탄허(呑 虛)

  • 관리자
  • 2019.01.08
  • 1870

우리 나라 최고의 학승(學僧) 탄 허 (呑虛) (1913 ∼ 19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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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탄허(呑虛)
출생지 김제군 만경면 대동리

머리에

탄허스님은 우리 나라 최고의 학승으로 널리 이름을 떨친 분이다. 불교뿐만 아니라 유교, 도교 등 동양사상 전반 특히 화엄경과 주역의 권위자이며 아울러 예언가이기도 하다.

듣기에 따라서는 예지의 거창함이 지나쳐 허황으로 이어지는 느낌을 뿌리치기가 어렵다. 그러나 자연과학의 지식까지 동원하는 그의 예지는 분명히 설득력이 있다는 것 또한 부인할 수 없다. (동아일보 김중배 논설위원의 글 「탄허스님 법어집」 발문 인용)

출가(出家) 이전 시대 (태어나서 22세 까지 )

탄허스님은 1913 1 15(음력) 김제군 만경면 대동리에서 김율제(金栗濟) 선생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스님은 소년기에 이미 호남학파(湖南學派)의 거두(巨頭)이신 아버지 김율제 선생의 가르침으로 유교학(懦敎學)의 기초과정을 공부하였을 뿐만 아니라 당시 호남지방에서 성행하였던 보천교(普天敎)에 아버지가 관계하였기 때문에 아버지의 구국안민(救國安民)하는 사상과 선공후사(先公後私)하는 사상의 영향을 받았다.
그 후 충청남도 보령으로 가서 기호학파(畿湖學派)의 거유(巨儒) 면암(勉庵) 최익현(崔益絃) 선생의 제자인 이극종 선생에게 가르침을 받아 유교의 진수에 대해 모르는 것이 없게 되었다. 스님은 이극종 선생의 학문적 진수를 모두 터득하고, 그 외에도 노자(老子)와 장자(莊子)의 도교학(道敎學)까지 두루 배웠으나 이것 가지고도 인생의 진수와 진리의 깊은 뜻을 알 수 없었다. 그리하여 좀 더 훌륭한 스승이 없을까 하고 고민하던 중 마침 들려오는 소식에 의하여 오대산 상원사(上院寺)에 방한암(方漢岩)선사라는 분이 계시다는 말을 들었다.
스님은 한 번도 뵌 적이 없는 한암선사께 편지를 올려서 자신의 심정과 포부, 그리고 인생의 의문점을 여쭈었다. 이후 3년에 걸쳐 한암선사와 간절한 심정의 편지를 주고 받는다. 그렇지만 새로운 지식에 대한 열망을 채울 수 없었다. 그래서 친구 둘(권중백과 차군빈)과 함께 한암선사께서 계시는 오대산 상원사까지 걸어서 찾아갔다. 그러나 한암선사는 계시지 않았다. 실망하고 다시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는 몇달동안 고민하면서 다시 편지를 주고 받는다.
그러다가 친구들과 또다시 길을 떠나 한암선사의 문하에 들어갔다. 스님이 처음 한암선사의 문하에 들어갈 때는 출가(出家)하고자 하는 마음보다는 진리의 깊은 뜻에 대한 의문이 풀리면 산을 내려오리라는 단순한 지적(知的) 열망(熱望) 에서였다.

스님은 상원사에서 한암선사의 인도대로 불교학 공부의 기본인 「서장(書狀)」을 읽었다. 그러나 글은 좋고 한문의 문리(文)대로 글은 이해되나 그 의미는 파악을 할 수 없었다. 이러한 안타까운 심정을 한암선사께 호소하니 참선(參禪)을 하라고 하였다. 스님은 한암선사의 뜻을 좇아 자신의 학문적 아상(我相)과 아만(我慢)을 버렸다. 그리고 속세와의 모든 인연을 끊고 정식으로 불문에 출가를 했던 것이다. 그 때 스님의 나이 22세였으며 부인과 자식을 두고 있었다.

상원사(上院寺) 시대 (22세에서 39세까지 )

상원사에 정식으로 입산한 스님은 그 후 3년간을 말없이 오직 참선에 힘을 쏟았다. 이렇게 3년간 참선을 한 후 다시 서장을 읽으니 비로소 그 오묘하고도 깊은 뜻을 파악할 수 있었다. 스님은 기쁜 심정을 한암선사께 알렸다. 그러자 한암선사는 참선의 힘을 바탕으로 경전(經典)을 읽으라고 권유하고, 새로 공부할 곳을 추천하였다. 그러나 스님은 한암선사 곁에서 공부를 마치기로 결심하고 그 후 14년간을 두문불출(杜門不出)하고 오직 참선과 경전의 깊은 뜻을 공부하는데 큰 힘 을 기울였다. 경전을 공부하자 다시 글자를 따지는 버릇이 나왔다. 어린 시절 유가(懦家)에서 공부하던 버릇이 남아 있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글의 뜻과 논리를 가지고 스승인 한암선사와 논쟁을 하기에 이르렀다.
그렇지만 한암선사는 나무라지 않았다.

