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표(眞表) 율사(律師)

  • 관리자
  • 2019.0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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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불교의 큰 별 진표(眞表) 율사(律師)

진표율사는 불교계에 있어서만이 아니라 우리 민족문화사에 있어서도 중요한 자리를 차지해야 할 위치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율사에 대한 기록은 극히 빈약하여 일연(一然)이 쓴 『삼국유사(三國遣事)에 의지할 수 밖에 없음이 안타깝다. 뿐만 아니라「삼국유사」의 기록 가운데 진표율사에 대한 기록이 비교적 소상한 「진표전간(眞表傳簡)」과 「관동풍악발연수 석기(關東楓岳鉢淵藪 石記)」의 기록이 차이가 있어 어느 것을 믿어야 할지 난감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래서 여기서는 두 편의 기록을 같이 적어 이해를 돕고자 하며, 지금껏 잘못 알려지고 있는 진표율사 출생지를 몇 가지 사실과 전설을 바탕으로 바로잡고자 한다.

 1.
출생(出生)

  
진표 율사의 속성(俗姓)은 정()씨로 아버지는 진내말(眞來末, 眞乃末)이며 어머니는 길보랑(吉寶娘)이다「진표전간」에는 신라 제33대 성덕왕 17년 서기 718년에, 「관동풍악발연수 석기」에는 서기 734년에 진표 율사가 출생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어 무려 16년의 차이를 보이고 있다.

 2.
출생지 (出生地)

  
머리말에서 조금 언급한 것처럼 많은 사람들이 율사의 출생지를 지금의 김제군 만경면으로 알고 있으며, 또 지금껏 그렇게 믿어왔다. 그러나 이것은 정확한 근거가 뒷받침되지 못한 막연한 것으로 분명히 잘못된 것이다. 따라서 다음의 몇 가지 사실과 전설을 바탕으로 지금의 김제시 순동동 대리마을로 바로잡고자 한다.

 
「진표전간」에는 진표 율사의 출생지를 완산주(完山州) 만경현(萬境縣)으로 「관동풍악발연수 석기」는 전주(全州) 벽골군(碧骨郡) 도나산촌(都那山村) 대정리(大井里), 또 어떤 기록에는 벽골군 도나산촌 대정리(만경)으로 적고 있다.  잘 알고 있는 바와 같이 삼국시대에는 지금의 김제 지역이 백제의 땅이었다. 「삼국사기」에 나타난 당시 이곳의 지명을 살펴 보면 벽골(壁骨 또는 疎骨), 두내산(豆乃山 흑은 豆奈知), 수동산(首冬山), 무근촌(武斤村), 구지지산(仇知只山), 야서이(也西伊) 등인데 서기 757년에 비로소 벽골이 김제(金堤)로 개칭되었으며, 두내산은 만경(萬頃)으로, 수동산은 평고(平睾), 무근촌은 무읍(武邑)으로 각각 개칭되어 모두 김제군(金堤郡)의 영현(領縣)이 되었다. 그런데 위의 기록은 만경과 김제가 같은 행정구역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같은 행정구역으로 적은 것이다. 뿐만 아니라 만경은 어느 곳을 찾아보아도 옛날이나 지금이나 대정리(大井里)라는 지명을 찾을 길이 없다. 그러므로 진표 율사의 출생지는 지금의 만경이 분명 아니다.  그렇다면 벽골군 도나산촌 대정리를 바로 밝혀내야만 진표 율사의 출생지를 바르게 알 수 있는 것이다.

  
필자는 몇 년 전부터 우리 고장의 옛 이름을 조사하였다. 마을 이름이 그렇게 불려지게 된 유래를 밝히기 위해서였다. 그러던 중 지금의 김제시 순동동 대리(大里) 마을이 옛날에는 대정면(大井面) 「대정리(大井里)」였고, 그 옛날에는 「한우물」로 불리었음을 알았다. 자세히 조사해 보았더니 한자(漢字)가 널리 쓰이기 이전에는 마을에 큰 우물이 있어「찬우물」로 불렀는데, 한자가 들어오면서 이를 한자로 적이「대정리(大井里)」가 되었다는 것이다.
  
이 마을은 김제시의 동쪽 약 3km 지점에 위치하고 있으며 농원, 만경거리와 경계를 이루고 있는데, 진표 율사에 대한 전설이 두 가지나 전해 내려 오고 있다.

