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 투사 곽경렬은 1901년 김제군 진봉면 남상에서 곽덕수의 3남으로 태어났다.
1915년 15세의 어린 나이로 박상진(朴尙鎭)을 총사령으로 하는 광복회의 일원이 되었는데, 이 활동 체계가 국외와 국내로 분리되면서부터 한훈, 유장렬을 따라 전라도일대 에서 활동하였다.
선생은 한인 반역자를 수시로 그리고 어느곳에서나 처단하는 행형부(行刑部)의 요원으로 활동했으며 계속 한훈(韓焄)을 따라 일본 앞잡이들을 숙청하기에 전력을 다 하였는데 멀리 금강산으로 들어가 김동평(金東平)과 윤용중(尹龍重) 등 부일분자(附日分子) 들을 사살하였다. 그 후 몸을 피하여 일시 만주로 망명을 하였던 것인데, 그 때 권총 1정을 휴대한 채 향리로 돌아왔다.
그 후 1919년 3월 민족 독립 만세 운동이 일어났으므로 일시 거사를 중지하고 있다가 동년 12월 11일 전북 옥구군 대야면 소산리 김영순의 집으로 들어가 상해임시정부로 보낼 군자금으로 당시 화폐 27원을 받아 연락원에게 전송하였다. 이 사실이 발각되어 1924년 체포당하여 2년 여의 모진 고문 끝에 1926년 전주 지방법원에서 징역 3년의 언도를 받게 되었다.
1929년 4월 1일 전주 감옥에서 출옥한 후로는 일제의 고문에 못이겨 29세의 나이에 반병신이 되어 재향 영농에 치중하다 김제 고향에 돌아와 은거하다가 1968년 6월 향년 68세로 별세하였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82년도에 건국포장을 수여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