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방(金倣)

  • 관리자
  • 2019.0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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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골제 보수에 힘 쓴 김 방(金倣)

공은 조선 초기의 문신으로 부친은 고려조의 예조판서 승로(承魯), 조부는 충숙공 심()이며 증조부는 문숙공 주정이다.

공은 조선조 태종 15년에 통훈대부(通訓大夫) 지 김제군사(知金堤郡事) 겸 권농병마 단련부사로(勸農兵馬 鍛鍊府使)로 있을 때 유명한 김제 벽골제 보수공사에서 큰 업적을 남겼다.

워낙 방대한 둑인지라 적은 인원으로는 어림도 없어 하루에 1만여명의 일꾼을 동원하여 약 1개월간에 걸쳐 보수공사를 끝마쳤는데 그 어려운 일을 처음부터 끝까지 총감독을 맡아 완벽하게 마무리 지어 세상을 놀라게 했다.
이 벽골제는 백제 초엽에 만들어져 동양 최고최대(最古最大)를 자랑하는데 군수의 몸으로 하루에 1만여 명의 인부를 동원하여 아무런 차질없이 일을 마무리 지었다는 점과 최대한의 정밀기술을 필요로 하는 수리토목공사를 불과 1개월만에 끝마쳤다는 것은 정말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는 그의 치밀한 계획과 깊은 학문, 어진 품성이 빚어낸 결과였다.

이러한 훌륭한 인재를 박습(朴習) 전라 관찰사(全羅 觀察使)가 교체되고 후임 권진(權軫)관찰사가 부임하면서 사소한 실수를 범했다 해서 공을 파직시켰다. 정말 아까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이런 사실은 바로 태종(太宗)도 알게 되었다. 다름 아닌 태종 18 1월에 광주목사(光州牧使) 우희열이 벽골제를 다시 수축해야 된다는 것과 바라건대 당시의 축조 당사자인 전지 김제군사(前 知金堤郡事)김방을 기관수령(機官守令)과 더불어 결궤처에 보내어 튼튼하게 보수함이 어떻겠느냐는 내용의 상소를 올렸는데, 태종임금이 상소문을 보고 전 전라 관찰사 박습에게 묻기에 이르렀다. 그렇게 되어 박습은 김방의 인물됨을 소개했고 김 방이라면 반드시 벽골제 보수에 가용(可用)할만 하다 하였다. 그리고 현 권진 관찰사가 파직시켰다는 말까지 아울러 전달되자, 태종은 쓸만한 인물(人物)이니 이름을 적어두어 뒤에 서용(庶傭) 토록 하라고 말했다.

그 후 공은 중임되어 광주목사(光州牧使)로 있을 때 당시 세종(世宗)의 중농정책으로 경국재민(經國齋民)하는 뜻을 받들어 선생의 소유지인 저습지(低濕地) 4 6 5백여 평에 전천후(全天候) 사업으로 3년간에 걸쳐 경양(景陽)방죽을 만들어 광주일원의 농토를 옥답으로 만들었다.

그 후 공은 관직이 좌찬성(左贊成)까지 올랐는데 광주(光州)에서 공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영정을 만들어 광주(光州)의 증심사와 능주의 쌍봉사 및 낙안(樂安)의 징광사에 봉안하였다.어떻게 보면 실학도 겸비한 인물로써 오늘날에도 높이 평가되어 숭앙을 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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