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덕명(金德明)

  • 관리자
  • 2019.01.08
  • 1936
동학의
대접주이며 동학혁명군 총참모
김 덕 명(金德明) (1745년 ∼ 1875년)
 
○ 자 :덕명(德明)
○ 호 :용계 (龍溪
)
○ 출생지:김제군 금산면 쌍용리 용계


동학의 대접주였던 용계 김덕명은 1895년(헌종 11년) 10월 29일 금구 용계에서 태어났다. 현재 금산면 쌍용리 용계인데, 일설에 의하면 금산면 삼봉리 거야에서 태어났다고도 한다.그러나 김덕명의 동생 인상(寅相)의 손자 병욱(炳旭) 옹의 증언에 의하면 김덕명 대접주는 용계에서 태어나 용계에서 동학혁명을 지도했다는 것이다. 후일 김덕명 대접주의 장남인 홍구(洪九) 어른이 비로소 거야로 이사하여 살았다는 것이다.
아버지는 김한기(金漢驥)요, 어머니는 파평 윤씨이며, 이름은 준상(峻相)이요, 자는 덕명(德明)이다. 동학교문에서는 한때 필상(弼相)이란 이름으로 불렀으며, 호는 용계(龍溪)이며, 본관은 언양 김씨이다. 동생 한분이 있었는데 이름은 인상(寅相)이고, 호는 해산(海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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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은 7세가 되자 얼굴은 준수하고, 키가 컸으며, 심성도 관후하고, 총명이 또한 출중했다. 부친께서 이해 9월 9일 부터 훈장을 정하여 글공부를 시켰는데 한번 들으면 다시 묻는 일이 없었다고 한다. 1862년 8월 10일에 10년간의 글공부를 마치니 나이 18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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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문을 쌓아 식견도 넓혔거니와 담론도 유창하였고, 기골이 장대하며 서글서글한 눈은 사람을 위압하는 감을 주어 장수감이라 했다.당시 전라도는 다른 지방보다 탐관오리들의 행패가 심하여 젊은 용계장의 가슴에는 의분이 끓어 올랐다. 세상 인심을 살피기 위해 자주 집을 떠나 출입하게 되었으며 부패한 이 나라를 구제할 길을 찾는데 심혈을 기울이게 되었다. 낡은 질서가 부패할대로 부패하여 세상 구제가 도저히 불가능한 것을 알게 되자 용계장은 변혁의 뜻을 품고 새길을 모색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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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학교문(東學敎文)에 입도


용계장이 나이 42세 때인 1886년에 이르러 전라도 지방에 동학이 널리 포교되고 있었다. 세상을 개벽하고 보국안민(輔國安民)하자는 동학의 새로운 주의를 접하니 뜻이 통했다. 그 해 10월 11일에 경상 도 상주땅 화령 근처에 있는 전성촌(前城村, 앞재) 으로 해월신사 최시형을 찾아가 도를 받게 되었다. 11월에는 동생 인상인 해산장도 입도하였다. 이듬해인 43세 1887년에는 원평에다 동학의 도회소(都會所)를 설치하고 포교에 힘썼다.

당시 동학은 최초로 육임소(六任所)를 보은 장내리에 설치, 전국적인 포교활동을 지도하고 있었으며, 전라도는 좌도와 우도로 갈라 좌도에는 남계천, 우도에는 윤상오를 편의장(便義長)겸 도접주로 정하고포교활동을 하였다. 태인에 김개남, 시산에 김낙삼, 무장에 손화중, 전주에 서영도, 부안에 김영조 등 16개 포(包)가 조직되어 뿌리를 내려가고 있었다. 그 중에서도 제일 활발했던 곳이 김덕명 어른이 활동하고 있는 금구, 원평 지역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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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월신사(최시형)는 포덕 25년 (1884년)에 익산 금마면 사자암에서, 포덕 29년(1888년)에는 전주에서 직접 종교적 수도를 지도한 바있으며, 포덕 32년(1891년)에는 호남일대를 순회지도하며 한편으로 육임첩과 접주첩을 차출해 주기도 하였다.특히 6월에는 태인 산외면 지금실에 있는 김기범의 집에 들려 상당 기간 유숙하면서 지도하였다. 이때 김덕명과 김개남 대접주는 여름옷을 각각 다섯 벌씩 만들어 드리는 등 해월신사(최시형)와의 사제지의를 돈독히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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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해 봄에 전봉준 장군도 동학에 입도하여 김덕명 포(包)에 속하게 되었다.6월에는 해월신사로부터 접주의 임첩을 차출 받아 고부 접주가 되었다. 당시 김개남 대접주는 산외면 일대와 임실지역에 뿌리를 내렸고, 손화중 대접주는 정읍 일부와 고창 일대에 교세를 뿌리내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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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구와 태인 일부, 고부 일부는 김덕명 대접주의 관내 포에 속해 있었다. 주산의 최경선도 역시 김덕명포에 속해 있었으며, 호남에서는 김덕명 포가 제일 가는 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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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정과 교조 신원운동


