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덕왕사(慧德王師)

  • 관리자
  • 2019.0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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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덕왕사(慧德王師)에 대한 기록은 1983년에 출판된『금산사지(金山寺誌)에 실려 있는 「혜덕왕사」 조와, 1111년(고려 예종 6)에 금산사에 세워진 「증익 혜덕왕사진응지탑비명(贈益 慧德王師 眞應之塔碑銘)」에 거의 종합되어 있으므로 여기서는 우선 그것을 소개하기로 한다.

『금산사지』의 -기록은 혜덕왕사의 이름은 소현(韶顧)이고, 자는 범위(範圍)이며, 속성은 이씨다. 아버지는 수(守) 태사문하시중증중서시랑(太師門下侍中贈中書侍郞) 화공(和公) 자연(子淵)이고 어머니는 김 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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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40년(정종 4)에 개성의 남쪽 불령리(佛嶺里)에서 탄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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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세에 해안사(海安寺) 해린국사(海麟國師)에게 나가 중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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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61년(문종15)에는 왕륜사(王輪寺) 오교대선장(五敎大選場)에 나가 대덕(大德)의 법계(法階)를 처음 받은 후 1069(문종 23)에 중대사(重大師)에 오르고, 1071년에 삼중대사(三重大師)가 되었으며, 1083년 (순종 1)에 수좌(首座)와 승통(僧統)을 차례로 배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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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 1074년(문종 33)에 내전법회 설주(內殿法會 說主)에 임명되고, 1083년에는 개국사(開國寺)와 자운사(慈雲寺)의 선장 회주(選場 會主)와 대사 대장법회 법주(大賜 大藏法會 法主)에 임명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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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71년(문종 25)에는 해안사(海安寺)의 주지로, 1079년(문종 33)에는 금산사(金山寺) 주지, 1083년(순종 1)에는 개성 현화사(玄化寺) 주지에 취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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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79년 내전법회 설주(內殿法會 說主)에 임명되었을 때 법호(法號) '보리(普利)'를 받고 그 후 '정진(精進)·요익(饒益)·운혜(雲慧)·광우(廣祐)·호세(護世)·능화(能化)·중관(中觀)' 등의 법호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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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사가 절 남쪽에 광교원(廣敎院)을 창립하고 당나라 규기(窺基)가 찬술한 「법화현찬(法華玄贊)」과 「유식술기(唯識述記)」 등의 장소(章疏) 32부, 353권을 교정(校正) 개간(開刊)하여 광교원에 옮겨 두었다.