  
진표는 어려서부터 활쏘기를 매우 좋아하고, 또 활솜씨가 뛰어났다. 그래서 늘 활을 들고 들과 산을 누비며 사냥을 하였다.  어느 봄날, 사냥을 다니던 진표는 논둑에 앉아 쉬다가 개구리를 잡았다. 그 개구리를 버들가지에 메어 물에 담가 두고 산으로 가서 사냥을 하였다. 그리고는 개구리는 까맣게 잊은 채 그대로 집으로 돌아갔다.
  
달이 가고 해가 바뀌어 이듬해 봄이 되었다.
  
예나 다름없이 사냥을 하러 가던 진표는 구슬프게 우는 개구리 소리를 들었다. 문득 지난해의 일이 떠올랐다. 그래서 걸음을 재촉하여 그 자리로 가보았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개구리가 버들가지에 꿰인 채 울고 있는 것이었다.

  
「내가 어찌 먹기를 위하여 해가 넘도록 이런 고통을 받게 했단 말인가.

  
진표는 크게 놀라 뉘우치면서 탄식했다. 그래서 불도에 뜻을 두고 결국 금산사로 가서 스님이 되었다는 전설이 그 하나이다.

  
남은 하나는 진표와 용자칠총(龍子七塚)에 얽힌 전설이다.

  
김제에서 이서(伊西)를 경유하여 전주(全州)로 가는 길을 따라 약 4km 를 가면 길 왼편에 자동차 정비업소인 신흥공업사가 있고, 길 건너 남쪽 야산에 올망졸망한 묘 일곱 기와 자연석에 용지칠총(龍子七塚)이라는 글을 새긴 비석이 서 있는데, 그 뒷면에 전설의 내용이 새겨져 있다. 그 전설은 이미 여러 곳에 소개되었으므로 여기서는 생략한다.
  
그렇다면 어찌하여 「만경」이라는 지명이 나왔느냐 하는 것이다. 이 또한 그럴만한 까닭이 있다지금처럼 교통이 발달되기 전 아랫녘(전라남도)에서 서울로 가는 길이 지금의 순동동 농원 마을로 나 있었는데, 이 곳 농원에 만경으로 가는 갈림길이 있었다. 그래서 갈림길이 있는 이 부근을 사람들은 「만경거리」라고 불렀다. 지금도 이 곳에는 만경으로 통하는 길이 뚫려 있을뿐만 아니라 이 곳을 부를 때 「만경거리」라고 불러야 농원으로 부르는 것보다 더 잘 알아 듣는다.  진표 율사가 바로 이 곳 「만경거리」 부근인 「대정리=대리」에 살았기 때문에 출생지가 「만경」으로 잘못 기록된 것이 분명하다.
  
위와 같은 여러 가지 사실을 기초로 할 때 진표 율사의 출생지는 지금의 순동동 대리 마을이 틀림없다.

  3.
출가(出家)

  
「진표전간」이나 「관동풍악발연수 석기」 모두 열두 살 때 출가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그 동기에 대해서는 어느 쪽에도 언급이 없다「발연수석기」에는 아버지의 허락을 얻고 금산수(金山籤)로 순제(順濟) 법사를 찾아가 배우기를 청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진표전간」에는 금산사(金山寺)로 숭제(崇濟) 법사의 강하(講下)에 들어갔다고 적혀 있어 차이를 보인다. 그러나 금산수는 금산사를 세우기 이전의 숲 속의 수행처였기 때문에 결국 같은 곳이며, 순제(順濟)와 숭제(崇濟)는 글귀가 다르지만 구전(口傳)하는 과정에서 잘못 전달된 것으로 보아 결국 같은 사람으로 본다.
  
이렇게 볼 때 진표 율사는 열두 살 때인 서기 729(혹은 745)에 금산사를 짓기 이전의 숲 속의 수행처로 순제(숭제) 법사를 찾아가 출가한 것이 된다.

  4.
업적

  
진표 율사의 업적 가운데 가장 큰 업적은 금산사(金山寺)를 중창(重創)하여 신라시대 오교구산문(五敎九山門)의 하나인 법상종(法相宗)을 창종(創宗)하여 중생교화에 크게 공헌한 것이다.
  
백제 법왕(法王) 원년(元年) 창건(創建)될 당시만 하더라도 금산사는 아주 작은 사찰(寺刹)에 불과했다. 그런데 진표 율사가 금산사를 크게 짓고자 발언하면서 금산사는 대 가람으로 발전한 것이다.
  
