

  • 관리자
  • 2019.0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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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이 내린 효자 정 윤 교(鄭允僑)(1733년 -1821년)
* 자 : 대천(大遷)
* 호 : 외암(畏庵)
* 출생지: 김제시 장화동
 
선생의 이름은 윤교(允僑)이며 자는 대천으로 아호는 외암(畏庵)이다. 동래 정씨의 삼대파의 하나인 고려조 도지휘사대호군 인(紹)의 후예로 현 김제시 장화동에서 1733년에 태어나 1821년에 천수를 다하고 89세로 타계했다.
선생은 명문대가의 후손으로 태어나 가통을 이어받은데다가 선천적으로 온화한 성품에다 총명했다. 그리고 학문을 좋아하여 12, 3세 때에 태인(泰人) 한매당권공(寒梅堂權公)의 문하에서 수학하는 등 열심히 주야불식 학문을 닦았다. 이렇게 학업에 열중하던 중 선생의 부친이 한 고을의 윤씨라는 여자의 무고(誣告)를 입어 관가에 불려가 매를 맞고 죽게 되었다. 이 윤성녀(尹姓女)라는 요녀(妖女)는 행실이 좋지 못해 이웃마을 외간남자와 간음을 일삼다가 동네 사람들에게 발각되자 엉뚱하게도 외암 부친에게 강간을 당했다고 함으로써 자신의 죄를 발뺌하려 했던 것이 뜻하지 않게 외암 부친의 사망으로 일이 커지고 만 것이다.
장자(長子)인 외암은 나이 열여덟이었다. 바로 아래 동생의 이름은 윤준(允俊)으로 자는 중현이고 호는 송고이다. 막내동생은 이름이 윤검(允儉)으로 9세였다. 외암은 두 어린 동생을 데리고 아버지의 치상을 한 뒤 집안 어른들이 모인 자리에서 불구대천지 원수를 잡아 복수를 하겠다고 맹세를 하였다. 뒤늦게 무고하다는 것이 밝혀졌지만 이미 부친은 돌아가신 뒤였다. 선생은 분한 마음에 복수하고 자기도 따라 죽으려 했으나 어머니와 두 어린 동생을 생각하고 차마 죽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복수를 하기 전에는 3년상이 넘었다 해도 제청도 치우지 않을 것이며 상복도 벗지 않겠다고 굳은 결심을 하고 나섰다. 3형제는 많은 사람들을 시키고 또한 직접 윤성녀를 찾아 헤맸으나 행방이 묘연해서 찾지 못하고 세월만 흘렀다. 1년이 지나고 2년이 지나 3년상이 되어도 찾지 못해 제청도 치우고 않고 상복도 벗지 않은채 원수를 찾아 원근을 막론하고 돌아다녔다.
온갖 고난을 겪으면서 원수를 찾아 조선 8도를 헤매고 다닌지 16년이 되던 겨울에 윤성녀를 찾아 목을 베려 하자 체념하고 용서를 빌었다. 3형제는 동네 사람들을 증인으로 낱낱이 과거 부친을 무고로 관아에 모함하여 죽게까지 한 경위를 빠짐없이 밝혀냈다. 그리고 윤성녀를 죽이고 그 간(肝)을 내어 씹고 이를 가지고 집에 돌아왔다. 그리고 아버지의 제청에 간을 올려놓고 크게 제사를 지낸 후 그제야 탈상을 하고 상복도 벗었다. 그런 다음날 3형제는 동헌에 나가 그간의 전말을 상세하게 밝히고 살인을 했으니 죄를 내려 달라고 했다. 원님은 이 갸륵한 정성과 지극한 효성에 탄복했으나 일응 살인을 했으니 치죄(治罪)는 해야겠는데 3형제를 모두 벌을 내릴 수는 없다 하여 장자인 외암을 투옥시키기로 했다. 이렇게 큰형이 투옥되자 두 동생들은 미동도 않고 옥문에 꿇어 앉아 눈비를 그대로 맞고 있자 집안 어른 인근 선비들이 몰려와 돌아가기를 권했으나 듣지 않았다. 원님이 이 사실을 알고 효심과 형제의 우애를 가상히 여겨 동생들이 꿇어 앉아 있는 곳에 막을 쳐서 눈비를 가려 주도록 했다 한다.
이러던 이듬해 봄, 어떻게나 가뭄이 심한지 못자리가 타고 밭곡식은 모두 말라 죽어 백성이나 관아에서는 기우제를 지내는 등 갖은 방법을 다했으나 비는 내리지 않았다. 이럴 때 마침 사면되어 외암이 출감하게 되자 그 날까지 옥문 밖에서 대죄했던 두 형제의 기쁨은 말할 나위도 없거니와 고을 백성들이 모두 몰려나와 환호성을 올렸다. 외암이 옥문 밖으로 막 나오자 멀쩡하던 하늘이 갑자기 어두워지며 소낙비가 줄기차게 내렸다. 이때 모든 사람들은 하늘을 우러러 효자의 출감으로 비를 내리신다면서 하늘을 향해 합장을 하며 절을 하고 감사를 올렸다.
그 후 철종임금이 이 사실을 알고 감복하여 동몽교관의 직책을 내렸고 효행이 높이 평가되어 고종 때에 정려문을 세우게 하였다. 그리고 통정대부에 추증되었다. 또한 인근 고을 유림들은 선생의 높은 학문과 효성을 기리기 위해 향리에다 화동서원을 건립하고 오늘에 이르기까지 추모하고 있다. 저서로는 외암집이 건·곤(乾·坤)으로 나뉘어 전해지고 있는데, 장화동 전장마을의 후손인 정원모가 보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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