1096년(숙종 1)에 현화사 봉천원(奉天院)에서 입적하였다. 나이가 59세였고, 법랍(法臘)이 48이었다. 시호는 혜덕왕사 진응(慧德王師 眞應)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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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익 혜덕왕사 진응지탑비명(贈益 慧德王師 眞應之塔碑銘)」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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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려국 전주 금산사에서 유식(唯識) 유가종(諭脚宗) 사업을 크게 벌여 보리(普利), 수진(首眞), 정진(精進), 요익(饒益), 응광(應廣), 보우(普祐), 호세(護世), 능화(能和), 중관(中觀)의 법호를 가진 증시(贈諡) 혜덕왕사(慧德王師) 진응(眞應)의 탑비명 병서(幷序) 삼중(三重) 대광(大匡) 개부의(開府儀) 동삼사(同三司) 검교(檢校) 태사(太師) 수태보(守太保) 문하시랑(門下侍郎) 동중서문하(同中書門下) (缺四宇)‥‥상서(尙書) 예부찬림원사(禮部輪林院事) 문덕전태학사(文德殿太學士) 수국사(修國史) 상주국(上柱國)‥‥缺九字 등사랑(登仕郎) 상서(尙書) 도관랑중(都官郎中) 사(賜) 비어대신(緋魚袋臣) 鄭000 (缺三字)奉 敎 塔碑를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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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臣)은 들으니 석씨(釋氏)가 세상에 나서 교(敎)를 세운 것은 많은 기법(技法)으로 교화하기 위한 것이므로 그 설(說)은 권(權)과 실(實)과 점(漸)과 돈(頓)의 다름과, 반(半)과 편(偏)과 만(滿)과 원(圓)의 다름이 있다. 이로 말미암아 오천축국(五天竺國)의 높은 선비와 중화(中華)의 이름난 승려가 공(空)에 떨어지고 유(有)에 떨어진 자와, 진실로 종성종상(宗性宗相)을 번거롭게 하는 자가 심히 많았다. 오직 성(性)과 상종(相宗).이 합하여 하나가 되어 성상(性相)의 묘리(妙理)를 말하는 자는 이제 ‥‥‥ (缺八半) 혜덕왕사의 휘(諱)는 소현(韶顯)이요, 자(字)는 범위(範圍)이고, 속성은 이씨(李氏)이며, 그 선조는 경원군(慶源郡) 사람이다. 증조와 고조 이하로 덕을 쌓은 것이 더욱 깊어 그 아들과 그 손자가 공경의 반열에 올라 높이 빼어났고, 누나와 아랫 누이는 궁호(富壺)에 열하여 그 꽃다움을 연했다. 왕부(王父)의 휘 (諱)는 한(翰)이며, 광록대부(光錄大夫) 동지추밀원사(同知樞密院事) 증 태자태부(贈太子太傅) 상서좌복야(尙書左僕耶) ‥‥‥ (缺六半) 공은 효도로써 집을 다스리고 충성으로써 나라에 힘을 다했으니 그럼으로써 현달한 반열에 참여하고 법상(法象)이 6부(六符)에 화협(和協)하여 반열에 우뚝서서 경사(慶事)가 7대를 연해서 나라에 공을 세우고, 명성을 높이 드날려 공적이 세상에 이보다 큰 이가 없고, 넉넉함이 후손에게 드리워 끊어지지 아니하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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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고(顯考)의 휘는 000인데(缺三字) 태사문하시중(太師門下侍中)‥‥‥ (缺六宇) 화공(和公)이니 문장으로써 어렴고제(御簾高第)에 발탁되었고 도략(燾略)이 있어서 성인(聖人)의 강토를 위하여 힘껏 만기(萬機)를 돕는다고 사람들에게 들려져서 4보(四輔) 가운데 제일 머리에 있었으니 어찌 이윤(伊尹)이 은(殷)나라 왕가의 우상(右相)이 되어 천하를 취하여서 편안함을 보전하고, 공광(孔光)이 한나라 왕실의 상공(上公). 임명되어 해내(海內)가 그 위엄이 떨치는 것을 두려워 한데 그칠 따름일까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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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외조의 휘는 ‥‥‥인데(缺四字) 벼슬은 시랑평장사(侍郎平章事)이고, ‥‥‥ (缺六字) 왕실의 명신(名臣)으로 진실한 절개를 지켜서 변하지 아니하고 평안하고 험난한 일을 한결같이 하며, 나간즉 모(旒)를 잡고 도끼를 집어, 사방이 침략하는 걱정이 없고, 들어오면 도(道)를 논하여 나라를 경영하니 그로써 만승천자(萬乘天子)가 겨를이 있나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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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세가(世家)의 먼 계보는 진실한 보첩(譜牒)에 갖추어졌는고로 생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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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姚)는 김씨(金氏)(缺二宇)이니 계림공(鷄林公)의 후예다. (缺五字) 천품(天稟)이 부드럽고 가장 아름다워 세가부(世家婦)의 규문사덕(閨門四德)을 이루어서 공족(公族)의 아내가 됨직하노라. 