진표 율사는 서기 762년부터 신도들에게 권하여 16척의 미륵보살을 조성하고, 미륵보살이 내려와서 계법(戒法)을 주는 모양을 금당(金堂)남쪽 벽에 그렸다. 그리고 미륵보살상은 서기 764 6 9일에 완성하여 서기 766년까지 5년동안 금산사를 대 가람으로 중창한 것이다.
  
지금도 금산사 3층 미륵전(彌勒殿)에는 삼존불(三尊佛-미륵존불, 大好相菩薩, 法華林菩薩)이 봉안되어 있다.
  
이 밖의 업적을 간추려보면 첫째, 속리산 법주사(法住寺)를 그 제자들로 하여금 중창하도록 했고, 둘째, 금강산 발연사(鉢淵寺)를 창건하고, 셋째 제자들로 하여금 팔공산 동화사(八公山 桐華寺)를 중창하여 법상종풍(法相宗風)을 선양시켰으며, 넷째, 영심(永深), 보종(寶宗), 신방(信芳), 체진(體珍), 진해(珍海), 진선(眞善), 석충(釋忠) 등 많은 제자들이 불법을 깨닫도록 가르쳐 모두 산문(山門)의 개조(開祖)가 되게 하였으며, 다섯째, 보살계(菩薩戒)를 받고 경덕왕(景德王)이 내린 곡식 칠만 칠천석과 비단 초백단(), 황금 오십 냥을 여러 절에 나누어주어 불사(佛事)를 크게 일으키게 하였다.

  5.
맺는 말

  
머리말에 간략하게 적은 것처럼 진표 율사는 온 몸으로 미륵신앙(彌勒信仰)을 체현(體現)한 우리 불교사와 민족문화사의 큰 별이다. 그러나 그 기록이 빈약하여 안타깝다. 계속하여 진표 율사의 업적과 사상이 담긴 기록을 찾는 일에 힘을 쏟아야 하겠다.
  
끝으로 진표 율사의 기록이 나타난 「진표전간」과 「관동풍악발연수석기」를 그대로 옮겨 적으며 맺는다.

   (1)
진표전간(眞表傳簡)

  
중 진표(眞表)는 완산주(完山州) 만경현(萬頃縣)사람이다. 아버지는 진내말(眞乃末), 어머니는 길보랑(吉寶娘)이며 성은 정()씨다. 나이 12살 때에 금산사(金山寺)의 숭제법사(崇濟法師)의 강석(講席) 밑에 가서 머리를 깎고 중이 되어 배우기를 청했다. 스승이 그에게 말했다.

  
「일찍이 나는 당나라에 들어가서 선도삼장(善道三藏-선도(先道)는 善導의 오기. 당나라 때 정토교(정토교)를 크게 일으킨 고승(高僧). 삼장(三藏)이란 경(()·론()의 삼장을 잘 아는 스님이란 뜻)에게 배운 뒤에 오대산에 들어가 문수보살 현신(現身)에게서 5(五戒)를 받았다.

  
이에 진표가 아뢰었다.

 
「부지런히 수행하면 얼마나 되면 계()를 얻게 됩니까? 
 
「정성이 지극하다면 1년을 넘기지 않을 것이다.
 
  
스승의 말을 들은 진표는 명산을 두루 찾아다니다가 선계산(仙係山) 불사의암(不思議庵-전북 부안군 변산에 있는 절)에 머물면서 3(三業-신업(身業구업(口業의업(意業), 즉 신체의 동작과 언어·의지의 작용을 말함. 이것에 의해 윤회의 길이 결정된다)을 닦아서 망신참법(亡身懺法-몸을 희생시키는 참회법)으로 계()를 얻었다. 그는 처음 7일 밤을 정하여 5(五倫-두 무릎, 두 손, 머리의 5()를 말함)을 돌에 두들겨서, 무릎과 팔뚝이 모두 부서지고 낭떠러지로 피가 비오듯했다.

  
그래도 아무런 부처의 감응이 없자 몸을 버리기로 결심하고 다시 7일을 정하여 14일이 되는 날 마침내 지장보상(地藏菩薩)을 뵙고 정계(淨戒)를 받았으니 바로 개원(開元) 28년 경진(740) 3 15일 진시요, 진표의 나이 이 때 23세였다.
  
