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기(康元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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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9.0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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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나라 유풍(儒風)을 진작시킨 학명 높은 성리학자 강원기(康元紀)(1423년-1498년)



* 자 : 원기(元紀)


* 호 : 봉호(鳳湖)


* 출생지 : 황해도에서 태어나 김제군 진봉면  회포리에서 일생을 마침.





선생은 신천 강씨로 고려조 '삼중대광도첨의 우정승'을 지낸 휘숙 의 증손이요, '대광 보국승록대부 상산백'인 휘서의 손자이다. 선생 찬성사인 아버지 휘윤의 아들로 태어났다. 선생의 이름은 원기(元紀)라 부르고 호는 봉호(鳳湖)라 하였으며 어려서부터 경술(經術)에 능하고 학력이 깊었기에 재주가 있어 얽매지 않으며 움직임에 규범이 있고 땅을 가려서 밟으며, 친구를 가려 사귀되 깨끗이 하며, 내 몸을 스스로 지키고 명예와 이익은 멀리 한다. 공정한 정치로 백성을 화평하게 한 선생은 바른 학문을 세우고자 야은길 선생, 포은정 선생과 더불어 경전을 강독연마하고, 이단의 교(敎)를 강력히 배척하면서 끊겨가는 학문을 일으켜 세우고 밝혀서 우리나라의 유풍(儒風)을 크게 진작 시키고, 주문공(朱文公)의 고사(故事)에 따라 조례(條例)와 향약(鄕約)을 편성 하였다. 경원과 은성 두 고을의 수령(守令)으로 있을 적에는 깨끗하고 공정한 정치로 다스리어 백성들을 화평하게 하니 정치에도 그 이름과 공이 높았으며, '이존록'이란 책을 만들어 집집마다 동리마다 나누어 주고 충(忠), 효(孝), 도(度)를 가르쳐 모두가 깨우치도록 하였다. 패조 때는 나라의 큰 그릇이라 여기고 큰일을 맡기고자 번번히 벼슬을 권하였으나 번번히 사양하다가 부득이 좌부승지(左副承旨)에 있었으나 얼마 후 바로 사직 하고자 임금님께 올리기를 "어리석은 신하를 편안하게 하여 주소서. 그저 한가한 곳을 찾아 수양하며 목숨을 보전하게 되면 위로는 다시 살 수 있는 고마움이 있고, 아래로는 어진 사람에게 꾸중을 면하게 되겠습니다. 가만히 생각하니 은혜를 여러번 그르치게 하였습니다. 나라와 임금님 은혜에 죄만 더 커질 뿐입니다."라고 글을 올리었다. 선생은 성품이 강직하고, 효도와 공경의 행실이 바르며, 사람들에게 기강을 세우고 세상을 교화하여 언제나 맑고 깨끗하며 어질고 공손하고 검소한 생활을 평소의 삶의 철학으로 여기었다. 또한 자제들에게 훈계할 때 "덕(德)과 인(仁)을 쌓을 때는 반드시 조상과 계술(繼述)의 도리를 생각하고, 충신의 언행을 할 때에는 정(正) 이 있어야 하는 바 반드시 선조의 유훈(遺訓)을 계승차고 진실하여야 한다. "고 하였다. 선생은 두능(杜陵)에 현인들이 청수염결(淸秀廉潔)하라는 글귀가 마음에 그 뜻을 취하고 드디어 서로 와서 사니 참으로 구름에 밭을 갈 명월에 낚시질하는 대루(臺樓)라, 그런 연유로 벼슬을 그만두고 늙어 보낼 때 집을 만들고 그 현판에 '봉호처사'라 하였다. 두능은 만경의 옛 이름으로 본디 조그마한 읍이었다. 만년의 명절 강호(江湖)의 사이에서 지키니 여유가 있고 호수의 남쪽과 두곡의 마을 쪽에는 별도로 '영락와'라는 집을 짓고 여기에서 예기와 주역을 강의 하니 책을 들고 듣는 자가 날로 많아졌다. 