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현섭(鄭賢燮)

  • 관리자
  • 2019.0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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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일 광복의 큰 별 정 현 섭(鄭賢燮)(1896년 ∼ 1982년)
 
* :윤옥(允玉)
* 호 :화암(輩岩
)

선생의 본관은 동래(東萊)이며, 휘(諱)는 현섭(賢燮)으로 자는 윤옥(允玉)이며,호는 화암(華岩∼중국에 건너가서 부르던 호이며 이 밖에도 많은 별호가 있었다 한다)이다.

선생은 동래 정씨 삼대파의 하나인 고려조 도지휘사대호군(都指揮使大護軍) 인(細)의 19대 손이요 조선조 이조판서 풍천공 수홍의 16대 손이다. 선생은 이러한 명문대가의 후예로 1896년에 태어나 1981년에 86세를 일기로 서울 은평구 갈현동 382 자택에서 영면하였다
.

○ 젊음을 조국 광복에 결연히 투신


공은 어려서부터 성품이 온후 강직하고 총명하며 일찍이 조부로부터 한학을 수업하면서 학덕(學德)을 쌓았다. 강인한 투지력과 애국정신을 기른 선생은 20대에 접어들자 결연히 조국 광복을 위해 고국산천(故國山川)을 뒤로 독립투사로서 해외로 망명하기에 이르렀다.
선생은 1919년 6월 백남규(白南奎), 정봉수(鄭鳳洙)와 협의하여 이기순(李基順)을 상해(上海)로 파견, 일본 유학생 대표인 이정규(李丁奎), 이종제(李鍾齋)와 연락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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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 4월 우강 양기택(梁起擇)을 중심으로 상해에서 입국한 이정규, 이종제, 이종욱 등과 독변부(督辯府)를 조직하여 국내연락망을 결성하는 한편 동년 7월에 내한(來韓)하는 미국의원단(美國議員團) 환영위원으로 활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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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1921년 4월 국내조직이 탄로 나므로 선생은 동지들과 같이 북경(北京)을 경유 상해로 망명했다. 선생은 1921년 9월 상해에서 재중국 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朝鮮無政府主義者聯盟) 결성을 준비하였으며, 같은해 11월에는 노령(露領) '일크스크'에서 개최되는 극동혁명자대회(極東革命者大會)에 참가하기 위해 가는 도중 북경에서 정세의 변동으로 중지하고, 국내운동의 연락을 위하여 다음해 국내로 잠입하였으며 서울을 중심으로 국내연락망을 조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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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3년 5월 재차 북경으로 탈출한 선생은 이회영(李會榮), 이을규(李乙奎), 이정규(李丁奎) 등과 같이 정의공보(正義公報)를 간행하여 사상선전에 주력하기도 했다. 또한 선생은 1923년 9월부터 1924년까지중국 동지 진위광(陳偉光) 등과 협력하여 호남성 한수현 양도촌(湖南省 漢水縣 洋導村)에 근거를 두고 농촌 자치운동을 전개하다가 토비(土匪)의 창궐로 인하여 중지하기도 했다. 1925년 4월 구파 백정기(鷗波白貞基) 의사와 같이 중국 동지들의 노동운동에 참획(參劃)하여 상해공단연합회(上海工團聯合會)를 중심으로 대일영오주(對日英五州) 상해대파업을 단행하였고, 1927년 영국인경영 철공장에서 노동자 공인으로 가장하고 이을규, 이정규, 백구파,이기연, 이상일, 이종악 동지등과 같이 취업한 후 폭탄제조기술을 습득하였다. 당시 이 공장 기사는 유태인계, 독일인계로 우리 한국독립운동자에게 대하여 최대의 호의와 경의를 표하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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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7년 6월 복건성 천주시에서 강남 25현민단편련처를 중국 동지 전망산과 조직하여 농촌의 자치 자위 조직운동을 전개하면서 복건전성의 일화배척 운동을 지도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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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은 1930년 만주로 건너가 독립운동의 토대를 닦기 위하여 공산분자 및 일경 주구들을 색출 처단하는데 주력했는데 이 때문에 북만주일대에 걸친 일경의 대수색이 벌어지므로 다시 이듬해 5월 상해로 철수하였다.(일본이 만주사변을 야기시키는 준비로써 대수색을 하였음
)