그러나 그의 뜻은 자씨(玆氏-()는 미륵보살의 성이므로 곧 미륵보살을 일컬음.)에게 있는지라 감히 중지하려 하지 않고 영산사(靈山寺)로 옮겨가서 또 처음처럼 부지런하고 용감하게 수행했는데 과연 미륵보살이 감응하여 나타나더니 점찰경(占察經) 2권과 증과간자(證果簡子-불가(佛家)에서 수행으로 얻은 과(). 간자(簡子)는 점을 치는 대쪽.) 1 89개를 주면서 말했다.

  
「이 가운데서 제8간자(簡子)는 새로 얻은 묘계(妙戒)를 비유한 것이고 제9간자는 구족계(具足戒)를 얻은 것에 비유한 것이다. 이 두 간자는 내 손가락 뼈이고 나머지는 모두 침향(沈)과 단향(檀香)나무로 만든 것으로서 이것들은 모두 번뇌(煩惱)에 비유한 것이다. 너는 이것을 가지고 세상에 법을 전하여 남을 구제하는 뗏목을 삼도록하라.

  
진표는 성별(聖別)을 받자 금산사(金山寺)로 와서 살았으며 해마다 정성껏 단석(壇席)을 열어 법시(法施)를 널리 베풀었다. 그 단석의 정결하고 엄함이 이 말세(末世)에는 일찌기 볼 수 없었던 일이었다. 풍교(風敎)와 법화(法化)가 두루 미치자 여러 곳을 돌아다니다가 아슬라주(阿瑟羅州-지금의 강릉)에 이르렀다. 섬 사이의 물고기와 자라들이 다리를 놓고 물 속으로 그를 맞아 들였으므로 진표가 이곳에서 불법을 강의하니 그 물고기와 자라들까지도 계를 받았다. 그 때가 곧 천보(天寶) 11년 임진(752) 2 15일이었다. 경덕왕이 이 말을 듣고 그를 궁중으로 맞아들여 보살계를 받고 곡식 7 7천 석을 내렸다. 초정(椒庭-궁내(宮內). 여기서는 왕후의 대귈)과 열악(列岳-아내의 백(숙부모(叔父母) 즉 왕의 외척)들도 모두 계품(戒品-5()·10선계(善戒)등 계의 품류(品類))을 받았으며, 비단 5백 단()과 황금 50냥을 보시(布施)했다. 그는 이것을 모두 받아다가 절에 나누어 주어 널리 불사(佛事)를 일으켰다. 그의 사리는 지금도 발연사(鉢淵寺-강원도 고성군 외금강면 금강산에 있던 절)에 있으니 곧 바다의 물고기들을 위하여 계()를 주던 곳이다.

  
그의 제자 가운데 불법을 얻은 영수(領袖)로는 영심(永深보종(寶宗) ·신방(信芳) ·체 진(體珍) ·진해 (珍海) ·진선(眞善) ·석 충(釋忠) 등이 있으며 모두 산문(山門)의 개조(開祖)가 되었다. 영심은 진표가 바로 간자(簡子)를 전했으므로 속리산에 살면서 진표의 법통(法統)을 계승한 제자인데, 그 단()을 만드는 법은 점찰(占) 6(六輪)과는 약간 다르나 수행하는 법은 산 속에 전하는 본규(本規)와 같았다.
  
당승전(唐僧傳)을 살펴 보면 이러하다. 개황(開皇) 13(593) 광주(廣州-지금의 광동(廣東))에 참법(懺)을 행하는 중이 있었는데, 가죽으로 첩자리 두 장을 만들고 선과 악 두 글자를 써서 사람에게 던지게 해서 선자(善字)를 얻는 자는 길하다고 했다. 또 그는 스스로가 박참법(撲懺法-육신을 학대하는 참회법)을 행하여 지은 죄를 없게 해준다고 하였다. 그래서 남녀가 한데 어울려 함부로 그 법을 받아들여 비밀하게 행하니 이 일이 청주(背州-지금의 산동성(山東省) 교동도(膠東道)와 제남도(濟甫道)의 동쪽 지역)에까지 알려졌다. 동행했던 관사(官司)가 이를 조사하여 보고 요망스러운 일이라 하니 그들이 말했다.

