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윤성(黃允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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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9.01.08
  • 1701
용지면 귀암리 평고부락에 효자 황윤성공과 열부 고흥유씨를 모시는 정려가 모셔져 있다.
공은 1730(英祖 6) 평고에서 출생하였는데 천성이 지효하여 넉넉하지 못한 살림에도 부모공양을 극진히하여 13식을 주육으로 받들기를 30년 하루도 게을리하지 않았으며 공이 83세에 별세하니 출천대효를 추앙하는 향인들의 칭송이 자자했다. 선생의 장자 대유 (大有)도 부친의 효성을 본떠 효도를 극진히 하였다.
일찍 부친이 등창(背瘡)으로 고생하자 공은 백방으로 약을 구하였어도 백약이 무효로 부친의 고통만 심할뿐이었다. 이 고통을 보다 못한 공은 6년이란 긴 세월을 입으로 빨아내어 치유함으로써 그 지극한 효성은 향다에 소문이 자자했다. 공 61세에 별세했었는데 슬하에 두 아들이 있어 장남은 석신(錫信)인데 이 역시 조부 윤성과 부친 대유못지 않아 평생 부모 모시는데 조금도 소홀함이 없었으며 차남 석회도 덕행이 출중하여 집안간 화목과 어려운 친족과 이웃에 전답(田畓)을 문급하여 어려움없이 살게 함으로써 덕행과 효행을 칭송하는 소리가 자자했다.
공이 별세한지 오랜 뒤에(1864) 고종조 전라도를 암행하던 어사가 3대에 걸친 효행을 탐문 조사하여 감사와 합계(合啓)로 사적을 상주하니 조정에서는 윤성공에게 증 시강원 시강과 그의 아들 대유에게는 통정대부 석신과 석회에게는 가선대부를 증직하고 아울러 명정을 받았다.
정절부 고흥유씨는 우주인 황하정(紆州人 黃河丁) 처로서 천성이 온후하고 남달리 총명하여 소학과 열녀전을 번역하여 부녀자들에게 널리 읽혀 실행토록하고 평소 바른 범절을 지켜 부모를 창달 하던중 황하정과 결혼하여 친가에 간지 3일만에 부군이 사망했다는 부음을 듣고는 혼수 기절하였다. 다행히 주위의 보살핌으로 소생하여 시가에 가 부군을 따라 하종하였다. 이 사실을 계문한 조정에서는 1687 10월 열녀 정려를 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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