또 생각을 불·법·승(佛·法·僧) 삼보에 이어서 법왕(法王)의 아들이 되기를 구하니 과연 몽응(蒙應)을 받으니라. 이에 임신하여 태평기력 17년 세재무인 7월(太平紀曆 +七年 歲在戊寅七月) 초사흗날 왕사를 관남불령(關南佛嶺)의 사제(私第)에서 탄생하니라. 왕사는 나면서부터 특이하여 이 갈 무렵에 이미 도(道)를 알았고,(缺七字) 이마가 넓고 눈썹이 길어(缺五字) 그 뼈가 굳세고, 그 살갗이 검어서 응진(應眞)의 상모와 같았다. 나이가 겨우 열 한살에 해안사(海安寺) 인공(麟公)에게 나가서 머리를 깎으니 인공은 즉 전에 법천사(法泉寺) 국사며 시호는 지광(智光)이요, 휘는 해린(海麟)이라. 앞서 인공이 왕의 부름을 받고 대내(大內)에 들어가 밤이 삼경이 되었는데 꿈에 상서로운 새가 봉(鳳)처럼 붉은 것을 보고(缺五字) 깊이 좋아해서 잊어버릴까 두려워했는데 (缺四字) 화공(和公)이 왕사를 이끌고 이르러서 제자가 되기를 청하거늘 인공이 보니 생김새가 웅걸하고 자의(紫衣)를 입었으므로 어제 저녁 꿈의· 상서로운 자태의 조짐이 어찌 없으리오 하였다. 처음으로 금광명경(金光明經)과 유식론(唯識論)을 배우매 본성이 영민하고 익히 들어서, 날로 새롭게 학문이 진취하는지라. 인공이 심히 사랑했다. 배움이 이에 이르되 현철한 재주는(缺五字) 복숭아와 오얏이 봄을 응함을 기다려서 발현하는 고로(缺五半) 이름을 소현(韶顯)이라고 하였다. 그 다음해에 구족계(具足戒)를 복홍사(福興寺) 관단에서 받으니 세상에 뛰어난 구슬이 스스로 조촐하여 갈고 닦지 않아도 빛나고, 거울이 본래 한결같이 맑으니 어찌 먼지를 털고 씻는 수고로움이 있으랴. 그때에 인공이 현화사(玄化寺)에 옮긴지라, 왕사가 일찍이 높은 스승의 자리에 깃들어서 금언(金言)을 배웠은즉 어찌 중씨(仲7)가(缺四字) 착한 데에 돌아온 것과 다르리오.(缺七半) 청녕(淸寧) 7년에 왕륜사(王輪寺) 대선장에 나아가서 한번에 대덕법계(大德法階)를 얻고, 함태(咸泰) 5년에 중대사(重大帥) 법계를 더하고, 6년 5월에 미쳐서 문종의 금륜(金輪)이 계통(啓統)을 열어서 敎化가 이루어짐에 이르니 불(佛)에 행해서 희사(喜捨)를 겸해서 닦았도다. 왕사의 재주가(缺四半) 범처법속(凡處凡倦)에다른지라. 연덕궁(延德富) 제6왕자가 왕사의 문하에 출가하니 이제 속리산 법주사(法住寺) 주지 도생승통(導生僧統)이 이 사람이라.
이 해 10월 14일에 임금이 왕사가 속한바 玄化寺에 行幸하여 부처님과 승려들에게 齋를 올려 축하하고 인하여 賤衲袈娑 蔭脊을 하사하고, 7년에 처음으로 해안사에 住하고, 10년에(缺六半) 太雌 5년 가을에 임금이 有司로 하여금 왕사를 內殿에 불러 크게 法席을 벌리고 왕사로 하여금 설법을 주관하게 한 것은 大宋에 돌아가는 사신이 큰 바다를 건너는데 이롭게 하자는 까닭이라. 皆利二半의 법호를 정하고 그 뒤에 여러번 加해서 16자로 법호를 한 것은 소위 그 德行에 의함이다.
이 해에 조서를 내려서 全州에 있는 ‥‥‥ (缺七半) 首座를 더하고, 이해에 문종이 승하하시고 순종이 계승하여 얼마 안되어 또 돌아가시니 즉 선종 承纂 원년이라. 임금이 단정히 팔짱을 끼고 함이 없이 앉아서 중흥을 본 것도 어찌 스승의 福利의 공이 아닐까 보냐. 枇署를 내려서 승통을 삼으니 그때 왕사의 나이가 47세였다.
비로소 왕사가(缺一字) 首座에 나가서 ,僧統位(缺六字) 德의 전진으로 말미암으니 그 위대하지 아니하랴. 하물며 국초 이래로 법사가 되는 이는(缺一字) 年德이 있지 아니하면 능히 그 직책에 있기가 드물거늘 스승은 壯年으로서 拔擺함을 입으니 僧家에서 이를 영광으로 생각했다. 또 그해에 왕이 왕사를 玄化寺로 옮겨 머물게 하고 開國寺, 慈雲寺 兩寺 選場에서 두번‥‥‥(缺十字) 會를 繞監하다. 大藏道場에 미쳐서 講席을 주로 벌이고 아울러 法服을 하사받은 것이 그 수가 하나가 아니라, 왕사가 戚里로 내려와 불교의 主掌이 되매 그 법도가 빛나 가히 볼 만하며, 그 뜻이 확고하여 빼앗지 못하게 되니 무릇 하는 일이 다른 사람과는 다름이 있었다. 일찍이 좀 한가한 때가 있다 할지라도 손에서 책을 놓는 일이 없고, 매양 講會에(缺十字) 공손함을 생각하고, 혹 사람을 가르치되 고달픔을 잊어버렸다. 廊廉에 나간 자의 岷崙의 端玉과 쪽빛 구슬이 특히 진귀한 것이니 甁과 바리로 모신 자의 孔雀의 깃과 翡翠色의 털은 아름답고 상서스러운 大寂의 學徒가 아님이 없도다.
