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석정(朴石精)

  • 관리자
  • 2019.0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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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티재(熊峙)의 충절 박 석 정(朴石精)
(1539년 ∼ 1592년)
 
* :일서(-瑞)
* 호 :굴지당(屈指堂
)
* 출생지:1537년 5월 김제시 백학동 용곶(龍睾)에서 태어남 1592년 7월 8일 곰티재에서 전사


선생은 밀양(密陽) 박씨(朴氏) 문경공정제휘의중(文敬公貞齋諱宜中)의 6세 손으로 아버지 성균진사 휘 제곤(成均進士 諱 悌昆)과 어머니 진주(晋州) 강씨(姜氏) 사이에서 1539년(조선 중종 34년)에 태어났다.

선생은 글을 잘하며 엄하신 아버지 밑에서 어려서부터 글공부에 힘써 글에 능하고 덕행(德行)이 뛰어나 선생 나이 16세 때 당당히 진사시험에 합격한 후 벼슬길에 나가려 하였으나, 벼슬보다는 차라리 많은 글벗을 사귀며 학문에 힘을 기울여 후학(後學)들을 길러내는 것이 옳은 일이라 생각하고 그 길로 정진하였다
.

그러던 중 1592년 선조(音祖) 25년에 임진왜란(壬辰倭亂)이 일어났다. 백성들의 마음은 걷잡을 수 없이 흔들렸고, 온 나라 안은 왜놈들의 말발굽에 짓밟히는 수라장이 되었다
.

나라가 위태로울 때 그냥 앉아서 보고만 있는 것은 대장부의 도리가 아니라고 생각한 선생은 먼저 종족(從族)들과 의논하고 김제수령 정담(定談)과 상의한 후 많은 동지(同志) 들에게 격문을 보내어 굳게 맹세하였다
.

「어려운 가시밭 길을 평지같이 밟아가니(疾藜踏去如平地) 화살과 총탄이 앞에 떨어져도 조금도 움직이지 말라(矢石當前莫動鞍) 맹세코 한양, 개성, 평양을 회복시키고 팔도(八道)를 평정시키어(誓復三京證入宇) 임금님을 다시 모셔 태평성대를 되찾도록 할 것이다(奉還車駑奏治安)」


이와 같은 소신과 결의를 밝힌 선생은 바로 이어 곳곳에 창의 징병문을 내었다. 「예의의 나라에서 태어나(生長禮義 之郊) 여러 임금님의 은덕 속에서 자라 왔는데 (極泳列聖朝培養扶植之澤) 나라가 태평하면 학문을 연구하여 세상에 도움이 되게 하고(國家無事則硏究文學以經世) 만약 어려운 일을 당하여서는 서로 힘을 다하고 성의를 다하여 목숨을 내던지고 나라에 봉사하는 것이 우리의 분수인지라(若當患難則竭力 效誠捨生奉公可謂當分也) 이제 천운이 다하여 막히고 나리에 어려움이 많아 왜놈 적들이 날뛰고 미친 지랄을 하니(今天運否塞國步疑難散勢猖獗) 임금께서는 북녘 하늘을 바라보며 통곡하고 피난 가니 죽고 싶은들 도리가 없는지라(大駕播還北望慟哭敬死無地) 모두다 피가 있는 사람이라면 어찌 분하고 원통하지 않겠는가(凡有血氣者訖不墳激敵愾乎) 옛적에는 아녀자들을 군대로 보내어 싸우기도 하였고 또는 홀로써 적진에 들어가 싸우기도 하였으니(古有妻妾編伍者又有單身赴賊者) 일의 잘 되고 못됨은 하늘에 맡기고 사람의 힘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니(至於事有之成敗天也非人也) 역사에 소상히 적혀 있어서 천백년 동안 그 이름이 빛나니 오늘이라고 그러한 사람이 없을손가(昭載靑史千百祀流芳今可無其人哉) 석정 내가 한낮 서생이나 나라를 위하여 의롭게 죽어야 함은 배워서 익힌 바 근본이요, 또한 다소 병법도 알고 있으니(石精雖-個書生爲國死節素所學習且能稍解兵法) 하물며 종질 정영(廷榮)과 문인 67명이 나와 뜻을 같이 한다 하니 도움이 아니 된다 못하리라(況有從姪廷榮及門生六七人與我同志不日憮助) 피를 마시고 맹서하여 힘있게 일어나서 싸울 장정들을 고을에서 모취하기 100여 인이나 되니 모두가 죽기로써 용감하게 싸울 사람들이다(畝血同盟舊起募了得間左百餘人皆可爲敢死之卒) 아무리 위험한 곳이라도 가서 싸울 사람들이라 그러기에 글로써 멀고 가까운 곳에 알리니(方赴矢之所玆以文誥遠逅) 여러 의롭고 힘있고 피있는 동지는 이 글을 보는대로 몸을 던져 길을 떠나서(刻義勇如果同志文到卽時撻身登程) 서로 곰티재에서 만나면 천만 다행한 일이로다! (相會子熊峙幸甚)」