교조 대신사 최제우의 억울한 순도의 원한을 풀어 달라는 동학교도의 신원운동은 포덕 12년(1871년)에 영해에서 처음 시작되었다. 그러나 엄청난 희생으로 계속하지 못했다가 충청도 지역과 호남지역에 교세가 확장되자 비로소 재개하게 되었다.

포덕 33년(1892년) 10월에는 공주에서 11월에는 전라도 삼례에서 각각 신원운동을 벌였다. 11월 1일부터 10일까지 삼례역에 천여 교도가 모여 일으킨 교조 신원운동은 대단했다. 탄원서를 올린지 5∼6일이 되어 전라감사가 회답을 하여 왔으나 신통치 못하자 금구, 원평의 김덕명포는 교도들을 만여 명이나 동원하여 압력을 가했다. 김덕명 포의 동원력은 이처럼 대단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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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듬해 2월에 서울 광화문에서 벌였던 교조 신원 복소 때도 금구,원평에서 상당한 교도들이 상경하였다. 그리고 3월 10일부터 4월 2일까지 보은 장내 리에서 개최된 대집회 때에도 전라도에서 3월 23일경에 1만여 명의 교도가 참가하였다. 이때 전봉준 장군은 식량을 공급하는 운량도사의 책임자로 참가했다. 이 때에도 김덕명포에서 많은 식량을 염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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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 30년 승정원 일기에 보면 전라감사 김문현이 제수를 받고 입시했을 때 고종이 "금구에 동학당이 가장 많다 하는데‥‥ 먼저 그 소굴을 소탕하라."고 했다. 김문현은 "30리 가량 떨어져 있는 금구, 원평에 과연 동학당들이 많이 있습니다. "라고 대답하였다. 중앙정부에서도 우려할 만큼 원평에는 동학교세가 대단했으며 원평은 바로 김덕명포가 관할하는 지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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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일 전봉준을 동학대장으로 추대하고 수천에 달하는 정예부대를 편성케한 것도 원평을 중심으로 한 김덕명 관내 교도들이 참여했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한다. 김덕명 대접주(포덕 34년 3월 16일에 보은 장내에서 금구 대접주로 임명됨)는 원평을 중심으로 교세를 확장 호남지역의 동학 중심지로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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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혁명과 김덕명 대접주


포덕 35년(1894년) 1월 10일 전봉준 장군이 일으킨 고부민란 이후각지의 동학교도들은 봉기할 기세를 보이고 있었다. 결국 3월 21일김덕명, 김개남, 손화중, 전봉준, 최경선 등 동학지도부는 백산에 모여 혁명의 깃발을 올리고야 말았다. 이때 김덕명 대접주는 오시영과 같이 총참모가 되었다 하는데, 이 총참모란 지금의 군제와 같이 대장 밑에 예속된 참모가 아니라 대접주로서 혁명군의 전술을 자문하는 참모역이다. 혁명 당시 50세였으므로 일선에는 거의 나가지 않고 원평에 자리잡고 있으면서 자문한 것으로 보여진다.