  
「이 탑참법(搭懺法-가죽 첩자리7) 두 장에 선(() 두 자를 각기 써서 던져 선자를 얻으면 길하다는 참회법)은 점찰경(占察經)에 의한 것이고, 박참법은 여러 경에 있는 내용에 따른 것으로 오체투지(五體投地)하여 마치 온 몸을 땅에 던져 마치 큰 산이 무너지는 것과 같이 한다.  
  
그 때 이 사실을 아뢰자 황제는 내사시랑(內史侍郎) 이원찬(李元撰)을 시켜 대흥사로 가서 여러 대덕(大德)들에게 묻게 했다. 대사문(大沙門) 법경(法經)과 언종(彦琮) 등이 대답했다.

  
「 검찰경은 두 권으로 되어 있습니다. 책머리에 보제등(菩提燈)이 외국에서 번역한 글이라고 했으니 근래에 나온 것 같습니다. 그리고 사본(寫本)으로 전해 오는 것도 있는데 여러 기록을 검사해 보아도 어느 곳에도 올바른 이름과 번역한 사람 시일이나 장소가 모두 없습니다. 탑참법은 여러 가지 경()고는 다르므로 여기에 의해서 시행할 수는 없습니다.

  
이리하여 칙령으로 이것을 금지시켰다.

  
이제 이것을 시험 삼아 논해 본다. 청주거사(靑州居士) 등의 탑참 등의 일은 마치 대유(大懦)가 시서발총(詩書發塚)하는 것과 같으므로 (법을 그리다가 이루지 못하고 개가 되었다)고 할 수 있으니, 불타(佛陀)가 미리 방비한 것도 바로 이 까닭인 것이다. 만일 점찰경을 번역한 사람이나 그 시일(時日)과 장소가 없다고 하여 의심스럽다고 한다면 이 또한 삼()을 취하기 위하여 금()을 버리는 것과 같은 것이다. 왜냐하면 그 경문(經文)을 자세히 읽어보면 실단(悉壇-부처님이 중생을 교화하는 방법, 여기서는 세계실단(世界悉壇각각위인실단(各各爲人悉壇대치실단(對治悉壇1의 실단(第一義悉壇)의 네 가지가 있다. 실단은 성취의 뜻. 이것이 변해 일정한 교설(敎說)을 가리킴)이 길고 조밀하여 더러운 것과 흠이 있는 것을 깨끗이 씻어 주고 게으른 자를 격앙(激昻)시킴이 이 경전만한 것이 없다. 그러므로 그 이름을 대승참(大乘懺)이라 했다. 또한 6(六根-6()의 근원으로 곧 안근(眼根이근(耳根) ·비근(鼻根) ·설근(舌根) ·신근(身根) ·의근(意根)을 말한다. ()은 낸다는 뜻으로 안근(眼根)은 안식(眼識)을 내어 색경(色境)을 인식하게 하고, 의근(意根)은 외식을 내어 법경(法境)을 인식하게 하므로 근()이라 한 것임)이 모인 가운데서 나왔다고도 했다- 개원(開院정원(貞元)에 나온 두 석교록(釋敎錄)속에는 정장(正藏)으로 편입되었으니 비록 성종(性宗-법성종(法性宗)을 말함. 법성(法性)은 불성(佛性)이란 뜻이니 일체만유(一切萬有)는 동일한 법성(法性)에서 생겼으며, 일체 중생은 모두 부처될 성품이 있다고 말한 종지(宗旨). 화엄종, 천태종 등이 이것임.)은 아니나 그 상교(相敎-법상종(法相宗)을 말함. 법성종과 같이 만유의 모든 현상을 주로 연구하는 것이 바로 그 종지(宗旨))의 대승(大乘)으로는 또한 넉넉한 셈이다. 어찌 탑참이나 박참의 두 참과 함께 말할 수 있겠는가. 사리불문경(舍利佛問經-불타에게 계율의 일을 묻는 내용의 경전)에는 불타가 장자(長者)의 아들 빈야다라(那菉多羅)에 게 말했다.

  
「네가 7일 낮 7일 밤 동안에 너의 전죄를 뉘우쳐서 모두 씻게 하라.

  
다라(多羅)가 이 가르침을 받들어 정성껏 밤낮으로 행하니 제5일 저녁이 되자 그 방 안의 여러 가지 물건이 비 오듯이 내리더니, 수건, (), 총채, 빗자루, , 송곳, 도끼와 같은 물건들이 그의 눈 앞에 떨어졌다. 다라가 기뻐하며 부처에게 물었더니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이것은 네가 물욕을 벗어날 징조니라, 모두 베고 쓸고 터는 물건이다.