예를 묻는 자는 먼저 어른을 공경하고, 스승을 높이는 도(道)로써 그 어리석음을 일깨우고, 주역을 묻는 자에게는 음양의 이치로 그 깊은 뜻을 풀이하니 학자들이 누구나 감탄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만경 삼폐를 해소 선생은 퇴류지들 옛 만경현에 정착했는데(지금의 진봉면 심포리) 곳에 만경 삼폐라 하여 고려 때부터 세 가지 큰 폐단이 있어 백성들이 크게 곤욕을 겪고 있었다. 첫째, 고려 때부터 시행하여 군사상 통신 역할을 했던 봉수대의 제였다. 만경강 입구 황해에 반도처럼 뻗어 있는 진봉산맥의 맨 끝 길곶(吉串)이 있었던 곳이다. 이 필꽃마을 뒷산이 바로 봉화 로 여기에 봉수대가 설치되어 있었다. 이로 말미암아 운영상 필요한 경비를 각출해야 하는 재정상의 피해를 입어야 했다. 둘째, 공마(貢馬)라 하여 매년 300필의 말을 길러서 나라에 바쳐야 하는 문제였다. 현재는 농경지이지만 옛날에는 그곳이(지금 행정구역으로 진봉면 남상, 남하마을 목야지 였다고 한다. 그래서 매년 300필 의 말을 길러서 나라에 바치는데 그 어려움이 이만저만한 일이 아니었다고 한다. 인력 동원 문제며 말을 구입하는 재정상의 문제 등으로 백성들의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고 한다. 셋째, '공려'라 하여 매년 6천 편의 숫돌을 만들어 나라에 바쳐야 하 는 문제였다. 만경강에 접하고 있는 석소(石所) 뒷산에서 매년 숫돌 6,000편을 다듬어 만든 제품을 나라에 바치는 일이다. 이것 역시 인력 동원과 재정상 문제 등으로 백성들은 오랫동안 고통을 겪고 살아야 했다. 더욱 곤란을 겪은 것은 행정구역이 동일하다는데 있다. 이 세 가지 가 모두 진봉면 심포리에 있었기 때문에 이곳 주민들은 연중 쉴 새 없이 이 노역과 재정의 부담을 안아야 했던 것이다. 이렇게 고통을 받아오던 주민들은 조선시대에 이르러 안았던 짐을 풀게 되었다. 그것은 조선 초기 태조 말에 강원기 선생이 심포리 심포마을에 돌아온 뒤에 이루어졌던 일이다. 벼슬을 마다하고 토굴에 살며 후진 양성 선생은 성리학자로서 벼슬을 마다하고 후진 양성에만 몰두했었다. 그러던 중 조선 왕국이 들어서자 태조 이성계 말엽에 김제군 진봉면 심포리 심포마을 로 낙향했었다. 낙향하자 선생은 심포산 에다 일망요 한 황해바다 향해 '영 토굴을 만들고 자신의 수양과 찾아온 후진들의 교육에 정성을 다했다. 공이 낙향하여 수양과 후진들의 양성에 몰두하고 있던 어느 날 선생의 제자였던 이지로가 전라도 도백으로 부임하게 되었다. 부임한 옛 스승을 그리워하는 마음으로 불원천리하고 선생을 찾게 되었던 것이다. 사제지간의 만남에서 이때 봉호당 선생은 제자인 도백에게 지방 사정을 낱낱이 말해 주고 그동안 세 가지의 폐단을 걱정해 오던 참인지라 이 폐단을 선처해 줄 것을 청했다. 이 말을 들은 도백은 바로 타당성 있는 사유를 들어 나라에 계청하기에 이르렀고, 그렇게 되어 기르는 것을 제주도로, 봉수대는 부간 계화도로, 그리고 숫돌은 태인 으로 옮겨가게 되었다. 그 뒤 지방민들은 봉호당 선생의 송덕을 기리기 위해 두곡서원을 세우고 배향하였다고 한다. 공은 1423년 황해도에서 태어나 1498년기 김제군 진봉면 심포리에서 숨을 거두었으며, 선생의 유집으로는 '봉호집'이라 표제한 단권 칠언사율(七言四律)로 된 '등영락와관해시' 등 13편의 시가 수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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