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극효(黃克孝)

  • 관리자
  • 2019.0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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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명처사(大明處士)  황극효(黃克孝)     (1600 ∼ 1678)

* 자 : 행원(行源)
* 호 : 동계(桐溪)
* 출생지 : 김제군 용지면
 
선생은 아버지 휘여함(諱汝濫)과 문화 유공 덕윤(文化 柳公 德潤)의 따님인 어머니 사이 남매 중 장남으로 서기 1600년(선조 28년)에 김제군 용지면에서 태어났다.
 
우주 황씨 진사공과 휘명손(紆州黃氏進士公派諱命孫)의 7세 손으로 자(字)는 행원(行源)이고 호(號)는 동계(桐溪)라 하였다.
 
선생은 이곳 김제로 오신 6代祖 휘명손 할아버지 이후 면면히 내려오는 명문가도(名門家道)의 자손답게 어려서부터 단정하고 언행이 정중하며 재주가 있어 9세 때부터는 글을 잘 하였다. 그래서 일찍이 백석 유선생즙(白石柳先生楫)에게 입문하여 깊은 학문을 배우고 다시 봉곡 김선생 동준(鳳谷 金先生東準)에게 학업을 계속하였으며 늦게는 신독재 김선생(愼獨齋 金先生)에게 글을 배웠다.
 
이렇듯 세 분 스승에게 글을 배웠지만 글을 배울 적에는 온 마음을 집중시켜 한시도 자리에서 떠나지 않고 의미를 알 때까지 정좌로 앉아 깊이 연구하는 특성이 있었으며 무슨 일이든 상대로 하여금 감화되도록 하는 가르침이었다.
 
이웃에 장사하는 부부가 있었는데 상처를 하고 재취로 얻은 부부였던 바 그 계모가 전실(前室)의 아들들을 구박하고 때리며 내쫓아버렸다. 그러자 내쫓긴 전실 아들들은 이리 저리 다니며 얻어 먹는 가련한 신세가 되어 아버지를 원망하고 죽은 어머니를 그리워하며 계모를 원수같이 여기며 다닌다는 말을 들은 선생은 어느 날 그 계모를 조용히 불러 후하게 음식을 주며 부자지간의 혈통과 모자지간의 인연이며, 현모양처란 어떠한 것인지를 알기 쉽게 훈계설명하며 타이르고 다시 많이 주어 먹인 다음 자식의 도리란 어떤 일이며 어떻게 하면은 효자가 되어 어머니의 사랑을 받게되는 것인가를 구체적으로 가르쳐 주며 타이르고 또 음식을 주며 이 음식을 계모에게 주라고 일러보냈다. 이들은 돌아가서 선생이 시킨대로 계모에게 잘못을 빌자 그 계모도 이제까지 내가 잘못했노라고 하며 잘못을 뉘우치고 아버지는 아버지 대로 이후부터는 화평하게 서로 섬기는 가정이 되었다.
 
선생은 매사를 이런 식으로 감화시키어 회개토록 하는 가르침으로 실천하였다.
또 선생은 서기 1626년 인조(仁祖 14년) 병자호란 때에는 호군(胡軍)이 들어와 황실을 무능(無能)케하고 나라 안이 시끄러워지자 가족들을 데리고 잠시 고산 동계(高山 桐溪)로 들어가 숨어 살 적에는 북쪽을 향하여 방성통곡(放聲痛哭)하고서 좌불향북(坐不向北) 즉 앉아도 북쪽을 향하여 앉지를 않고, 서불청자(書不淸字) 즉 글씨를 써도 청자(淸字)는 쓰지도 안 하였으며, 목불청력(目不淸歷) 청나라의 달력이 있어도 보지를 않는 강한 민족의 의지를 보이며 그저 해가 뜨면 아침이고 해가 떨어지면 밤이 돌아오는 일기절후(日氣節候)만을 보고 지내다가, 해가 바뀌어 새해가 돌아오는 정월 초하루 새날이 되자 "내 어찌 병자지란(丙子之亂)때 죽지 않고 살아 남아 무슨 면목으로 새해를 맞겠는가." 하고 눈물을 흘리면서 북쪽을 향하여 사배(四拜)하는 충절을 보일 뿐 아니라 이 때부터 웃음을 잃고 이가(齒) 보이게 말도 않고 언제나 서글픈 얼굴이었으며, 호(號)도 자호(自號)로 동계(桐溪)라 하였고 모든 사람들은 대명처사(大明處士)라 불렀다.
 
선생은 능성 구공대수(綾城具公大修)의 따님에게 장가들어 자곤, 윤곤, 신곤(自坤, 允坤, 信坤)과 두 딸을 두고, 지필습서(指筆習書)로 세월을 보내다가 서기 1678년 숙종 4년에 향년 79세로 김제군 용지면 반교리에서 세상을 떠났다.
 
선생의 유고(遺稿)로는 '동계유고(桐溪遣稿)'라 표제(表題)한 단권(單卷)에 시(詩), 운(韻), 문(文), 환(換), 제문(祭文), 행장(行狀), 묘갈(墓碣), 초서(草書) 등으로 기술(記述)되었다.
 
선생의 장례는 기미윤(己未閏) 3월에 고산(高山)에서 행하였는데 길이나 골짜기에 평소 선생의 학식과 덕망을 흠모하여 모인 사람들로 인해를 이루었다. 이 때 어느 선비는 제물을 갖추어 가지고와서 곡조문(哭吊問)하는가 하면 어느 선비는 묘 옆에 제문을 놓고 슬프게 곡배(哭拜)하는 이도 있었다. 뿐만 아니라 치장(治葬)일에 앞장서는 등 많은 사람들이 자기들의 일같이 여기고 수고로움을 아끼지 않았다 한다.
 

통정대부 승정부 부승지 겸 경연참찬관 춘추관 수찬관 연안 이지수(通政大夫承政府副承旨兼經筵參贊官春秋館修撰官延安李逃秀)가 갈찬(碣撰)하고 전주 진관겸 병마첨 절제사 완산 이인승(全州鎭管兼兵馬僉節制使婉山李寅升)이 근서(謹書)한 묘비.(墓碑)가 산소 앞에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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