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연(金鍾淵)

  • 관리자
  • 2019.01.08
  • 1356
지조 있는 선비 김 종 연(金鍾淵)(1898년∼1980년)
 
* : 사긍 (士兢)
* 호 : 입와 (立商
)
* 출생지 :김제시 용지면 봉의리(鳳儀里
)

선생의 이름은 종연(鍾淵)이고 자는 사긍(士兢)이며 호는 입와(立商)로 경주 김씨(慶州 金氏)이다. 신라 제56대 경순왕 제삼자 영분공 휘 명종(敬順王 第三子 永奔公 諱 鳴鍾)을 시조로 하여 월성부원군 휘 천서(月域付院君 諱 天瑞)는 18대 조(十八代 祖)이다
.

선생은 서기 1898년에 김제시 용지면 봉의리(金堤市龍池面, 鳳儀里)에서 태어나서 1980에 83세를 일기로 타계하였다
.
선생의 일생은 한 마디로 한 맺힌 일생이었다. 대륙을 넘보던 일본 제국주의자들이 나라를 강제로 빼앗으려고 혈안이 되었던 때에 태어나 8.15광복이 되던 때까지의 청.장년기(靑.壯年期)는 일제의 모진 학정에 시달렸고, 광복이 되자 또다시 국토가 둘로 갈리는 쓰라림 속에 노년기(老年期)를 맞이한 것이 그것이다
.
선생은 동생 종화(鍾華:호는 중재)와 같이 간재(艮齋) 선생에게 수학하였는데, 앞날이 촉망되는 제자로 신임이 두터웠다. 동생 종화와 같이 신통력(神通力)을 가진 명필로 알려졌던 선생은 전주 옥동정사(全州 玉洞精舍)와 문중 강당 승계재(門中 講堂 承啓齋)를 무대로 최흠재(崔款齋), 김우당(金尤堂), 이고재(李顧齋), 민단운(閔丹雲), 송유재(宋裕齋) 선생들과 교분을 가지면서 많은 시문(詩文)을 남기었으나, 왜정 말엽부터 건국 초에 이르는 국난에 없어지고 일부 소장된 유고(遺稿)를 모아 「입와집(立商集)」상, 하권을 꾸몄으나 아직 간행하지는 못하고 있다. 1980년 지조 있는 선비로써 일생을 마치기까지 선생은 항일사상에 투철하였다. 선생의 일관된 항일사상은 철두철미하여 후손들이 왜정의 왜곡(遷曲)된 교육을 받아 잘못된 부분이 있으면 바로 잡아 주기도 하였다. 일제 치하에서 일제의 출판허가를 얻어 전간재(團艮齋) 선생의 문집(文集)을 발간한다는 것은 묵시적(默示的)으로 왜정을 시인하는 결과가 되며 스승의 뜻이 아님을 들추어 결연히 반대투쟁에 앞장섰다. 뿐만 아니라 혹 일가 가운데 왜정에 협력하는 사람이 있으면 엄히 꾸짖어 선생의 일가들은 왜정에 협력하는 일이 추호도 없었다. 선생의 이러한 항일사상은 마침내 이심전심(以心傳心)으로 아들인 직수(直洙)에까지 이어졌다. 아들인 직수는 저 유명한 「이리농림학교 화랑도 사건」의 주동자의 한 사람으로 일제 말엽 한국 학생들끼리 화랑도를 조직하여 반일학생운동(反日學生運動)을 전개하다 끝내 왜경에 체포되어 혹형(酷刑) 끝에 해방과 더불어 풀려났었다. 이러한 애국지사를 낳게 한 것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라 입와(立商
) 선생의 투철한 항일사상과 충(忠)과 의(義)를 중히 여기던 가정교육(家庭敎育)의 결과라 하겠다. 선생이 남긴 「입와집(立商集)」 권지일(卷之一)에는 시, 서(詩, 書)가 수록이 되어 있으며 권지이(卷之二)에는 잡저, 서, 기, 제, 발, 찬, 통고문, 축문, 제문, 비문, 묘갈명, 묘포, 행장, 기의, 부록(雜著, 序, 記, 題, 拔, 贊, 通告文, 告文, 祭文, 碑文, 墓喝銘, 墓表, 行狀, 記疑, 附錄) 등이 재록(載錄)되어 있다. 이 유고집(遣稿集)은 현재 아들인 직수(直洙)가 가지고 있다.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