○ 무력항일 투쟁전개


선생은 1931년 9월 만주사변이 돌발하자 한(韓), 중(中), 대(坮) 연합 항일 구국연맹을 상해에서 결성하고 한국대표로 참가하였으며, 이듬해 2월 제1차 상해사변이 발발하자 항일구국연맹의 별동대를 조직하여 수사관 파괴, 요인 암살 등을 지휘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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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은 이 해 5월에는 사상계몽단체로 남화한인연맹(南華韓人聯盟) 남화 한인소년연맹을 조직하여 지도함과 동시에 백범 김구 선생과 모의하여 서간단을 결사 매족 일주구 거두급의 숙청을 기도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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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은 또한 이 해 9월에는 동지 우당 이희영과 같이 중국 노동자 이석중을 소개하여 장학량에게 주안한교에서 무기를 공급하여 항일세력을 확대하기를 교섭 확약을 받아냈다. 이듬해인 1933년에는 상해에서 구국연맹 행동대를 강화하여 일경주국 숙청에 참획하였는데 선생은 당시 주중대사 유길(有吉)을 암살하기 위해 동지들과 모의한 바 거사직전에 원심창, 백정기, 이강훈 세 동지가 일경에 체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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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에 일제 전위주구인 상해 민단장 이영로를 암살하였는데, 엄형순은 사형을 당하고 동지 이규호는 무기형으로 재감중 해방과 더불어 출감했다.그 후 1934년부터 1937년 9월까지는 강만입달학원을 중심으로 한(韓), 중(中), 대(台) 각국 청년들의 노동운동, 농민운동자 양성에 전력하다가 그 해 10월의 노구교사건이 중일전쟁으로 전면 확대되어 제2차 상해전쟁이 일어나자 행동대를 동원하여 일군 수송로 파괴공작을 획책 지휘했으며 동년 11월말에 안휘성 남부 상요지방으로 운동근거지를 이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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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전기간중 한 합동유격대를 조직하여 안휘, 강서, 복건, 호북 등 각성에서 유격전으로 전전하면서 적군중에 편입되어 있는 소위 한인 학도병 유출공작을 지휘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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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은 1938년부터 1944년까지의 사이에 남화연맹원 동지들로 하여금 전시공작대를 조직하니 그 목적은 중일전쟁에 있어 자유중국은 물론이요, 영미연합국에 대한 측면방조를 목적 함이었다. 일대는 이하유, 박기성, 나월한 등 수십 명 동지로 편성하여 서안에 주재하고 소위 학도병으로 일군에 가담하였던 한국 청년의 귀순공작을 전개하여 그 수가 천여 명에 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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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대(一隊)는 선생 자신과 오산 이강외 십여 동지로 편성하여 가지고 당시의 전방 강서성 상요현에 주재하면서 영미연합군의 공군사령관 '쇼유'와 합작하여 일본군 점령지구간에 압류되어 있는 구미인 포로 구출공작과 한국인 학도병의 귀순공작을 전개하니 그 성과가 지대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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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조국이 해방되자 선생은 그 해 10월 상해로 귀환하여 각지에서 상해로 집중 귀환하는 다수의 동포들을 안전하게 보살피기도 하였다. 1946년 상해에서 거류민단장 및 인성학교 이사장에 취임한 선생은 이듬해에는 다시 중국 세계학사의 일부분으로 창설된 신채호학사 이사장에 취임했으며 1948년 귀국하였다가 동년 가을에 중국 동지들과 연락차 다시 상해로 들어갔는데 49년 중공이 전 중국을 석권하는 바람에 귀국의 길이 막혀 중국 정부와 같이 대만으로 철수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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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은 54년 홍콩을 경유하여 귀국한 후에는 55년에 이을규, 오남기,한하연 등 동지들과 사회문제연구회, 자유인협회 등을 조직하여 56년에 민주사회당 준비위원회를 결성하고 대표위원이 되었다. 정치 일선에 나섰던 선생은 그 후 한국민주사회주의 연구회 의장(64년)을 역임하고 73년에는 민주통일 당 최고위원에 취임했으며, 동당 고문에 추대(78년)되기도 했었다
.

저서로는 선생이 타계한 후 선생이 남긴 회고록을 정리하여 정화암 저로 1982년 9월에 도서출판 자유문고 발행으로 「이 조국 어디로 갈 것인가」를 발간하기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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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머리에 정화암 선생 묘비건립추진위원회 최갑룡 위원장은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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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머리에 제목을 '이 조국 어디로 갈 것인가'로 붙인 것은 화암이 일평생 조국을 위하여 헌신한 나머지 오늘날의 분단된 조국의 비극을 보고 자나 깨나 중얼거리며 눈물 어린 말을 하던 것을 생각하여 그렇게 정했다. 너무나 마음아픈 이야기다. 이 원고는 1966년 9월 이후 녹음테이프로 된 것을 화암 입회하에 이병익이 편성 청서하고 다시 이상준이 재정리하였으며 편집과 교정은 이준영 윤연빈이 했다. 이 책을 출판하는데 수 많은 인사들의 후원이 있었다. 일일이 방명을 기록하여야 할 것이나 편집위원회에서 하지 않기로 결정하였기 때문에 생략한다. 」