  
이 말에 따르면 점찰경에서 윤()을 던져 상()을 얻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이것으로 진표공이 참회를 일으켜서 간자(簡子)를 얻고, 불법을 듣고 부처를 본 것이 허망한 일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더구나 이 경을 거짓되고 망령된 것이라고 한다면 어찌해서 미륵보살이 진표 스님에게 친히 전수(傳授)했겠는가? 만일 이 경을 금한다면 사리불문경(舍利佛問經)도 또한 금할 것인가? 언종(彦琮)의 무리야말로 확금불견인(攫金不見人-남의 금을 훔칠 때 금만 보이고 사람은 보이지 않는다는 고사(故事)에서 나온 것)이니 글을 읽는 자들은 이것을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이다
     

     요계(燒季-말세를 말함)에 현신(現身)해서 용롱(庸聾-
     
게으르고 귀먹은 사람, 즉 나태하고 어리석은 사람)을 일
     
깨우니 영악(靈岳)과 선계(仙溪)에 감응해서 통했네.
     
정성 다해 탑참(搭懺) 전했다 말하지 말라,
     
동해에 다리를 놓은 어룡(魚龍)도 감화하였네.

  (2)
관동풍악발연수(關東楓岳銶淵戮-관동(關東)은 강원도, 풍악(楓岳)은 금강산, 발연수(鉢淵戮)는 발연사(鉢淵寺)) 석기(石記)

   
이 기록은 바로 사주(寺主) 영잠(瑩岑)이 지은 것이며, 승안(承安 1196∼1200)-()나라 장종(章宗)의 연호. 승안 4년은 고려 신종(神宗)2년이다)  진표율사(眞表律師)는 전주 벽골군(碧骨郡) 도나산촌(都那山村) 대정리(大井里) 사람이다. 나이 12세에 이르러 출가할 뜻을 가지니 아버지는 이를 허락했다. 율사는 금산수(金山籤) 순제법사(順濟法師)에게 가서 머리를 깎고 중이 되었다. 순제(順濟)는 사미계법(沙彌戒法)을 전해주고 공양차제비법(供養次第秘法) 1권과 점찰선악업보경(占察善惡業報經) 2권을 주며 말했다.

 
「너는 이 계법을 미륵·지장 두 성전(聖前)에 가서 간절히 법을 구하고, 참회하여 친히 계법을 받아 세상에 널리 펴도록 하라.
  
가르침을 받은 율사는 작별하고 물러나와 명산을 두루 다녔는데, 나이 이미 27세가 되었다. 상원(上元(760∼761)-당나라 숙종의 연호)원년 경자(760)에 쌀 20말을 쪄서 말려 양식을 만들고 보안현(保安縣)에 가서 변산에 있는 불사의방(不思議房-전북 부안군 변산에 있던 절)으로 들어갔다. 쌀 다섯 홉으로 하루의 양식을 삼고 그 중 한 홉은 덜어서 쥐를 길렀다. 율사는 미륵상 앞에서 부지런히 계법을 구했다. 그러나 3년이 되어도 수기(授記-발심(發心)한 중생에게 부처가 미리 장래에 부처가 될 것을 알리는 일)를 얻지 못했다. 이에 발분(發憤)하여 바위아래 몸을 던지니 문득 청의동자(靑衣童子)가 손으로 받들어 돌 위로 올려 놓았다. 율사는 다시 분발하여 21일을 기약하고 밤낮으로 부지런히 수도(修道)하고 돌로 몸을 두드리면서 참회했더니 3일만에 손과 팔뚝이 부러져 땅에 떨어졌다. 7일이 되는 날 밤에 지장보살이 손에 금장(金枕)을 흔들면서 나타나 그를 도와 주니 손과 팔뚝이 다시 전과 같이 되었다. 그에게 보살이 마침내 가사와 바리때를 주니 율사는 그 영응(靈應)에 감동하여 더욱 더 정진(精進)했다. 21일이 다 되니 곧 천안(天眼-5()의 하나. 천취(天趣)에 나가거나 또는 선정(禪定)을 닦아서 얻게 되는 눈. 미세한 사물까지도 멀리 또 널리. 볼 수 있으며, 미래에 중생들이 생사하는 모양도 볼 수 있다. 이에는 수득(修得)과 이득(理得)이 있는데 인간으로 선정(禪定)을 닦아 얻은 것을 수득천안(修得天眼), 색계천(色界天)에 나기 때문에 얻은 것을 이득천안(理得天眼)이라고 한다)을 얻고 도솔천중(兜率天衆)들이 오는 모양을 볼 수 있었다.
  