「불교는 유교와는 다르다. 유교는 중국에서 나온 사상으로 한문의 문맥 그대로 해석할 수 있지만, 불교는 인도에서 유래되어 산스크리스트어(범어)를 한자로 번역하였기 때문에 두 나라의 문화풍토나 번역상의 모순과 오류로 인하여 글귀로 경전을 해석하면 커다란 잘못이 생기는 법이란다.

한암스님은 여러 경전과 조사어록(祖師語錄)을 들추어가며 논리적 근거를 제시하고는 탄허스님이 유학적(懦學的) 인식논리를 벗어나도록 유도하였다. 이러한 한암선사의 노력의 결과 탄허스님은 불교의 핵심도리(核心道理)에 보다 쉽게 접근할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스님의 초기 사상 형성과정은 유학적 기초와 참선, 그리고 한암선사의 종지(宗旨)에 대한 인식방법이 합쳐진 과정이었다고 할 수 있다.

후에 스님이 방대한 불교경전의 번역을 착수하게 되었던 것도 초기에 한암선사와의 경전해석에 대한 견해차이에서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경전의 글귀를 이해하는데 있어서 탄허스님은 당신이 기초로 닦은 유학의 문맥을 따라 하였으나 전혀 의미가 통하지 못했던 것이다. 유학은 퇴계(退溪)나 율곡(栗谷) 선생이 정성스럽게 토를 달아서 후학(後學)이 공부할 때 의미해석의 혼란이 없게 만들었는데, 불교는 그렇지 못하였던 것이다.
한암선사와의 논쟁은 이런 혼란 때문이었던 것이다. 한암선사는 이러한 문제를 익히 알고 계셨으므로 탄허스님께 불교의 경전에 토를 달아 알기 쉽게 번역을 하라고 권유했던 것이다. 스님은 새벽 2시면 반드시 일어나 참선을 하고 경전을 읽었다.
이러한 습관은 출가 후에 시작되어 열반에 들기까지 50년간이나 계속된 것이다. 이러한 생활 속에서 스님은 다시 노장학(老莊學)을 공부하였다.
참선을 하고 나서 보는 노장학은 전혀 다른 새로운 세계를 보는 기분이었다. 이리하여 스님은 노장학에 빠져들었고, 역시 노장학에 밝은 한암선사와 함께 노장사상을 토론하였다. 스님은 불교의 초보과정으로 부터 순차적(順次的)으로 모두 공부를 한 후 마지막으로 불교의 최고 경전인 화엄경(華嚴經)을 보았다. 17년간 절 밖을 나가지 않고 참선과 공부를 하여 화엄학(華嚴學)의 진리를 깨달은 스님은 한암선사로부터 탄허(呑虛)라는 법호(法號)를 받았다. 탄허라 함은 허공을 삼킨다 또는 우주를 싸다라는 뜻인데 삼라만상(森羅萬象)의 진리 화엄도리(華嚴道理)를 깨달았으니 그러한 이름에 합당(合當)하다고 허락하신 것이다.

한암선사는 탄허스님을 제자로 둔 후 탄허스님의 인물의 고상(高尙)함과 행동의 단아(端雅), 그리고 천재적인 학문적 재능, 뛰어난 글씨로 하여 말할 수 없는 총애를 하였다. 탄허스님은 이러한 총애에도 불구하고 한암선사를 정성껏 모셨으며 점심식사 후에는 한암스님 방을 청소하고 향을 사른 후 자기 방으로 돌아가는 일을 한암선사가 살아계실 때 한 번도 거른 적이 없었다.

후학양성(後學養成) 시대 (40세에서 45세까지 )

한암선사가 열반하신 후 탄허스님은 오대산의 종풍(宗風)을 이끌어가며 1955년 오대산 수도원(修道院)을 개설하고 수련생을 모았다. 수련생의 입학자격은 유교학 7(七書)를 본 사람, 불교학 4(四敎)를 본 사람, 그리고 사회에서 대학을 나온 사람으로 규정하고 시험을 본 후 불교의 엘리트를 양성하였다. 이 후에도 스님의 후학 양성은 끊임없이 이어졌다.
전국 순회법회, 동국대학교 선학강좌(禪學講座) , 대원암(大圓菴) 특강, 청룡사(靑龍寺) 노장학 특강, 월정사(月精寺) 동양학 특강 등 스님은 자신의 학문적 지식과 깨달음을 모든 사람에게 골고루 베풀었다.