창의징병문을 낸 선생은 군량(軍糧)을 만들고 군기(軍器)를 갖추어 길을 떠나 도원수 권율 장군 막부(都元首 權???慓 將軍 莫府)에 들려 장군을 만났다.

「왜놈들이 경상남도로 하여 우리 지방으로 넘어오니 그들이 우리보다 먼저 곰티재(態峙)나 배티재(梨峙)를 넘으면 그 선봉(先鋒)을 막기 어려우니 나주판관 이복남(羅州判官 李福男)과 선천부사 김진태(宣川府使 金振兌)와 서로 힘을 모아 먼저 곰티재와 배티재를 정령((7領)하여 남쪽으로 오는 왜놈들을 꺾어야 됩니다
. )

선생의 말을 들은 권율 장군은 크게 칭찬하고 이를 허락하며 시골에 묻혀 글을 읽는 선비의 몸으로 임금에게 충성하고 나라를 사랑하는 충절을 높이 자랑하였다
.

권율 장군의 허락을 얻은 선생은 그 해 7월 곰티재에 진을 치고 왜적을 기다렸다. 마침내 왜적이 몰려왔다. 선생은 몰려오는 왜적을 맞아 다리 위에서 크게 싸움을 벌였다. 왜적들이 썩은 고목이 쓰러지듯 쓰러졌다. 힘을 얻은 선생은 계속 적진으로 들어가 닥치는대로 무찔렀다. 그러자 왜적들은 겁을 먹고 후퇴하였다. 참으로 통쾌한 승리였다
.

그 이튿날 날이 밝자 왜놈들은 더 많은 병력으로 조총(鳥銃)을 쏘며 쳐들어왔다. 선생은 맨앞에 서서 죽기를 무릅쓰고 싸웠다. 그러다가 불행히도 왜적들이 쏜 총알에 손을 다치고 말았다. 그래도 선생은 조금도 굴하지 않고 닥치는대로 왜적들을 죽였다. 그러나 워낙 많은 왜적들을 당해낼 수 없었다. 선생은 결국 잔악무도한 왜적들에 둘러싸여 장렬히 전사하고 말았다. 그 날이 임진년(1952년) 7월 8일이다
.

비록 무지막지한 왜놈들이었지만 선생의 의기(義氣)에 감동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충간철석 의담상설(忠看鐵石義謄霜雪))이라표(標)를 하고서 떠났다
.

선생이 순절하자 나라에서는 굴지당(屈指堂)이라는 호(號)를 내리고 예관(禮官)을 시켜 초혼장(招魂葬)까지 지냈으며, 서기 1863년 철묘계해(哲廟癸亥)년에는 승정원 좌승지(承政院左承旨)라는 벼슬까지 증직(贈職)하였다
.

선생은 평강 채씨(平康 菜氏)와 결혼하였으며 유고(遺稿)로는 '굴지당유고(屈指堂遺稿)'라 이름하여 시, 서, 실기(詩, 書, 實記) 등이 적혀있다.끝으로 박석정 선생의 사무친 충절이 고스란히 적혀 있는 한 구절을 소개 한다
.

「대장부가 나라의 어려움에 일어나지 않는다면 어찌 세상에 저리요.(大丈夫不赴君父難 何以立於世) 웅담이 어느 곳에 있느뇨? 곰티'재가 곧 우리가 지킬 곳이로다. (龍灣何處在 熊峙卽前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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