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묵대사(震默大師)

  • 관리자
  • 2019.0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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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류기담(風流奇談)으로 일생을 풍미한 고승(高僧) 진묵대사(震默大師) (1562 ∼ 1633)

○ 머리에

  
朝鮮 明宗 17 (1562) 지금의 김제군 만경면 화포리에서 태어나(萬頃誌=禪師震默生鄕之地於火浦인조 11(1633)에 세상을 떠난 진묵대사는 한국 불교사 가운데 드물게 보는 불교의 실천적 실존주의자(實存主義者)로 꽤나 방만한 중이었다. 거기에다 성격조차 호방해서 스님이라고 하기에는 걸맞지 않는 담대한 기백과 풍류가 항상 진묵의 세계에 넘쳐 있었다.  한국의 승계(僧界)가 그를 가리켜 기승(奇僧)으로 부르고 있는 것도 그가 여느 중으로서 갖는 법도(法道)의 테두리를 이따금씩 떠난 담대한 기백과 넘치는 풍류 때문이었을 것이다.

진묵은 불도의 실천적 사상의 법도를 정신세계에서 찾았던 기존의  불교세계에 도전이라도 하듯 모든 이념적 불교사상을 행동화함으로써 그의 불교입신에 새로운 경지를 보였던 것이다. 그래서 절()이란 어디까지나 중생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지 도를 닦는 중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고 설파했던 진묵은 그의 법도를 펴는데 절을 이용하지 않고 주로 사람이 많이 모이는 마을의 모정이나 길바닥을 택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포교(布敎)의 수단을 법당에서 얻지 않고 직접 사람이 많이 모여 있는 군중 속에 뛰어들었던 진묵에게서 한국 불교사를 통해 실존적 불교사상을 폈던 몇 사람중의 하나를 찾을 수 있는 큰 보람을 안기는 것이다.
이러한 진묵의 이른바 불교의 실존적 사상성은 기존 불도의 [카테고리]를 대폭 떠난 이단이 아닐 수 없다 하여 거센 시련을 받기도 했으나, 진묵은 끝내 절은 도를 닦는 중을 위해서만 존재할 수 없으며 모든 중생을 위해 절이 있어야 하고 이것이 불도의 정법(正法)이라고 되풀이 강조하면서 그의 실존적 불교사상을 펴나갔던 것이다.

○ 출생과 출가(出家)

    
·출생지

  
진묵대사는 김제군 만경면 화포리에서 태어났다. 화포는 본래 불거촌(佛居村)이라는 이름을 가진 마을로써 불거촌이라는 이름은 진묵대사 같은 고승을 낳았다 하여 붙여진 것인데, 부르는 과정에서 불()은 우리말의 음독으로 불이 되어 불 화(火)자로 변했고, ()가 개로 변해 갯마을 뜻으로 풀어 포()자를 넣어 화포가 되었다는 것이다.
행정구역상으로는 이곳이 김제군 만경면 화포리 4 338번지가 된다. 4구로 나누어져 있는 넓은 화포리 일대의 어떤 동네가 정확하게 출생지인지는 아무도 모른다고 성모암의 주지 조갑술은 말한다.  다만 묘가 있는 이곳과 그 주변일 가능성이 높다는 말이다.

  
이 산의 등너머가 바로 만경강구(萬頃江口) 서해 바다다. 평야와 바다로만 인연이 되어졌을 뿐 불()을 상징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런데도 화포리(火浦里)라고 동네 이름을 붙인 것은 불거촌(佛居村)의 구음 때문임을 쉽게 알 수 있다. 이 사실은 다른 한 가지 이 지방의 독특한 속습으로도 뒷받침되고 있다.  이 지방에서는 들일을 하면서 밥을 먹을 때는 먹기 전에 먼저 한 숟가락을 떠서 "고시레"하고 깨끗한 풀 위에 뿌린다. '고시레'라는 말은 '고씨네'가 변해진 것으로 '고씨네'라고 말하며 입에 대기 전에 한 숟가락 떠내는 것은 '()씨 할머니께' 드린다는 뜻이었던 것이다.
  
진묵스님 어머니 묘는 무자손천년향수지지(無子孫千年香水之地)로 묘를 참배하는 향수(香水)가 지금도 끊이지 않고 있다. 그 묘가 진묵대사의 어머니, 즉 고()씨 할머니 묘인 것이다.  묘가 있는 곳은 산이라기보다 밭과 논으로 된 들 가운데 조금 불룩한 곳이다.

