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승현(崔承鉉)

  • 관리자
  • 2019.0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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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민을 사랑한 면장 최 승 현 (崔承鉉)(1894∼ 1979)

* :학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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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지 :김제군 용지면 와룡리

선생은 전주 최씨(全州 崔氏)로 군옥(群玉)으로 시조(始祖)하고 대제학(大堤學)을 지내신 만육 양(晩六 瀁) 24세 손으로 기백(基百)과 어머니 전주이씨(全州 李氏)아들로 태어났다.

선생은 기골이 장대하고 육척(六尺)이 넘는 거인으로서 타고난 성품이 곧고 정직했으며 호탕하면서도 매우 지혜로웠다.
일찍이 이웃마을에 계시는 석정 이정직(石亭 李定稷) 선생에게서 글을 배우다가, 선생이 돌아가시자 유재 송기면(裕齋 宋基冕) 선생에게 깊은 학문과 덕행을 배우고 몸에 익혀 모름이 없이 글을 잘 하였다.
그러나 선생은 선비로써 지식을 쌓는 것에 만족하지 않고 아는 것을 생활에서 직접 실천하고 싶은 강한 의욕을 느꼈다. 그리하여 가난한 사람과 병에 시달리는 가엾은 사람들에게 무엇인가 도움을 주고자 벼 200여 섬을 받는 부잣집의 아들로 집안 일에는 힘 쓰지 않고 군산으로가 이름난 의원으로부터 한의학을 공부하여 깊은 의술까지 익힐 무렵 면민들의 부름으로 1923 29세의 젊은 나이로 용지 면장이 되었다.
선생은 면장이 되자 먼저 한해(旱害)가 많은 13개 소에 제방을 쌓아 물을 가두고, 만경강 제방을 고쳐 홍수를 막게 하는 등 면민 복지사업과 낙후된 용지면의 개발에 온 정열을 쏟았다.

이러한 일 외에도 군농회 분구장(群農會 分區長)과 금융조합 평의원(金融組合 評議員)의 일까지 맡아 밤낮을 가리지 않고 온 힘을 다하면서도 면민들의 무식을 한탄하고 글을 가르쳐야 되겠다는 마음에서 서기 1927년 용지면 보통학교 설립추진기성회(龍池面 普通學校 設立 推進期成會)를 조직하여 회장으로서 앞장서 일하여 그 이듬해에 드디어 허가를 받아 학교가 문을 열게 하였다- 계속하여 농촌진흥회장(農村振興會長), 부용 금융조합 평의원(芙蓉 金融組合 評議員), 부용학교 학무의원(芙蓉學校 學務委員), 김제향교 장의(金堤鄕校掌議)등 많은 일들을 보면서도 훌륭하게 처리하였다.

선생이 면장 자리에서 물러나자 면민들은 그의 공적을 잊지 않고 길이 전하기 위해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곳에 영세불망비(永世不忘碑)를 세웠다.  선생은 1935년에 한글과 한문을 섞어 「자력갱생(自力更生)의 감각(感覺)」이라는 작은 책을 지어 펴내고 농민들로 하여금 길잡이로 삼도록 부탁했다. 그리고 나이 40이 되었으니 이제 농부로 돌아가겠다며 모든 자리에서 물러나 오직 농사일과 글공부에만 전념하였다.

그러나 1945년 해방이 되고 아직 나라의 질서가 잡히지 않아 어지러운 시절 52세 된 선생에게 또다시 면장이 되어 달라는 면민들의 간절한 부탁이 있었다. 이를 거절하지 못하고 면장이 된 선생은 각오를 새롭게 하고 먼저 갈팡질팡 하는 민심을 다스리는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무슨 주의(主義)가 옳다느니 또한 누가 정치를 잘 하겠다느니 하는 것 보다는 논밭에 나가 토질을 개량하고 풀을 매어 땅을 기름지게 가꾸어 소득을 높여야 우리 농민들이 배부르게 잘 살 수 있다고 일깨우며 「자력갱생의 감각」을 더욱 강조하였다.

이후에도 선생은 전주 최씨 도유사(全州崔氏 都有司)를 맡아 종사일을 보면서도 전주 최씨 대동보(大同譜), 파보(派譜), 가승(家乘) 5차례나 족보도 발간하였다.

그 후 선생은 부족한 덕행을 쌓고 못다한 글공부를 더하기 위해 늙음을 핑계로 어떠한 일이나 종사(宗事)에도 참례(參禮)하지 않고 다시 유재 송기면 선생을 찾아 공부를 계속했다. 또한 일제 때부터 계획하고 추진해 온 와룡역 유치에 온갖 힘을 기울여 기어이 와룡역이 세워지자 선생은 이제 내 소원은 모두 이루어졌다며 기뻐한 후로는 여생을 책과 글에서 즐거움을 찾으며 보내다 1979 87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선생은 금녕 김부용(金寧金芙容)여사와 결혼하여 일운, 영명, 영법, 영의, 영정, 영종(逸雲, 永命, 永範, 永宜, 永定, 永宗) 6형제를 두었다. 선생의 유고로는 시집이 있는데 六男인 永宗이 보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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