수백 僧俗의 청중들이 千을 채우니 어찌 가히 같은 말로 말할까 보냐. 大安 초년에 왕사가 손수 교열한 유식으로 ‥‥‥(十孝缺) 개발하여 처음에는 원본을 잃어서 여러해 되었으나 이미 얻어서는 높이고 숭상하는 이가 많았다. 왕사가 일찍이 금산사에서 절의 남쪽 모퉁이 60여평 땅에 좋은 곳을 가려서 한 집을 창건하고 額字를 廣敎晥이라 이름하고 인하여 經板을 붓으로 써서 새겨 그것을 집 가운데 또 廣敎院에 造金堂 한 곳을 만들어서 盧운련 및 (缺+一字) 그 집에서 太康 9년으로부터서 스승의 말년에 이르기까지 慈恩法師의 선한 바 法華經과 玄贊唯識, 述記 등 章疏 32部 353卷을 교정하여 工匠이를 모아 開板하였다. 그럼으로써 널리 유통하여 法施를 넓게 하였다. 이로써 大德(缺一字) 高僧의(缺九字) 唯識 開創의 祖基가 되었다. 살피건대 이같이 문을 지켜 述作하는 祖宗이 없을 것 같으면 어떤 祖事가 그 학문을 벌리랴, 이일로 무릇 장차 性相義門에 들으려 하는 자,자비의 학문을 버린즉 그 지극한 데에 이를 수 없는 것을 알지로다.
요사이 唐나라 文皇이 新羅王의 表請에 따라 瑜脚論 100권을(缺九字) 보냄으로써 점점 이 강토에 성하여졌다. 이미 曉法師가 前賢大練의 그 발자취를 후세에 인도하여 등과 등이 불꽃을 전해서 세세로 이어 흥하였으나 聖人과의 거리가 더욱 멀어져 끼친 글이 그릇 어그러진 것이 많으니라. 왕사가 일찍이 마음에 근심하여 그 祖門의 草疏로써 세상에 大行케 하고 학자로 하여금 木宗의 평탄한 길을 알게 하여서 (缺九字) 오직 曉賢師율 軌道를 나란히 달렸으니 가히 더 말할까 보냐, 그 木敎를 빛나게 드날림이 이같았고 다시 法을 전하는 外에 仁과 義의 道를 항상 좋아하며, 經史를 널리 보아 詩瀉과 筆札에 이르기까지 정밀하게 궁구하지 아니함이 없어서 사람의 감탄하고 읊조림이 된것이 왕왕 있는 고로 首庭에서 辭令狀을 내려 말하기를 안으로 師의 밝은 訓領을 (缺九岺) 詩社를 강산에 맺었으니 그 재주가 外學을 경한것이 또 이와 같으니라. 왕사가 생각하기를 미래의 感果를 돕고자 할진대 인연을 현재에 심는 것만 같음이 없다 하시고, 上天에 나는 간절한 願이 먼즉 일어난 無著의 종적을 쫓아서 內號에서 수행하고, 가까운즉 基公의 발자취를 사모하여 이에 題絅으로 評判하고, 달을 따라서 慈氏의 尊像을 그려 이루어서 해마다 (缺九岺) 승려의 무리를 모아서 禮懷歸依하고, 밝히 薺를 베풀고, 法席을 파하느니라. 太康 元年之卯로부터서 壽昌 二年 爾子에 이르도록까지 처음부터 끝까지 무릇 스물두해로 太踐 말년에 마쳤도다.
