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한조(鄭濕f朝)

  • 관리자
  • 2019.01.08
  • 1365
독립운동에 몸 바친 정 한 조(鄭濕朝)(1890년 ∼ 1945년)
 
* : 하몽(何夢)
* 출생지 : 김제군 백산면 상정리 요교


선생은 1890년 8월 1일에 김제군 백산면 상정리 요교에서 태어났다.
동래 정씨이며 호는 하몽(何夢)으로 동래 정씨 3대파(三大派)의 하나인 대호군(大護軍∼高麗末)의 18세 손이다
.

요교마을은 조선왕조 말엽에 호남삼걸의 한분인 거유 이정직(李定稷) 선생의 출생지이기도 하여 석정 선생의 사숙이 있었으며 인근 각지에서 많은 문하생들이 모여들어 학문을 닦고 있었다. 여기에 선생도 예외는 아니었다. 온후한 성품에다 어려서부터 총명한 재질은 그로 하여금 석정 선생의 문하생으로 입문케 한 것이다
.

선생의 뛰어난 향학열은 나이 18세에 이르러 사서삼경을 통달하였다. 이때 석정 스승으로부터 좋은 교훈을 받았다."구학문(舊學間)만 배울 것이 아니라 새로운 문명을 배워서 이 나라의 동량이 되어야 한다. "는 가르침을 받고 우국충정(憂國哀精)에 불타있던 선생은 비상한 각오로 상경하게 되었다.선생은 경성 공업전수학원(京城工業專修學院)에 입학하여 신진 학문을 닦았으며, 1918년에 충남 공주에 있는 공업실업학교 교원으로 생활하게 되었다
.

선생이 그동안 생각하고 있던 독립운동은 이때부터 시작되었다. 행동으로 또는 말로써 학생들에게 배일사상을 고취시켰다. 그리고 조국 광복을 위해 애국 애족 독립정신을 기리는데 여념이 없었다
.

동지로서는 박상진, 장현식, 채기중, 박재홍 등과 뜻을 같이 하여 오던 중 1919년 3월 1일 만세운동 당시 선생은 직장이 있는 공주를 기반으로 충남일대를 무대로 활발한 운동을 전개하다가 마침내 왜경에 체포 구속되어 공주형무소에서 3년을 복역하고 나오니 요시 찰인으로 주목을 받게 되어 혹독한 왜정치하에서의 교직생활은 끝장을 보게 된 것이다. 그래서 선생은 다방면으로 생각한 끝에 안주 삼례로 이사를 했다
.
그리고 자유직업인 조선일보 삼례지국을 운영하기에 이르렀다. 신문사를 운영하면서 초지를 굽히지 않고 다시 독립운동에 들어갔다. 동지를 규합하는 한편 청년회 신간회를 조직하는가 하면 노동조합을 조직하고 조합장이 되어 노동자의 권익보장을 위하고 단결을 목표로 계속 활약을 하여 오다가, 비밀리에 노구교 사건에도 많은 힘을 보탰다
.

1931년 만보산 사건 발발 당시에는 선두에 서서 삼례에서 제1차로 투쟁의 전위대로서 들고 나섰다.이 때문에 얼마후 선생은 왜경에 체포되어 대구 형무소에서 3년동안 옥고를 치루고 나왔다. 이로부터 더욱 요시찰인으로 주목대상이 되어 어디를 가나 형사들이 따라붙어 다니는 바람에 행동에 완전 구애를 받게 되었다. 왜경의 고문과 옥고에 몸은 쇠약해졌으나 정신만은 살아 있어 굴하지 않고 "우리 한국인은 단결해야 빼앗긴 이 나라를 찾는다. "는 굳은 신념 아래 다시 이리(裡里)로 옮겨왔다
.

선생은 이리로 옮겨오자 바로 노동조합을 조직하고 노조 사무실 옥상에 '단결'이란 검은 두 글자를 높이 붙이고 역시 조선일보 이리지국을 경영하면서 각계의 동지들을 비밀리에 규합하여 한편으로는 조선일보 지면을 통하여 일반 대중들을 계몽 격려하였고, 나아가서는 재만동포옹호위원회(在滿 同煦雍讀委員會) 위원장과 청년 회장직을 맡으면서 맹활동을 하였다. 이렇게 되자 왜정에서는 선생을 호남지구 사상 관찰소(思想觀察所)의 제1호 요시찰 인물로 지정하고 항시 연금 상태로 감시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왜경은 수시로 소환하여 고문하고 아니면 예비접속이란 명목으로 빠지는 날이 없이 날마다 호된 곤욕을 주었다
.

선생은 왜인들의 간악한 고문과 기나긴 옥살이로 몸은 허약해졌고 정신적으로도 심한 고통을 받았으나, 한 치의 흐트러짐이 없이 평생을 독립운동으로 몸 바쳐 활약하다가, 끝내는 8.15 광복을 목전에 둔1945년 4월에 57세를 일기로 아깝게도 타계하고 말았다.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