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태영(郭泰榮)

  • 관리자
  • 2019.0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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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9년 6월 26일 노혁명가 백범 김구 선생이 동족의 총탄에 쓰러졌다는 비보는 3,000만 겨레의 가슴에 충격과 비보를 던졌다. 당시 곽태영은 국민학교 5학년생이었다. 그의 숙부 곽경열씨는 상해 임시정부에 군자금을 조달하다가 3년 형을 언도 받았다. 곽태영은 이러한 숙부의 얼을 받아 의사가 되는 계기가 되었다. 백범 일지를 읽고 감명을 받았던 곽태영은 고등학교 3학년 때 효창 공원의 선생의 묘소에 참배하여 선생의 영전에 엎드리어 선생님의 추모식마저 베풀지 못하게 한 이 정권을 원망하였다. 그렇지만 이 정권은 무기 징역을 받은 안두희를 6.25와 함께 특사 조치로 석방하고 육군 중령 까지 승진시켰으며 여러 가지 특혜를 베풀었다. 선생은 대학시절에 4.19 의거에 앞장을 서서 경무대 앞의 위기도 다행히 모면되었다.

4.19후부터 줄곧 안두희의 행방을 탐지하려고 하였으나 6차에 걸쳐 이주 도피생활을 영위하므로 오리무중으로 되었다. 선생은 안두희가 거처하는 서울 숭인동 거소를 알아냈으나 직접 접근하기는 어려웠다.

1965년 12월 16일 안두희가 양구에서 군납업 공장을 경영한다는 것을 알고 전생은 잡상의 봇짐을 메고 행상으로 가장하여 경영하는 공장에 나타나 직공들에게 외상 판매로 접촉하여 안두희 집을 알아냈다.


그 해 12월 22일 상호 10시에 안두희 집 정원에서 안두희를 만났다. 선생은 이렇게 말하였다.

안 사장님, 나는 이웃에 사는 사람인데 잠깐 이야기 좀 할 수 있을까요. 이 때 이상한 눈치를 채고 뒷걸음질하며 도망가려고 하길래 벼락같이 달려들어 안두희 의 멱살을 휘어잡고 나는 정의의 사도이다. 백범 김 구 선생을 살해한 배후를 거짓 없이 밝혀라. 이렇게 선생은 힘주어 말했다. 그러는 순간 안두희는 유도와 당수로 선생을 넘어뜨렸다. 그 때 전생은 위기를 모면하는 방법으로 칼(잭나이프)을 소지했는데 이 칼로 일격하였다. 그러나 안두희의 유도의 기술로 선생은 되fp 역습을 당하였다. 땅바닥은 피투성이였다.



이 사건으로 인하여 1966년 7월 30일 서울 고법에서 3년형을 언도 받았으나 집행유예로 석방되었다. 이 때 의혈 청년 곽태영 에게 관용을 베풀어 달라고 60만 명이 진정서를 올렸다.



선생은 김구 선생 기념사업협회 상임이사로 있었으며, 남산 야외 음악당에 세워진 백범 김구 선생의 동상 건립을 하는데 실질적 공로자이다. 선생은 수년간 한국을 떠나 대만 국립대학원에 유학의 장도에 오른다.



선생의 본적은 김제군 진봉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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