童宗이 그 일을 듣고 특별히 모든 彩畵와 아울러 御書一通을 써서(缺一字) 하사하시니 (缺九岺) 殘찬 會는 삼가이 기쁨을 따를 것이라, 우리 왕사의 공덕으로 그 달과 날로 나라의 벼슬을 하사하고 왕이 제자라 칭함은 왕사의 마음이 法을 받들어 해를 이어 香火의 인연을 닦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고, 御手로 기쁨을 따라서 글을 내리고 丹靑의 꾸밈을 하사하니 진실로 顧力이 심히 깊은 것이 아니면 어찌 임금께서믿고 중히 여김이 이같을까 보냐. 왕사가 玄化寺에 있어(缺九字) 절을 완전히 보완하는 일을 급무를 삼았더니 이윽고 具狀을 갖추어 임금께 드리니 임금이 그 아룀을 可타하고 인하여 繕理宮을 두다. 大安 己巳年에 그 役事를 비롯하고 壽昌 丙子年에 그 功을 마치니 補葺한 것이 큰 규모라. 비록 옛터를 인하였으나 장엄하고 훌륭한 景槪가 완연히 새로이 이루어진 것 같은지라. 왕사께서 또한 안과 밖 本宗의 모든 절에 조촐한 財物 드리기를 베풀고, 매년의 두번 법회 베풀기를 허락하니(繇八宇) 晝工 몇몇이(缺一字) 釋迦如來 및 奬基 두 법사와 海東六祖像을 다 한 감에다 그려 이루어서 각각 그 절에다가 안치하고, 義學者로 하여금 그 晝像을 보고 공경함을 내게 하고자 하니 공경으로부터 信을내고, 信으로부터 慧를 얻어서 勸奬찰이 있게 하고자 한 것이라. 壽讀元年乙亥 겨울 10월에 聖考 肅宗이(缺一字) 位를 전수받으매 宗福이 반드시 그 불법으로(缺七字) 돌아가게 되어 왕사를 불러 法主를 삼아서 仁王經을 강론하니 하늘의 祚業을 비는 까닭이라.
2년 12월 18일에 이르러서 왕사가 절의 奉天院에서 깊은 밤 經을 보는 차제에 병이 있게 된 지라. 임금이 듣고 곧 御醫를 보내서 진찰하여 보았으나 회복치 못하고, 中使를 보내며 태울 수 있는 말 안장을 보내니 그 절에서 받아들여(缺七字) 內侍 小卿인 池澤厚를 불러 聖旨를 받들어 전하기를 이제 師를 王師에 봉하고자 한다 하니 사께서 머리를 조아려 말하기를 德이 얇고 행실이 용렬하니 어찌 聖人의 권장함을 감당하오리까 하다.
밤이 장차 깊으려 하는데 버드나무 가지를 씹어 양치질을 마치고 勒如來에 염불을 하고(缺一字) 誓弘騷戒에 이르러서는 門弟子로 더불어서 여러번 附屬함이 蕩蕩然하여 근심하는 빛이 없더니 中夜三更에(缺七字) 입적하셨다. 하루 먼저 횐 무지개가 밤에 나타나니 아는 이가 이에 생각하기를 스승이 돌아가심을 보임이라 하다. 산에 있는 牧童과 野老가 짖지 않는 이가 없고, 달리는 짐승과 날으는 새가(缺一字) 서로서로 슬퍼하다. (缺一字) 날이 밝으매 임금에게 입적을 아뢰니 임금이 이에 몹시 슬퍼하사 內奉御王據를 들여보내 조문하고 위로하시며 다음날에 右銜僧錄繼通司天監으로(缺七字) 葬事하는 일을 감독하여 돕게 하다, 27일에 尙書右僕射 陳謂를 사신으로 보내 副尙書左丞 左諫譏大夫 金統 등으로 하여금 璽書를 받들어 王師로 봉하고 시호를 慧德이라 하고 塔號를 眞應이라 하고 아울러서 紫地編袈娑 및 모든 依服에 器玩茶香等物을(缺八字) 茶粃를 表請하여 절의 서남 모퉁이에서 거행하고 明年 정월 열 하루 丙申에 葬事를 절의 서북 모퉁이에 을겨서 그 뼈·를 편안히 하니 像法을 따르니라 오호라. 敵尼園안에서 生이 없는 生을 나타내고 跋提河邊에서 마친즉 滅하지 않는 滅함을 보임이니라. 그 나머지 마침이 初七로부터 二祥에 미치도록까지 무릇 齋라.(缺六字) 그 조정에 있어서 준 것이 오히려 이 같으니 하물며 그 門人일까 보냐 때에 祐世僧統이 있으니 실지로 華嚴의 宗匠이라. 왕사의 죽음을 듣고 바야흐로 슬픔을 다 하여서 祭祀를 극진히 지내니 그 제문에 간략히 이르기를 바야흐로 죽는 날까지의 사귐을 기약했더니 팔이 큰 것이 참으로 이제라. 곧 죽으니 내가 누구로 더불꼬 하였으니 그 다른 宗派에서 중히 여김이 다 이 같은 것들이라.(缺七字)
大師 慧珍이 바다를 건너 와서 그날 왕사의 講席 아래에 나이가 慧珍이 왕사에게 이르되 흔연히 예부터 서로 아는 것 같이 두차를 지냈으되 아무것도 왕사에게 먼저함이 없었으니 그 滅함이 滅한지라. 가부좌(跏趺坐)를 맺고 印手하여 앉아서 죽으니 평상시와 같도다. 그의 먼저 사람이 의지하여 사모함이 또한 이같은 類라.