번역사업과 사회활동 시대 (40세에서 열반 이전까지)

탄허스님은 1960년을 전후하여 불교의 경전을 번역하는 일에 온 힘을 기울인다.
1950
년에 한암선사가 토를 단 「금강경삼가해(金剛經三嘉解)」를 알기 쉽게 풀이하여 다시 발행한 것을 비롯하고 6조단경(六祖壇經),보조법어집(普照法語集)」을 1960년대에 펴내었다.

스님의 번역사업중 가장 위대한 것은 「신화엄경합론(新華嚴經合論) 47권을 들 수 있다.
「신화엄경합론」은 화엄경 80권과 청량국사 소()와 초, 그리고 이통현 장자(莊子)의 논()까지 곁들인 것으로 스님이 하루 14시간씩 약 10년간에 걸쳐 완성한 것이다. 원고지 분량만도 무려 6 3천여 장에 달하는 이 책은 유교학과 도교학(道敎學), 그리고 불교학에 정통하지 않으면 그 누구도 손을 댈 수 없는 엄청난 일로 일본이나 중국의 이름난 학자들도 이루지 못한 방대한 사업인 것이다. 참으로 스님의 높은 경지에 입을 다물지 못할 뿐이다.
불교의 진수인 화엄경이 세상에 빛을 보자 스님은 이어서 불교의 초, , 고 과정인 사미과, 사집과(四集科), 사교과(四敎科) 교재 30여권을 알기 쉽게 풀이하였다.
이처럼 많은 책을 발간하면서도 스님 스스로는 단 한 권의 책도 남기지 않았다. 스님의 사상을 모두 모아 한 권의 책으로 엮으라고 제자들이 권유하면 스님은 항상 「부처님 말씀을 받들고 행하기에도 인생은 짧다.
그리고 아직 부처님의 옛 법()을 많은 사람들에게 이해시키기 위한 작업마저 안 되어 있다. 부처님 말씀으로 볼 때 나의 말은 모두 허상(虛像)에 불과한 것이다. 」하시며 사양하였다고 한다.
그래서 스님의 깊은 사상을 헤아릴 수 없지만 참으로 넓고 깊은 스님의 마음에 절로 고개가 숙여진다.

입적 (入寂)

어느덧 스님의 건강하던 시대가 가고 연륜(年輪)과 함께 육신(肉身)도 이울어 열반의 길로 들어서게 되었다.

스님의 제자인 환훤스님이 스님께 물었다.
「여 여 (如如)하십니까?
「그럼 어여하지, 멍청이.
하고 스님이 대답했다. 이어 대규스님이
「사람이 세상에 머무는 것은 인연법(因緣法)인데, 지금 스님께선 세상인연이 다하신 것 같습니다. 저희들에게 좋은 말씀을 남겨 주십시오.
하고 말하자 스님은
「일절(一切) 말이 없어.
라는 말 한 마디를 남기셨다.
「유시 (酉時)?
하고 물음에 곁에 있던 시자가
「예. 유십니다.
하고 대답하자 지그시 눈을 감고 곧바로 열반에 들었다.
이 때가 1983 6 5 18 15분이었다. 이렇게 해서 우리 나라 불교계의 최고의 별이 떨어진 것이다.

끝으로 탄허스님의 약력을 적어둔다.

1913
1 15일 전북 김제에서 金栗齋선생의 차남으로 출생

1918
1926( 614) 부친으로 부터 한문학 전과정 수학

1927
1934(15 22) 기호학파(畿湖學派)의 최익현 선생 후예 극종 선생으로부터 유학 및 도교학 수학.

1931
1934(1922) 오대산 월정사 방한암(方漢岩) 대종사와 우주 및 인생의 근본이치에 대한 빈번한서 문답

1934
9 5 (22) 오대산 상원사로 출가

1934
1937(2225) 3년간 묵언(默言) ·참선

1937
1952(2540) 15년간 오대산 상원사에 방한암스님을 모시고 불교내전 (佛敎內典) 및 선학일체(禪學一切)를 수학

1953
1958(4146) 강원도 종무원 원장 겸 월정사 조실

1955
1958(4346) 오대산 수도원 원장

1953
1963(4151) 방한암스님의 유촉을 받아 역경작업에 전념

1964
1971(6259) 동국대학교 대학선원 원장

1967 ~ (55
) 대한불교 조계종 중앙역경 연수원 초대원장 동국 역경원 증의(證義)위원

1972
1983(6071) 화엄학 연구소 소장

1974
(62 ) 신화엄경합론(新華嚴經合論) 47권 간행
1975
1983(6371) 동국대 학교 재단이사
1983
4 24() 입적(入寂) (세수 71, 법납 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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