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인(鄭 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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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9.0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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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말 전공(戰功) 큰 양헌 정 인(鄭 仁)
 
공의 본관은 동래(東菜)이며 호는 양헌으로 고려 공민왕 때 사람이다.

상서 좌복사 목(尙書 左僕射 穆)은 공의 선조이며, 검교태자 첨사 숭은 증조부이며, 자침부사 지형(資瞻訓事 之衡)은 조부이고, 예문관 응교 승보는 바로 윗대이다. 공의 관직이 고려 공민왕 때에 대호군 도지휘사(大護軍 都指揮)였다. 그래서 삼대파(三大波)의 하나인 대호군공파로 불리우게 된다
.

공은 총명하고 강직한 성품으로 충성되고 곧은 행실과 슬기롭고 높은 재질에 문장과 무사(武事)에 모두 뛰어났다. 고려사에서 살펴보면 공민왕 5년 5월에 강릉 교주도 도지휘사(江陵交州道 都指揮使)가 되어 공이 세운 전공(戰功)은 나라를 지킨 혁혁한 일대 수훈으로 전한다
.

때는 고려말엽(공민왕)으로 나라 안은 어수선한데 동해안에서는 왜구의 침입이 빈번하고, 또한 함경도 국경에서는 여진이 쳐들어와 그 힘이 산을 누르는 듯 강성해서 백성의 마음이 물 끓듯 어지러워 갈팡질팡 갈피를 못잡는 등 나라가 위태로움에 처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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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 공은 뛰어난 용병술로 군사들의 사기를 앙양시켜 우뢰같이 기세를 올렸다. 그리고 기묘한 책략으로 여진군을 재기불능으로 격파하니 시체는 산을 이루었고 잔도들은 혼비백산하여 도주하였다. 바다의 왜구와의 싸움에서도 선생은 두번이나 대승을 거두었다. 이에 왜구들도 침범의 의욕을 잃고 패주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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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진을 대파하고 두번 왜구를 격퇴시킨 승리의 위세는 조정에 떨쳤다. 그래서 백성은 편안하고 나라는 안정을 되찾게 되었다.공은 연로(年老)해서 벼슬을 그만 두고 벽골(碧骨∼金堤) 호숫가로 물러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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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쪽 산에 올라 나물을 캐고 동쪽 뜰에서 국화를 가꾸며 곧고 거룩한 뜻은 한결같이 글을 읽어 즐거움을 삼고, 후배를 가르치며 스스로 빛을 깎고 감추어 자취를 숨겼다.공의 빛나는 공적이 청사에 이르렀으나 이러한 공의 겸손한 기풍과 절개가 본보기가 되어 후세 사람들이 김제군 백산면 흥사리에 승방원(承芳院)을 세우고 배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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