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일식(金一植)

  • 관리자
  • 2019.0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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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식(金一植, 本名은 金順用)은 경주김씨이다.
죽산면 서포리에서 태어나 어릴 적부터 영특하고 총명하여 이웃간의 총애를 한 몸에 받으면서 자랐으며 모악산 줄기인 노령산맥의 정기를 타고 태어났다고들 하며 귀여움을 받았다.

1923년 일본재벌인 아부방차랑이 갯벌을 막아 이민을 입주시켰을 때 아버지를 따라 함께 이곳에(지금의 광활면) 이민을 왔었다. 그러나 그의 꿈은 땅을 일구는 것은 아니었다.
일제치하 배를 굶주리며 살고 있는 민족과 우리말도 마음대로 하지 못하고 새벽동이 트기 전부터 밤늦게까지 왜인의 감독아래 죽지 못하여 생활하고 있는 모습들이 어린 청년의 가슴 한구석에 응어리로 맺혀 있게 되었던 것이다. 기회 있을 때마다 감독과 언쟁과 싸움은 보통 이였고 불쌍한 입주민을 위하여 투쟁에 앞장서곤 하였다.
당시 공사비 1 50만원을 들여 6년에 걸쳐 제방 10km 를 구축하고 1,830ha의 간척지를 막아 농경지로 개답한 영농주인 아부방차랑이 선생의 총명을 인정하여 일본에서 농사 기술을 배울 수 있는 농업기술학교에 유학의 길을 터 주었다.

선생은 2년간의 전문학교를 수료하고 귀국하여 동진농업 주식회사(본부현봉면 사무소 위치)에 사무원으로 기용 되었으며 은파리 4답구 (洛區따구) (현 은파리 진흥마을) 감독으로 일하게 되였다. 왜인의 감독하에 있던 입주민들은 우리 나라의 감독자를 맞이함에 모두들 기뻐하였다.

애써 가꾸어온 곡식의 벼포기를 세고 벼알을 세어 수확을 계산 착취하여 가는등 일제의 악랄함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이에 선생은 입주민들을 위하여 감싸주고 이끌어 나갔다.

세계 2차대전이 발발하고 전쟁이 치열하게되자 우리의 청장년을 노무자 및 학도병의 명목으로 끌어가기 시작하는데 선생도 예외는 아니었다. 기어이 끝도 없는 낯선 전쟁터인 남양군도에 노무자 반장으로 징용 당하여 끌려갔다.  갖은 어려움 끝에 일본의 무조건 항복으로 해방의 기쁨을 맞이하면서 고향으로 돌아왔다. 고향에 돌아와 보니 전쟁무기를 만들기 위하여 놋쇠로 만든 밥그릇 수저 등을 모두 강제로 압수해 갔으며 식량은 커녕 보리죽을 먹을 수저마저 없는 폐허가 된 마을이 되고 말았다.

해방을 맞이한 어수선한 치안을 유지하기 위하여 민족청년단이 구성되어 군당 부단장에 피선되었으며 당시 홍희종 군당 단장과 함께 열심히 지역 개척에 앞장섰다.  당시 행정은 진봉면에서 관장하고 치안은 성덕 지서에서 담당했다.

이와같이 행정과 치안이 따로 분리 되었기 때문에 주민들의 불편이 대단했으니 예속되기 때문에 천대를 받고 있는 것을 마음속으로 안타깝게 생각하고 있어 중앙으로 인사들에게 분면(分面) 건의도 수차 올린 바도 있으며 치안 행정의 독립을 강력히 주장하였다그와 함께 민족청년단 군당 단장을 지낸바 있는 홍희종 선생이 제 1공화국 초대 국회의원에 당선되어 분면 운동은 더욱 활발히 거론되었다. 1947 45일자로 성덕 지서로부터 독립되어 김제 경찰서 동진출장소가 설치되고 치안 행정만이 독립되었다.
그러나 지리적 조건을 감안할 때 주민들은 진봉면에서 분리시켜 면으로 승격시켜 줄 것을 당국에 건의 194910 22일 전북 도령 제 10호로 진봉에서 분리 주민의 숙원이 이루어 졌으며 끈질긴 집념의 결실을 보았다.
그해 선거실시로 초대 면장으로 당선 되었다.
그의 꿈은 면장의 직위가 아니었고 일제치하에 버림을 받았던 정신상태를 개혁하는 것이 급선무라고 생각하고 무엇보다 교육이 필요하다고 역설하였다. 그가 거주하는 곳부터 서서히 확산 시켜야 하겠다고 굳은 결의 밑에 뜻을 같이하는 몇몇 친지들을 모아 야학당을 설립 우리 글을 가르치고 문맹퇴치에 앞장섰다. 유교사상이 완고한 일부 주민들은 여자가 어떻게 남자와 함께 밤에 공부를 할 수 있겠느냐며 세대교체의 소용돌이 속에서 반발이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낮에는 집무실에서 밤에는 야학당에서 지칠줄 모르게 힘을 다했다. 이 마을이 지금 야학당이 맨 처음 설치되었다 하여 학당마을이라고 불리고 있다는 것이다기쁨과 자유를 채 알기도 전에 공산당의 마수의 손길이 서해남단 갯벌 마을에도 뻗히고 있었다.

1950년 6.25가 터지고 말았다. 이렇게 되어 어느날 밤 공산당의 추종자 몇이 선생의 사택을 습격 친일파라고 납치해 갔다. 어디에 끌려가 어떻게 죽은지도 모르는 김순용 면장, 그의 시체도 찾을 길없이 잔인하게 죽였던 것이다. 그는 가고 야학당 마저도 변모해버리고 개인 소유가(현 학당 이상근 소유) 되어버린 집주위 모정에서는 이따금씩 노인들이 모여 격동기에 희생을 당한 그의 이야기를 할뿐더러 학당마을이 있는 한 그의 이름은 영원히 남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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