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영(朴廷榮)

  • 관리자
  • 2019.0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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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티재(能峙)의 충절 박 정 영(朴廷榮)(1559년 ∼ 1592년)
 
* 자 : 효화(孝華)
* 호 : 신촌(薪村)
* 출생지 : 1559년 김제시 흥사동 제내에서 태어남
1592년 7월 8일 굴지당 박석정 선생과 함께 곰티재에서 전사

선생은 밀양(密陽) 박씨(朴氏) 문경공 정제 휘 의중(文敬公貞齋 諱豈中)의 7세 손으로 아버지 장릉참봉 구용당공 휘 이(莊陵參奉 九蒸堂公 諱 醮)와 어머니 탐진(歌津) 최씨(崔氏) 사이에서1559년(조선 명종 14년)에 태어났다.

선생은 아버지와 꿈에 포은 정몽주 선생을 보고 지었다는 선죽정(善竹亭)에서 재종숙(再從叔)인 굴지당 박석정에게 글을 배워 11살 때 벌써 주역(周易)을 알고 경전(經傳)과 술수(術數)에 밝았다. 뿐만 아니라 효성 또한 지극하여 내간상(內艱喪)에 1년간, 외간상(外疑喪)에 3년간을 무덤 곁에 움막을 짓고 살며 지극한 정성으로 섬겼다.그러다가 선생의 나이 34세 되던 해인 1592년(선조 25년)에 임진왜란이 일어나 나라가 바람 앞의 등불처럼 위태로운데 그냥 보고만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한 선생은 재종숙(再淮叔)인 굴지당 선생, 김제수령 정담(鄧湛) 등과 뜻을 모아 굳게 맹세하고 곳곳에 격문을 띄워 의병(義兵)을 모았다. 이렇게 해서 모인 의병이 300여 명에 이르렀다.

선생은 싸움터로 출발하기에 앞서 아들 간(保)에게 유서를 남겼다. 이미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치기로 작정한 것이다.

「임진년 병화(壬辰年 兵火)가 인축방(寅丑方)에서 일어나니 이곳 비산비야(非山非野)에서는 설(薪)을 많이 쌓아 놓은 곳이라야 생명을 보호(保護)할 것이나 너의 수(數)는 정미방(丁未方)이 생기방(生氣方)이라 병화가 들어 오지 않으니 목성인(木性人)이 살 땅이라 하며 내가 전날에 남몰래 곡식(穀食) 수십석(數十石)에다 소금물을 섞어서 안 벽(壁)에 바르고 겉으로는 담을 싸서 두간 집을 지어 여막(廬幕)이라 이름하고 방안은 웅덩이를 파고 그곳에서 거처(居處)토록하고사방(圖方)에는 설을 쌓아 두었으니 능히 세 사람은 지낼 수 있을 것이니 낮에는 그 속에 들어가 숨어서 살고 밤에는 나와서 쌀가루를 물에 타서 먹고 지내며 선조(先祖)들의 교지(校旨)는 재종제(再從第)집에 갖다 두고 우리 직계(直系) 할아버지들 교지와 내가 평소 쓰던 책들을 잘 간수하여 잃어버리지 말라.」

이와 같은 유서를 남긴 선생은 곧바로 의병들을 이끌고 도원수 권율장군을 만났다.
「장군! 적(散)이 우리 보다 먼저 곰티재(熊峙)나 배티재(梨峙)를 넘으면 선봉(先峰)을 막기 어려우니 나주판관 이복남(羅州判官 李福男)과 선천부사 김진태(宣川府使金振兌)와 서로 힘을 합(合)하여 먼저 곰티재와 배티재를 점령하여 남(南)쪽으로 오는 선발대를 꺾어야 합니다.」 하고 선생의 생각을 아뢰니 권율 장군도 허락하며 크게 칭찬하였다.
그 해 7월, 선생은 곰티재에 이르러 미리 진을 치고 있었다. 마침내 왜적들이 몰려왔다. 선생은 물밀듯이 밀려오는 왜적을 맞아 다리 위에서 크게 싸움을 벌였다. 왜적들이 썩은 고목 쓰러지듯 쓰러졌다. 선생은 쓰러진 왜적들의 머리를 베어 말안장에 싣고 적진을 헤쳐나갔다. 놀란 왜적들이 겁을 먹고 후퇴하였다.