이 때 지장보살과 미륵보살이 앞에 나타나더니 율사의 이마를 만지며 말했다.

  
「착하구나, 대장부여이처럼 계를 구하기를, 몸과 목숨까지도 아끼지 않고 간절히 참회하는구나.

  
지장은 계본(戒本)을 주고, 미륵이 또 목간자(木簡子) 두 개를 주었는데 하나에는 아홉째 간자, 다른 하나에는 여덟째 간자라고 쓰여 있었다. 미륵보살이 율사에게 말했다.

  
「이 두 간자는 내 손가락 뼈이니 곧 시()와 본()의 두 각()을 이르는 것이다또 아흡번째 간자는 법이고, 여덟번째 간자는 신훈성불종자(新熏性佛種子-유식 종(唯識宗)에서 재8아뢰 야식 (阿賴耶識)중에 있는 종자에 선천적으로 존재한 본유종자(本有種子)와 후천적으로 여러 가지 정신 작용에 의하여 훈부(薰附)한 신유(新有)의 것으로 나누는데 이 신훈종자(新熏種子)는 후자의 것을 말함)이다. 이것으로써 마땅히 과보(果報-인과응보(因果應報))를 알기가 어렵다고 할 것이니라. 너는 현세(現世)의 육신을 버리고 대국왕(大國王)의 몸을 받아 뒤에 도솔천(兜率天)에 태어나게 될 것이다」

  
말을 마치자 두 보살은 곧 사라졌다. 때는 임인년 4 27일이었다.  율사(律師)가 교법을 받은 후에 금산사를 세우고자 하여 산에서 내려왔다. 도중에 대연진(大淵津)에 이르렀을 때, 문득 용왕(龍王)이 나오더니 옥가사(玉架娑)를 바치고 8만 권속(眷屬-8만이란 많은 수를 말함.권속(卷屬)은 처자·도제(從弟노복을 말함)을 거느리고 그를 호위해서 금산수(金山藪)로 가니 사람들이 사방에서 모여들어 며칠 내로 절이 완성되었다. 또 미륵보살이 감동하여 도솔천에서 구름을 타고 내려오더니 율사에게 계법을 주었다. 이에 율사는 시주(施主)를 권하여 미륵장육상(彌勳丈六像)을 만들고 또한 미륵보살이 내려와서 계법을 주는 모습을 금당 남쪽 벽에 그렸다. ()은 갑진년(764) 6 9일에 완성하여 병오(766) 5 1일에 금당에 모셔졌으니 이 해가 대력(大曆-당나라 대종(代宗) 의 연호) 원년이다.

  
율사가 금산사에서 나와 속리산으로 향해 가다가 도증에서 소달구지를 탄 사람을 만났다. 그런데, 그 소들이 율사의 앞으로 와서 무릎을 꿇고 울었다. 수레에 탔던 사람이 내려와 물었다.

  
「무슨 이유로 이 소들이 스님을 보고 우는 것입니까? 그리고 스님은 어디서 오시는 분입니까?」
  
「나는 금산수의 중 진표요. 나는 일찍이 변산의 불사의방에 들어가서 미륵·지장보살 앞에서 계법진생(戒法眞械-증과간자(證果簡子))을 받았으므로 절을 지어 오랫동안 불법을 지키고 길이 수도할 곳을 찾으려고 오는 길입니다. 이 소들이 겉은 어리석은 듯하나 속은 현명하여 내가 계법받음을 알고, 불법을 소중히 여기는 까닭에 무릎을 꿇고 우는 것입니다.
  
이 말을 다 듣고 난 그 사람이 말했다.
  