  
유앙산(維抑山), 조앙산(祖仰山), 주행산(舟行山)이라고도 부르는 이곳은 많지 않은 소나무의 얕은 숲이 아니면 산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표고가 10미터 안팎 밖에는 될 것 같지 않은 마치 함지박을 엎어놓은 것 같은 이 소나무 숲이 있는 둔덕의 동남쪽을 향한 면에 잘 손질된 봉분이 있고 그 옆에 서 있는 비석에 '진묵조사존비지묘(震默祖師尊驢之墓)'라고 새겨져 있다.
  
묘에서 왼쪽으로 비켜 내려간 곳에 성모암(聖母庵)이 있다. 이름그대로 성인인 진묵(震默)스님의 어머니를 고 묘를 관리하기 위해 있는 절이다.

  
·출가(出家)

  
스님이 일곱 살에 봉서사(鳳棲寺)로 출가했다는 것은 「유적고」에 기록되어 있다. 봉서사(風棲寺)까지의 거리는 12∼30리나 된다. 차라리 금산사(金山寺)가 더 가까운 거리에 있다.  지금은 차를 타고 신작로를 따라 가게 되므로 불거촌에서 금산사 가는 길이 가깝지가 않지만 걸어 다니던 옛날에는 금산사 가는 길은 봉서사(鳳棲寺)까지의 절반 정도 밖에 되지 않는다.  크고 역사깊은 금산사를 가까이에 두고 봉서사 까지 일부러 찾아가야 할 필요가 있었을까. 일곱 살 어린 나이로 12∼30리를 걸으면 빠르면 이틀 아니면 사흘은 걸려야 한다. 무엇인가 석연치 않은 점이있다.  그런데 비밀에 대한 해답이 있었다. 진묵대사와전<震默大師臥傳(1983. 保林社)>에 부록으로 실린 '삼례읍 설화'에 몇가지 수수께끼를 푸는 증언이 있는 것이다.
  
스님의 누님 나이가 스님보다 몇 살이나 위인지 알 수 없으나 스님의 누님은 스님이 일곱 살 때에 이미 출가하고 있었다.  그 시가가 익산군 춘포면 쌍정리라는 것이다. 스님은 일곱 살 때 누님집에 와 있었다. 모심을 때가 되어 논에 모를 심는 날이었으므로 스님은 누님네 모심는 논에 나가 구경을 했다.  그런데 모판에서 모를 추리던 사람들이 개구리를 함부로 죽이는 것이었다.  개구리를 잡아 땅바닥에 패대기치면 개구리는 두 다리를 쭉 뻗고 발발 떨면서 죽어갔다. 일곱 살 어린 소년의 눈에서는 눈물이 나왔다. 죽어가는 개구리가 가엾게 여겨져서 소년은 흐르는 눈물을 쉽게 멈출 수가 없었다.   언덕에서 돌아 앉아 흐르는 눈물을 닦고 있던 소년은 벌떡 일어나 그 길로 멀지 않은 곳에 있는 봉서사(鳳棲寺)를 찾아 갔다. 어린 소년의 걸음으로도 하루 안에 충분히 갈 수 있는 거리다.  봉서사 아랫마을 신기촌에서 춘포면 쌍제까지는 직선거리로는 12킬로 정도, 도로를 따라 봉정으로 돌아가도 15∼6킬로 정도 밖에 되지 않는다. 진묵스님은 태어날 때 (불거촌)일대의 초목이 마르는 이적을 나타내고 스승 없이도 스스로 아는 그 총명함으로 세상을 놀라게 하고 있었으므로 소년의 이러한 돌연한 행위를 누님은 말리려고도 하지 않은 것 같다.

○ 지혜와 수도(修道)

  
·스님의 지혜

  
부처님에 대한 일반적 이해가 대자비이므로 자비와 부처님은 우리민족에 있어서는 같은 의미를 갖는 말이다.  그 자비심 때문에 동네 사람들이 생불(生佛)이라고 불렀던 어린 동자는 총명하다고 말하기에 적당치 않은 지혜를 갖추고 있었다.
  
