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득강(羅得康)

  • 관리자
  • 2019.0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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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세종(世宗)때 문신(文臣) 나 득 강(羅得康)(1378년 -1444년)
 
* 본관: 나주(羅州)
* 이름: 나득강

* 출생: 1378년(고려우왕 4년) 낙천와(樂天瀉) 중우(仲佑)의 아들로 태어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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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려서부터 총명하고 몸가짐이 단정하였으며 문예(文藝)가 뛰어나 일을 이루려는 의지가 강했다. 이 태조가 임금이 된 후 아버지 낙천와를 우의정으로 임명하여 불렀으나 나아가지 않고 고향에서 별세하니 그 때 공의 나이 열 여섯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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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은 상례(喪禮)를 다하여 3년 복을 입은 후 1396년(太祖 5년) 향시(鄕試)에 급제하여 진사(進士)가 된 후 1419년(世宗 1년)에 등과(登科)하여 이듬해 권지저작(權知著作)으로 통사랑봉상녹사(通仕郎奉常緣事)가 되었다. 같은 해 10월 계공랑직장(啓功郎直長)으로 승문원박사(承文院博士)를 겸하고, 1422년(世宗 4년)에는 선무랑(宣務郎)으로 외직인 임피현(朧陂縣)을 맡았다가, 이어서 선천(宣川)과 오천(汚川) 두 고을 군수를 역임하니 이르는 곳마다 백성을 잘 다스려 칭송이 자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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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24년(世宗 6년)에 어머님이 돌아가셔 고향으로 돌아와서는 3년을시묘하였고, 1427년(世宗 9년)에 통예문봉예랑(通禮門奉禮郎)이 되어 한성참군(漢城參軍)을 겸하고 이어서 우정언지제고(右正言知製誥) 이조좌랑(吏嘗左郎) 함길도경력(成吉道經歷)을 거쳐 봉훈랑군기판관(導訓郎軍器判官)으로 배임하니 그 명성이 조정에까지 널리 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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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31년(世宗 13년) 11월에 예조공랑(禮普功郎)이 되었다가 전농소윤(典農少尹)을 거쳐 봉상소윤(奉常少尹)으로 의금부지사(義禁府知事)로 승진되었으나 뜻이 없음으로 관직을 그만두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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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 임금이 공을 끔찍이 사랑하여 은권(恩眷)을 융성하게 하고 자헌대부 이조판서겸세자시강원찬선(資憲大夫 吏曺判書兼世子侍講院贊善)으로 임명했으나, 병을 핑계하여 이에 응하지 않다가 1444년(世宗 26년) 12월 3일에 66세를 일기로 별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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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 임금이 슬퍼하시고 부제(賻祭)를 후히 하사하였으며 이듬해에 김제시 백산면 하리 북조산 아래 예장(국장수준의 장례식) 하도록 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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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의 묘를 쓴 주산(主山)이 평지임으로 산을 쌓고 못을 파서 수세(水勢)를 돕게 하니 이 산을 '조산'이라 하고 못을 '나소제(羅所堤)'라 부르고 있다. 공의 자손 수천 명이 김제를 비롯하여 각지에 흩어져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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