그 이튿날 다시 싸움이 계속되었다. 전날 싸움에서 혼쭐이 난 왜적은 더 많은 병력으로 조총을 쏘아대며 몰려왔다. 선생은 다시 죽기를 무릅쓰고 싸웠다. 그러던 중 불행히도 굴지당 선생의 손에 총알이 박히고 말았다. 굴지당 선생은 남은 한 손으로 조금도 굽힘없이 싸우다 장렬히 전사하고 말았다. 이를 본 선생은 눈에 불이 일었다. 그래서 더욱 사납게 왜적을 무찔렀다. 그러나 호랑이처럼 사나운 선생도 워낙 많은 왜적들에 둘러싸이니 당해낼 수가 없었다. 결국 큰 뜻을 펴지 못한 채 장렬한 최후를 맞았다. 이 날이 1592년 7월 8일이었다.선생이 순절(殉節)하기 전의 일이다. 그러니까 곰티재에 진을 치고있을 때다. 선생의 고향 집에서 의논할 일이 있어 선생을 찾아갔다. 그러나 선생은 만나 주지 않고 인편에 시(詩) 한수를 적어 보냈다.

「뜰 앞에 대나무는 별일이 없느냐(庭畔善竹無恙否) 멀리 고향산천을 바라보니 옛집이 그리웁고나(遙望家山桑帶含情) 밤하늘을 쳐다보고 눈물 적시노니(仰擔北斗涕 泣滿襟) 달빛만이 산중에 가득한데 몸은 지쳐있네(晧白月空城勢窮力彈) 도적을 물리칠 계책이 없네(御寇無策) 일편단심 다만 한 목숨 바쳐 나라에 보답하는 것 뿐이다. (-片丹心只有一死宇報國而己)」이 얼마나 눈물겨운 충절인가. 이 사실을 안 선조 임금은 선생에게 신촌(薪村)이라는 호를 내리고, 예관(禮官)을 보내어 선생의 선산인두악산(斗岳山) 서쪽 기슭에다 그 넋을 불러 장사지내는 한편, 「아아 슬프다. 지난 일이니 후회한들 무엇하리(嗚呼惜哉待者不悔). 외로운 혼만이 산에 남아 후인들을 경계하도다(孤魂栖山未者可戒). 산골짜기에 물소리만 저승과 이승을 어지러이 맴돈다. (奈谷流源脚明紛亂). 늠름한 기상이 크게 뛰어나니(凜然招群) 명문의 집안에 은혜가 길이 빛나리.(聲明華闖恩澤添矣)」라는 제문을 지어 위로하고 증통훈대부 승정원 좌승지겸경연참찬(贈通훈大未承政院左承旨兼經筵參叢)이란 벼슬까지 내리었고, 배티재(梨峙)에 선생과 굴지당의 대첩비(大捷碑)를 세웠다.

선생은 아들과 딸 남매(男妹)를 두었으며 유고(遺稿)로는 ·신촌유고라 하여 유서(遺書)와 맹약문, 격문, 가서(盟約次, 樵間, 家書) 등이 있다.
맹약문(盟約次)과 격문(機丈)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맹약문(盟絢責
)