일곱살에 출가하여 처음으로 내전(內典)을 읽기 시작했으나, 마치 칼로 실을 끊듯 도리가 분명하고, 한번 눈에 스치면 곧 외워버렸다.   이러므로 누구한테 물어볼 일이 없어 스승이 필요 없었다. 어린 사미가 이렇게 공부하는 것을 절대 중들은 아무도 알지 못했다. 경전을 들여다 보는 것을 목격하더라도 그것을 배우기에는 너무 어리고, 물어보는 일이 전혀 없으므로, 어린 사미가 내전을 혼자 읽으리라고는 짐작도 못했던 것이다.
  
내전(內典)만이 아니라 외전(外典)도 스님은 보지 않은 책이 없었던 것같다.  <도감강목(道鑑綱目)>을 빌려 그집 하인에게 짊어지게 하고 절로 돌아오면서 한 권씩 뽑아 읽고는 다 읽으면 그것을 길가에 던져버렸다. 따라오는 하인이 그것을 다시 주웠다. 절 문에 들어서기까지 그것을 다 읽어버린 스님은 훌훌 빈 손을 털어 버렸다. 나중에 책 주인이 그 까닭을 물으니, 스님은 고기를 잡았으면 발을 버리는 것이라고 말했다. 책 주인이 아무권이나 뽑아들고 물어보니, 스님은 단 한글자의 착오도 없이 암기했다.  이러한 스님의 지혜는 세속인의 따를 바가 아닌 것이다.
 
  
·심신을 초탈하고

  -
한달동안 정()에 들다.
  
스님이 봉서사의 산내 암자인 상운암(上雲庵)에 계실 때의 일이다.
  
공부하는 대중들이 결제(結制)를 앞두고 모두 탁발을 나갔다. 결제기간중에는 참선도량에서는 일체의 출입을 엄격히 금지한다. 그러므로 결제기간중에는 사람이 죽어도 그대로 두었다가 해제가 되어서야 다비식을 거행한다. 이렇게 엄한 것이 선방(禪房)의 규율이었다.
  
상운암의 대중들도 그런 엄격한 규율 밑에서 진묵스님을 조실로 모시고 공부하고 있었으므로, 3개월 동안 참선을 하려면 그동안 먹을 양식을 미리 탁발해 두어야 하는 것이다. 스님만 혼자 남아 집을 보시게 하고 대중들은 한 달 동안을 기약하고 멀리 떠나 갔다. 탁발 나갔던 사람들은 충분히 탁발을 해서 상운암으로 돌아왔다. 진묵스님은 석고처럼 우두커니 앉아서 사람이 돌아 오는 것도 모르는 것 같았다.
  
가까이 다가 가서 보니, 스님의 얼굴에는 거미줄이 쳐져 있고, 무릎에는 먼지가 쌓여 있었다.  얼굴에 얽혀 있는 거미줄을 걷어내고, 무릎의 먼지를 털어내며, 이름을 대면서, "돌아왔습니다."고 인사를 드리니, 스님은, "너는 왜 그렇게 속히 왔느냐"고 물으셨다.  탁발을 내보내고 스님은 홀로 남아 앉은 채로 '()'에 들어버린 것이다.

  -
엄삼매 (嚴三昧)에 들다.
  
스님이 월명암(月明庵)에 오래 계셨다는 것은 앞에서 말했거니와 여기에 계실 때의 일이다. 이곳도 수도처로 신심있는 사람들이 아니면 올라가기 어려워 먹고 지내기가 힘들었다.  가을이 되어 대중 스님들은 탁발을 나가고 시자 한 사람만 남아 스님을 시봉하고 있었다. 그런데 동네에 초상(忌故)이 나서 시자는 그곳에 가야 했다.  시자는 때가 되면 스님께서 잡수시도록 공양을 준비하여 탁자 위에 올려 놓고 스님께 여쭈었다.
   "
여기에 공양을 차려 놨으니 때가 되면 스님께서 들어다 잡수십시오."
  
스님은 고개를 끄덕이시면서 방문을 열어 놓고 능엄경(楞嚴經)을 보시는 채로 그냥 계셨다. 시자는 곧 마을로 내려가 일을 다 보고 다음날 암자로 돌아 왔다.  돌아 와 보니 스님은 어제 그대로 앉아 꼼짝도 하지 않으셨다. 시자가 가까이 가서 보니 문지방에 얹힌 스님의 손에서 피가 흘러 그대로 말라 엉겨 있었다. 문지방에 스님의 손이 얹혀 있는데 바람이 불어 문을 밀어붙인 것이다. 스님은 손가락이 깨어져 피가 흘러도 그것을 알지 못한 채 삼매에 들어 계신 것이다. 탁자를 올려다 보니 어제 차려 놓은 공양이 그대로 있었다.
  
