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세종(世宗)때 문신(文臣) 나 득 강(羅得康)(1378년 -1444년)
* 본관: 나주(羅州)
* 이름: 나득강
* 출생: 1378년(고려우왕 4년) 낙천와(樂天瀉) 중우(仲佑)의 아들로 태어남.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몸가짐이 단정하였으며 문예(文藝)가 뛰어나 일을 이루려는 의지가 강했다. 이 태조가 임금이 된 후 아버지 낙천와를 우의정으로 임명하여 불렀으나 나아가지 않고 고향에서 별세하니 그 때 공의 나이 열 여섯이었다.
공은 상례(喪禮)를 다하여 3년 복을 입은 후 1396년(太祖 5년) 향시(鄕試)에 급제하여 진사(進士)가 된 후 1419년(世宗 1년)에 등과(登科)하여 이듬해 권지저작(權知著作)으로 통사랑봉상녹사(通仕郎奉常緣事)가 되었다. 같은 해 10월 계공랑직장(啓功郎直長)으로 승문원박사(承文院博士)를 겸하고, 1422년(世宗 4년)에는 선무랑(宣務郎)으로 외직인 임피현(朧陂縣)을 맡았다가, 이어서 선천(宣川)과 오천(汚川) 두 고을 군수를 역임하니 이르는 곳마다 백성을 잘 다스려 칭송이 자자하였다.
1424년(世宗 6년)에 어머님이 돌아가셔 고향으로 돌아와서는 3년을시묘하였고, 1427년(世宗 9년)에 통예문봉예랑(通禮門奉禮郎)이 되어 한성참군(漢城參軍)을 겸하고 이어서 우정언지제고(右正言知製誥) 이조좌랑(吏嘗左郎) 함길도경력(成吉道經歷)을 거쳐 봉훈랑군기판관(導訓郎軍器判官)으로 배임하니 그 명성이 조정에까지 널리 퍼졌다.
1431년(世宗 13년) 11월에 예조공랑(禮普功郎)이 되었다가 전농소윤(典農少尹)을 거쳐 봉상소윤(奉常少尹)으로 의금부지사(義禁府知事)로 승진되었으나 뜻이 없음으로 관직을 그만두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세종 임금이 공을 끔찍이 사랑하여 은권(恩眷)을 융성하게 하고 자헌대부 이조판서겸세자시강원찬선(資憲大夫 吏曺判書兼世子侍講院贊善)으로 임명했으나, 병을 핑계하여 이에 응하지 않다가 1444년(世宗 26년) 12월 3일에 66세를 일기로 별세했다.
세종 임금이 슬퍼하시고 부제(賻祭)를 후히 하사하였으며 이듬해에 김제시 백산면 하리 북조산 아래 예장(국장수준의 장례식) 하도록 명하였다.
공의 묘를 쓴 주산(主山)이 평지임으로 산을 쌓고 못을 파서 수세(水勢)를 돕게 하니 이 산을 '조산'이라 하고 못을 '나소제(羅所堤)'라 부르고 있다. 공의 자손 수천 명이 김제를 비롯하여 각지에 흩어져 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