오시영의 동학사에 의하면 처음 백산에 모였을 때 전봉준과 기타 장령격으로 손화중, 김개남, 김덕명, 최경선, 김봉년, 김사엽, 김봉득, 유한필, 손여옥, 차치구 등이 참가했다고 하였다. 그 중 전봉준, 최경선,김봉년, 김사엽, 김봉득, 유한필 등은 김덕명포의 접주들이었고 오하영,오시영, 임천서, 강경중, 손경찬, 고영숙은 손화중포의 접주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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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덕명포에서 초기에 동원된 혁명군은 2천명이라고 한다. 4월 4일부터 군사행동에 들어 갔는데 「양호초토 등록」 4월 9일자에 의하면「동학도당 일대가 금월초 3일에 부안현 부흥역으로 이동하였으며, 4일 오시경에는 동학배 수천명이 원평으로부터 내도하여 본현에 이미 모여있던 사람들과 합세 동헌에 돌입했다. 」고 하였다. 전라우도 지역에는 손화중포의 동학군과 김덕명포의 동학군이 주력을 이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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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군은 4월 7일에 황토현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었으며, 4월 23일에는 장성 황룡촌 전투에서도 승리하자, 전주성으로 직행 4월 27일에 완전히 점령하였다. 다급해진 조정에서는 청국군의 출병을 요청하게 되었고, 일본군도 뒤따라 들어와 한반도에서 청일전쟁이 벌어지고 말았다. 이때 동학혁명군은 부득이 5월 7일에 관군과 화약을 맺고 8일에 전주성에서 철수, 53개 군·현에 동학혁명 집강소를 설치 폐정 개혁에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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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약기간 중 전봉준 장군은 김덕명포의 금구, 원평에 머물면서 전주인근 군·현, 남원에서 인근 군·현을 관할했고, 손화중 대접주는 고창,영광, 나주 등 서남부를 관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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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덕명 대접주의 판결문에 보면 「금구지방에서 취군성당하여 관고의 군물을 창탈하고 민간의 전곡을 겁탈하였다. 」고 했다. 금구지방에는 도소를 만들어 놓고 김덕명 대접주가 폐정개혁을 단행했음을 말해 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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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평에서의 최후 전투


일본군이 무력으로 이 나라를 강점하자, 9월 12, 13일에 삼례에서 남북 접회의를 열고 남북접 동학군 2만여 명은 동학혁명 운동을 재기하도록 하였다. 그리하여 10월 20일 공주성을 향해 진격했다. 그러나 막강한 일본군의 화력에 밀려 수십차에 걸친 우금치 공격에도 불구하고 후퇴하게 되었다. 노성과 논산에서도 패하여 11월 23일에는 전주를 거쳐 금구, 원평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약 3천명에 달하는 혁명군을 재정돈하여 25일에 일본군과 관군을 맞아 싸웠으나 역시 역부족이었다. 원평을 흐르는 강을 사이에 두고 남쪽 귀미란 언덕에는 동학혁명군이 진을 치고 있었다. 아침 9시 경부터 오후 4시 경까지 동학혁명군은 공격해 오는 일본군과 관군을 물리치기 위해 선전하였다. 「순무선봉진통록」 11월 26일 조에 보면 「천보를 사이에 두고 서로 총을 쏘며 싸웠는데, 손시부터 신시까지 총소리가 우뢰와 같았고 총탄은 비오듯 했으며 적은 산상에 있었고, 관군은 들에서 포위하고 쳐들어 갔다. 」고 했다.여기서 혁명군은 37명이 전사했으며 회롱총 10자루와 조총 60자루를 노획당했다. 이 전투에는 전봉준 장군, 김덕명 대접주는 물론이요, 의암 손병희·, 북접 통령도 참전했다. 원평전투의 패전으로 동학혁명 운동은 막을 내렸다.

김덕명 대접주는 이 전투에서 패하게 되자 모악산중으로 피신하였다가 조모의 산소가 있는 장흥리 안정사 절에 들어가 숨었다. 약 1개월간 여기서 은신하였으나 동리사람의 밀고로 이듬해 정월 초하룻날 태인 수성군이 급습하여 체포당하였다. 수성군은 김덕명 대접주를 체포하여 어깨에 굵은 나무를 가로 얹고 십자형으로 팔을 벌리게 한 다음 묶었다. 그리고 상투를 뒤로 젖혀 얼굴이 하늘을 향하도록 묶어 끌고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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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덕명 대접주는 결국 나주까지 끌려 갔다가 서울로 이송되어 진고개에 수감되어 재판을 받았으며 3월 29일에 교형으로 51세에 순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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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생인 해산 김인상도 1월에 체포되어 전주에서 27일 순도하니 형제분이 보국안민의 사회정의를 위한 혁명운동에 몸 바친 것이다.김덕명 대접주의 시신은 다행히도 원평으로 모셔와 체포당했던 안정사 동쪽 능선 위에 있는 조모 장씨묘 바로 아래에 모시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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