시자가 절을 하고 밤사이 문안을 올리니 스님은, "너는 왜 제사 참례 안하고 빨리 왔느냐"고 했다.  스님은 수능엄삼매(首楞嚴三昧)에 들어 하룻밤이 지나갔는데도, 시자가 돌아와 소리내어 문안을 드릴 때까지 그것을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스님은 마음도 몸도 다 벗어버리고 그것을 초월해 있었던 것이다.

  -
市場바닥에서 좌선
  
스님은 좌선을 조용한 곳을 찾아 하지 않고, 시끄럽고 편치 않은 곳을 찾아가 경계를 여의고 심신을 벗어나는 공부를 익혔다.  스님은 전주(全州)장이 서는 날이면 봉서사에 내려와 전주장에 갔다. 스님은 장바닥 시끄럽고 복잡한 곳을 누비고 다니면서 안식(眼識)경계를 여의는 공부를 했다.
  
그 어지러운 장바닥을 헤쳐 다니면서 코 앞만 볼 뿐 그 밖의 것에 눈을 빼앗기지 않았다.  그러니까 스님은 하루 종일 시장을 보되 본 것이 없는 것이다.  또 스님은 장바닥 시끄러운 곳을 골라 거기에 앉아 이식(哥識)경계를 여의는 공부를 했다. 눈에는 보이는 것이 없고, 귀에는 들리는 것이 없도록 경계를 떠나 버리는 것이다. 그렇다고 앉아서 잠자는 것이 아니다. 초롱초롱한 상태만 있을 뿐 보이거나 들리는 것이 있어서는 공부가 안 된 것이다. 눈을 감거나 귀를 막는 것은 물론 아니다. 그러나 이런 공부는 초기의 공부에 속한다.  진묵스님은 이렇게 장을 보고나서 공부가 잘 되었으면, "오늘은 장을 잘 봤다."고 하고, 잡념이 끼어 들어 눈이나 귀가 어지러운 일이 있으면, "오늘 장은 망쳤다."고 일어섰다.

  -
간수 한 독을 다 마시고도
  
심신에 전혀 구애를 받지 않는 스님의 초탈한 경계를 입증하는 또 하나의 재미있는 일이 있다.  진묵스님이 누님 집에 가 있다가 출가했다는 이야기는 앞서 했다. 스님은 익산군 춘포면 쌍정리에 있는 누님 집에 가끔 들렸다. 스님은 곡차()를 퍽 좋아했으므로 누님은 동생을 위해 곡차를 늘 준비해 두고 있었다. 어느 날 스님이 누님 댁에 들렸더니 누님은 집에 없었다. 밭일 나간 누님을 찾아가 안부를 묻고 돌아서려는데 누님이 집에 곡차를 준비해 두었으니 마시고 가란다.  스님은 그 좋아하는 곡차를 두고 그냥 갈 수가 없었다. 누님이 일러준대로 부엌으로 들어가 술이 담겨 있는 것 같은 조그만 독 뚜껑을 열고 독채로 들이마셨다. 스님은 기분이 좋아서 봉서사에 돌아와 정()에 들어 있었다.
  
들일을 마치고 석양이 되어 집에 돌아 온 누님은 부엌으로 들어가 동생이 곡차를 마시고 갔는지를 먼저 살폈다. 술독이 놓여 있는 곳을 살핀 누님은 깜짝 놀랐다. 술독은 그냥 있는데 그 곁에 있는 간수독의 뚜껑이 뒤집혀 있었다. 심장이 멈춰서는 것 같은 충격으로 두 독의 뚜껑을 벗겨봤다. 간수독은 비어 있고, 술독의 술은 그대로 있었다.
  
누님은 용수철처럼 뛰어나와 그대로 봉서사를 향해 달렸다. 이미 석양인데 삼십 리 길을 단숨에 뛰었다. 간수 한 독을 마시고 살아남을 사람이 누군가.  아마 황소가 마셨더라도 살지 못할 일이다. 누님은 자기의 잘못으로 동생이 간수를 마시게 됐다고 가슴을 치면서 정신없이 봉서사까지 뛰어간 것이다. 해가 서산 마루에 동그란 얼굴을 반만 걸쳐 놓고 부지런히 집으로 돌아가는 사람들의 발걸음을 재촉하고 있었다. 사람들이 내려오는 산길을 거꾸로 올라 봉서사에 당도한 누님은, 절이 조용한 것에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진묵스님이 죽었으면 절 안이 이렇게 조용할 리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진묵스님은 조실 방문을 열어 놓고 기분이 좋아 빙그레한 표정으로 앉아 있었다.  너무나 의외의 일에 누님은 또 한번 놀랐다.