그 여러 조정에서 무릇(缺七字) 남들이 번거함을 피하는 고로 기록하지 아니하였으나 모든 귀한 신하와 성한 족속과 큰 행상과 큰 장사꾼이 각각 그 가히 할 바를 다 하여서 공경을 극진히 한 것에 미쳐서는 쉬는 날이 없었다. 세속의 壽命은 59요, 夏臘은 48이라.(缺一字) 門弟上首에 導生僧統以下 凡 一千餘人등이 있어서 그 先師의 行章을 쓰고 눈물을 뿌리고 闕門에 엎드려 아뢰어서(缺七字) 아래와 같이 새기기를 청하되 瑞瑞로 粧飾한 兜率에 부질없이 슬퍼하고 사모하는 것을 알며 거북의 발등을 寶界에 새겨서 원컨대 길이 전하여 들리게 하소서. 이에 下臣에게 명하여 끼친 빛을 드날리게 하다.
신하인 表讓이 이르기를 臣은 본래 오직 고루한데다 노쇠가 더하거늘 하물며 붓대를 잡는데 값없이 용감하니 어찌 말을 寫琰하게 料囑하여서 돕게 하리오. 원컨대 中旨에 돌려서 通人 에게 옮겨주게 하소서.
인하여 制勅을 내려 가로되(缺九字) 景物로서 번거롭고 私曲하지 말고 表讓은 정직히 쓰기를 힘쓸지어다 하였다. 이미 都와 兪를 보이기를 막으니 감히 論해서 짓는데 오로지 하지 아니하리요. 글이 實質이 아니면 作者의 마음을 부끄럽게 하고(缺一字) 道를 가히 억지로 이름을 붙이면 거의 고승의 입에 오를 뿐이라.(缺一字) 그 진실한 것을 주워가지고 삼가이 서술하니 銘에 이르되
能仁이 출현하사 큰 인연을 위하여 衆生界를 攀緣하여 제도해서 모든 敎詮을 베푸니 흑은 權과 實이라고 이르고, 혹은 偏과 圓이라고 이르러서 서역으로부터서 일어나서 점점 동쪽 변두리까지 입혀서 祖師와 祖師가 천명하여 드날리고 스승과 스승들이 제창해서 有를 말하고 空을 말하니 性이라고 이르는 것과 相이라고 이르는 것은 진실로 二道를 빠뜨려야 하니 어찌 치우쳐 崇尙함이 있으며 그 누가 融通하리오. 오직 우리 宗匠의 萬行을(缺八字) 닦아 鷲嶺에 명예가 盛하며 龍辯에 王臣이 應하느니라.
帝子를 호위해서 스승과 聖人이 墻이 첩첩하니 한 길의 覺樹가 가지를 더해서 梵宮을 얽어맺으니 장엄한 부처님이 날로 法衣를 떨쳐 미묘한 뜻을 강론하여 베푸니 더하기를 請하는 이가 구름같고 齋戒를 끌어 저자를 이루는지라. 道가 어찌 먼 데서 행하는고, 곧 이것은 妙를 원만히 하고자 해서_ 모름지기 善業을 심어서(缺九字) 氷月과 같고 福이 모래와 같으니라. 해가 二紀를 넘어서 離害廣敎를 생각하여 院을 일으켜서 글을 강론하니 많은 잎사귀에 글을 새기고 꽃을 꿰뚫어 線을 더하니 法雨를 고루 적시고 자비의 바람이 더욱 부채질 하도다. 저 疇賢이 거듭 나고 손님을 대하는 데에 비기는지라.
붓을 命하여서 景致를 더듬어서 詩를 이루니 드리운 이슬이 彩色을 날리고 푸른 구름이 기이하게 달리니 業의 느낀바가(缺八寧) 證得함이 가득 찬 것을 기약하게 된지라. 흰 무지개의 台한 祥端에 雙林이色을 변하니 문득 敎化의 인연을 재촉하여서 다시 조촐한 지경에 돌아온지라. 大君이 은혜를 심고 미천한 신하가 德을·펴서 이를 돌에 써서 새기니 아름다움을 萬億年에 끼치는지라.
※ 참 고 문 헌
. 『慧德王師眞應塔碑銘』
. 『金山寺誌』, 1983.
※ 현 창 사 업
慧德王師碑의 保存策을 세우거나 새로 建立하였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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