「아아 슬프다. 나라가 액운을 만나(嗚準邦國丁厄運之會)적병이 일어난지 두어 달만에(賊起數月之問) 서울, 개성, 평양이 놈들이 수중에 들어가고(三京 失守) 임금님은 피난가니(大駕播遷) 200년 사직이 거의 빈터만 남고(二白年社稷幾至丘墟之歎) 삼천리 인민들이 고기밥의 화를 면치 못하리(三千里生靈未免魚肉之禍) 강산에 대하여 부끄럽고 옷 입고 다니는것 마저 욕되도다. (誠山河之叢衣冠之辱) 이를 생각하면 오장이 뒤틀린다. (言念及五內瑪越) 일국의 어지러움은(呼一國之患) 임금님이 욕보는 것 같이 큰 것임이 없거늘(莫大於君父초辱) 임금님의 욕됨이 오늘날과 같이 큼이 없으니(君父之辱莫大於今日) 오늘의 신하된 자 진실로 힘껏 싸워 죽도록 싸워서(爲今日臣民者固當奮忠死義) 놈들의 소굴까지 쫓아가 임금님의 욕됨을 설욕함이 옳으니라.(敵工所愾以雪君父之辱可也) 오직 나와 뜻을 같이하는 이는 죽음을 무릅쓰고(惟我同盟之人效死勿貳) 아무리 어려워도 이 나라를 평정하여(赴湯蹈火殲夷大亂) 이름을 국사에 남기도록 하자. (乘名竹帛) 만일 그렇게 하지 않는 자(如所否者) 천지 신명이 용서치 않으리라.(有如皇天后土
)

격문(檄文
)

「하늘이 재앙을 내리어(皇天降災) 서울, 개성, 평양이 불타버리고(三京俱入於灰爐之中) 섬나라 왜놈들이 난리를 꾸미어(島夷作亂) 팔도 지역이 거의 점령될 지경이니(八城幾至岺傾覆之際) 이것이 운명이냐. 참으로 가련하기 이를데 없구나. 다행스럽게 윤리는 하늘에 닿도록 끊어지지 않았으니 군신의 의리 중한지라(君臣之儀重) 저같이 강적이 모두 쓸어버리니(噫彼勁敵卷席長驅) 사람의 피해는 크고 임금은 피난하였으니 뉘라서 분개한 마음이 없을소냐(敦無愾之志) 맨주먹으로 의롭게 일어남이 어찌 살기를 바랄 수 있을까마는 가만히 앉아서 당하는 것 보다 싸움터에 나가서 싸우다가 죽는 것이 이 얼마나 옳고 참됨인가(當死野邊赤可尙守馬援之志) 하물며 이 호남은 나라를 보전하는 근본이며 저 전주지방은 왕업을 일으킨 옛터니라(邦豊辯與王之舊墟) 여러분은 내가 돌리는 격문을 보고 뜻이 있는 이는 자기 본연의 직분을 잊어버리지 말고(廳我羽檄志士不 在溝堅 勇夫不喪其元) 나라가 위험에 처해 있을 때(當此君父危難之際) 산이나 골짜기에 숨어 있지만 말고(胡爲山谷隱돈之計) 당당히 나서서 의리와 예의에 밝은 나라 사람 답게(以君當當衣冠禮義之邦) 어찌 금수 같은 놈들의 꼴만 보고 있을소냐(忍見蠢蠢夷驗禽獸之辱) 나라 전체간 죽음을 당하며 종묘사직이 없어질 일이니(屠戮邦畿誤警宗社) 같이 살 수 없는 원수놈들이라 고을마다 샅샅이 뒤져(不共載天之離滄壞邦縣) 사람들을 죽이니 어찌 뼈까지 아픔이 없을손가(殺害人民孰非刻骨之痛) 우리 군인들이 비록 수는 적으나 절의에 일어선 우리이니(我軍雖衆枕節扶義) 물과 불을 가리지 않고 공을 세우기로 마음 먹으면(莫辭湯火預期之功) 저 도적놈들의 수가 많다 한들 천도를 어긴 놈들이니(彼賊雖衆逆天違道) 싸우기 어렵지 않으니 놈들은 반드시 패할 것이 보이니(無難衡業必見敗亡) 더러운 먼지 바람을 씻고 임금님의 옛터를 다시 찾아(掃除醜類之風塵克復聖朝之舊業) 이름이 국사에 길이 남아 백세까지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 (永垂名於靑史共流芳守百也) 시기는 얻기 어려우나 잃어버리기는 쉬우니(時難得而易失) 때를 놓치면 다시 쫓을 수 없으니(事己過而莫進) 나와 같이 뜻을 같이 하고 힘을 같이 할 사람이면(如有與我同志同力者) 빨리 날 따름을 어기지 말고(斯速指日) 칼과 창을 들고 오시라.(枕劍杖戟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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