그리고 선생의 묘소는 경기도 양주군 장흥면 일영리 신세계묘원 묘좌이다. 또한 화암 정현섭 선생 묘비의 비문은 다음과 같다.
「조선왕조의 오백년 사직이 육침된 후 근화세계의 양춘일맥이 서곡이 합주를 되찾을 때까지 인인지사가 수지치인을 지향함에 있어 자타의 공인을받은 분이 화암 정현섭 선생이다. 선생은 일찌기 전북 김제에서 태어나 서예와 한묵의 가업을 계승하던 중 신구의 이질적인 사상과 문물이 허다한 갈등과 모순을 드러내면서 이의 규합을 시도할 무렵 망국의 사의를 딛고 궐기한 3·1독립운동을 계기로 지사호객들이 국내외에 걸쳐 각자의 책무와 소임을 수행하던 때 결연히 구국의 웅지를 안고 조국광복의 일익을 담당코자 양기탁 등과 협조하여 조직한 독판부의 국내조직망을 포진으로 일본관헌에 탐지되어 1921년 중국으로 망명, 중국무정부주의자들과 제휴하여 대일영총파업을 지휘하고 이화영, 백정기, 이을규, 유자영 등과 같이 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을 결성하여 기관지 '정의공보'를 간행했으며, 김좌진장군이 피살된 후 북만에 잠입 활약중 김종진, 이준근, 김야운 동지를 잃고 일군의 대수색작전에 직면하여 간 일발의 위기를 벗어나 상해로 철수,남화한인연맹을 조직하고 만주사변과 상해사변이 일어나자 항일구국연맹을 결성한 후 동 연맹 행동대인 흑색공포단을 편성하여 일본기관 파괴, 요인암살 등을 지휘, 1933년 주중일본공사 유길명을 암살하려다가 백정기(무기형 옥사), 이강훈, 원심참(장기형)이 체포된 후 계속 일제주구 숙청을 결행하다가 1935년 엄형순(사형), 이규호(장기형)가 체포되자 백범 김구와 협의한 후 서간단을 조직하여 일제에 대항하였다.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이강, 이하유, 박기성, 나월환 등과 한중합동유격대와 전시공작대를 조직하여 일군 수송로 파괴, 연합군 포로구출, 한인 학도병 탈출공작을 전개하여 지대한 성과를 거두었다
.

8.15 해방 후에는 상해 거류민단장과 인성학교 이사장으로서 교포의 구호와 교육에 주력하고 중국 원로 오취휘, 이석중, 주세, 양가락, 한인동지 이하유 등과 조선학전관 신채호학사를 설립하여 한국학연구의 길을 트고 교포들의 자주와 승문사상 계몽에 주력하였다. 1954년 귀국하여 1956년민주사회당을 발기 1961년 통일사회당 정치위원에 취임하였다. 5.16군사쿠데타로 옥고를 겪었고, 1973년 양일등, 김홍일, 윤제술, 장준하 등과 민주통일당을 창당하여 최고위원과 상임고문으로서 반독재 민주회복 투쟁을 벌이는 등 여생의 일각까지 청렴고고한 지조를 지켜오시다가 1987년 1월21일 홀연히 급서하시니 향년 86세이다. 선생의 휘는 현섭, 자는 윤옥,호는 화암이며, 본관은 동래이다. 1896년 9월 16일 휘 환전공과 훤당 강씨의 장남으로 출생하였으며 아들 철제, 딸 정원과 중화, 손 명덕과 영덕이 있다. 묘소는 경기도 양주군 장흥면 일영리 신세계 묘원 묘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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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호라, 선생의 생애는 의협선행과 솔선궁행으로 처사모의를 물리쳤고 의분과 혈투로 얼룩진 장엄한 쾌거들은 산하를 진동시키고 귀신도 감루를 흘리게 하였으니 그 공적은 백척풍비로도 다 표현할 수 없으며 더욱이 중국의 석학들과 한국학을 창설하고 국내 정계에서 끝까지 고결한 자세로 일관하였으니 언무수문의 일단과 세한 송백의 기상을 길이 풍기고 있다. 」


순여 안재준 선
안동 김응현 서
1982년 4월 7일
정화암 선생 묘비 건립위원회 건립

일생을 조국광복에 바쳤던 선생은 1981년 1월 서울에서 86세를 일기로 작고했다.

* 출생지 : 김제시 장화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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