「짐승도 이러한 신심(信心)이 있는데 저는 사람으로서 어찌 무심(無心)할 수 있겠습니까?」

  
그는 즉시 손으로 낫()을 쥐고 스스로 자기 머리칼을 잘라 버렸다. 율사는 자비한 마음으로 그의 머리를 다시 깎아 주고 계를 주었다. 이들은 속리산 골짜기에 이르러 길상초(吉祥草)가 있는 곳을 보고 표를 해두었다. 그들이 명주(溟州) 해변을 돌아 천천히 가는데, 물고기며 자라 등이 바다에서 나와 율사의 앞으로 오더니 몸을 맞대어 육지처럼 만드니, 율사는 그들을 밟고 바다에 들어가서 계법(戒法)을 염송하고 되돌아왔다. 고성군(高城郡)에 이르러 금강산으로 들어가서 비로소 발연수(鉢淵藪)를 세우고 점찰법회(占察法會)를 열었다. 그 곳에 거주한 지 7년 만에 이곳 명주 지방에는 큰 흉년
이 들어 사람들이 굶주렸다. 율사는 이들을 위해서 계법을 설()하니 사람들이 받들어 지켜 3보(寶)에 공경을 다했다. 이 때 갑자기 고성 바닷가에 무수한 물고기들이 죽어서 밀려왔다. 이것을 팔아다 사람들은 먹을 것을 마련하여 죽음을 면할 수 있었다.

  
율사는 발연수에서 나와 다시 불사의방에 도착했다. 그 뒤에는 고향으로 가서 아버지도 찾아뵙고 흑은 진문대덕(眞門大德)의 방에 가서 살기도 했다. 이 때 속리산의 대덕(大德) 영심(永深대덕, 응종(融宗).불타(佛陀) 등이 율사를 찾아와 청했다.

 
「우리들은 불원천리 하고 와서 계법을 구하오니 법문(法門)을 주시기 원합니다.

  
율사가 아무런 대답도 없이 잠자코 있는지라 세 사람은 복숭아 나무에 올라가 땅에 거꾸로 떨어지며 용맹스럽게 참회했다. 그러자 율사가 교()를 전하여 관정(灌頂-여러 부처가 수기(授記)하는 의식으로 물을 정수리에 붓는다는 뜻. 본래는 인도에서 임금의 즉위식이나 입태자식(立太子式)을 할 때에 바닷물을 정수리에 붓는 의식. 이 의식에는 마정관정(摩頂灌頂수기관정(授記灌頂방광관정(放光灌頂)의 세 가지가있음)하고 드디어 가사와 바리때와 공양차제비법(供養次第秘法) 1권과 점찰선악업보경(占察善惡業報經) 2권과 간자(簡子) 1 89개를 주었다. 다시 미륵진생(彌勒眞생) 아홉째 간자와 여덟째 간자를 주면서 경계하기를 「아홉번째 간자는 법이요, 여덟번째 간자는 신훈성불종자(新熏成佛種子)인데 내 이미 너희에게 주었으니 가지고 속리산으로 돌아가 길상초(吉祥草)가 난 곳에 정사(精舍)를 세우고 이 교법(敎法)에 의해서 인간계(人間界)와 천상계(天上界)의 중생들을 건지고, 후세에 널리 펴도록 하라.)  영심 등이 가르침을 받들고 속리산으로 돌아가 곧바로 길상초가 난 곳을 찾아 절을 세우고 길상사(吉祥寺)라고 했다. 영심은 이 곳에서 처음으로 점찰법회(占察法會)를 열었다.

  
율사는 아버지와 함께 다시 발연사에 이르러 도업(道業)을 닦으며 끝까지 효도했다. 율사는 절의 동쪽 큰 바위 위에 올라가서 입적(入寂)했다. 제자들이 시체를 옮기지 않고 그대로 공양하다가 뼈가 흩어져 떨어지니 비로소 흙을 덮어 무덤을 만들었다. 이내 그 무덤에 푸른 소나무가 났는데 세월이 오래 지나자 말라 죽었다. 다시 한 그루 났는데 뿌리는 하나지만 지금은 두 그루의 나무가 서 있다. 대개 그를 공경하는 자가 있어 소나무 밑에서 뼈를 찾는데 혹은 얻는 자도 있으나 얻지 못한자도 있었다. 이에 나는 율사의 뼈가 아예 없어질까 두려워하여 정사년(1197) 9월에 특별히 소나무 밑에 가서 뼈를 주워 통 속에 담았는데 세홉 가량 되었다. 이에 큰 바위 위에 있는 두 그루 소나무 밑에 뼈를 모시고 돌을 세웠다고 했다.

  
이 기록에 실린 진표의 사적은 발연석기(鉢淵石記)와는 같지 않다. 때문에 영잠(瑩岑)의 기록만 추려서 싣는다. 후세의 어진 이들은 마땅히 상고할 것이다. 무극(無極)이 기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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