  "
곡차가 알고 마시면 곡차가 되는 것이지 누님은 걱정도 많으십니다. 어둡기 전에 어서 돌아 가십시오."

  
살아 있는 동생이 한없이 고맙고 존경스러웠지만, 해가 져가는 시간에 삼십 리가 넘는 산길을 되돌아 가라니 야속하고 섭섭했다.   그러나, 동생의 신비스런 힘을 믿는 누님이었으므로, 그 길로 돌아서  집으로 왔다. 누님이 집에 다 올 때까지 서산에 꼭 그만큼 걸려 있던 해가 누님이 집에 들어서자 산 너머로 들어가 버리고, 갑자기 캄캄한 어둠이 꽉 차는 것이었다.
   
진묵스님이 해를 묶어 왔다고 속인들은 이 일을 더욱 재미있어 하지만, 스님은 염산성분의 맹독을 마시고도 그것을 인체에 유익한 곡차로 소화하는 자재한 정신력을 가졌다는 점에 더 유의해야 한다.

○ 신통력이 남다른 도승(道僧)

    
·되살아난 물고기

  
진묵의 기담이라면 먼저 어혼환생진묵(魚魂還生震默)의 이야기가 있다. 진묵이 이미 고승(高僧)이 되어서였다. 그가 속해 있던 절은 무척 가난했던 모양이다. 그래서 진묵이 길다란 배낭을 짊어지고 어느 고을인지 탁발을 나갔던 것이다.  머리에는 용수갓을 쓴 채 다 낡아빠진 장삼, 가사에 목탁을 치고 염불을 외우며 어느 마을에 당도하니 때 마침 마을 사람들이 한데 모여 큰 가마솥에 시뻘건 불을 지펴 놓고 많은 물고기를 끓이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들 가운데 누구 하나 이 고명한 진묵대사를 알아차릴 사람이 있을 수 없다.
  
오히려 장난기 많은 사람들은 장대같이 솟은 키에 땟국이 졸졸 흐르는 장삼자락을 움켜잡고 염불을 외우는 이 볼품없는 중을 한 번 골려줄 생각이 들었던 모양이다.  그 중의 한 사람이 지나가는 진묵의 걸음을 멈추게 했다. "여보 스님! 오뉴월의 이 긴긴 해에 탁발하러 돌아다니시기에 배도 좀 고프겠소. 그래 스님을 생각하여 이 생선국 한 그릇을 끓여 놓았으니 염이 있다면 한 그릇 해보시는 것이 어떻소." 중이라면 본래 오채를 금하는 법이고 또 더 더군다나 살생을 금하는데 어찌 생명있는 생선국을 먹을 것인가!  이것은 분명히 볼품없는 중을 한 번 골려주기 위한 장난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진묵은 태연하기만 하였다. "후한 인심이로다. 그래 당신들은 왜 먹지 않고 나에게만 먹으라는 거요?" 그러자 한 사내가 대답했다. "실은 여기 있는 사람들은 배가 터지라고 먹었는데 스님에게도 한 그릇 권하고 싶어서. 맛이야 둘이 먹다 하나 죽어도 모르리만큼 천하의 일품이니 염이 있으시면 한 그릇 해보시지요."해 놓고는 모두 깔깔 웃기까지 하는 것이다. "후한 인심이로다. 정 그렇다면 내가 먹어 볼만도 하이 ‥‥‥‥ 진묵은 이렇게 말하고 장삼과 배낭을 풀어 놓을 생각도 아니하고 그대로 부글부글 끓고 있는 가마솥 앞으로 성큼성큼 걸어가는 것이었다.  그리고는 이윽고 누가 옆에서 주는 큰 사발을 저만치 던져 버리고는 그 큰 가마솥을 불끈 두 손으로 쳐드는 것이 아닌가.

  
어느 장사가 그처럼 힘있게 물고기와 물이 가득 든 채 부글부글 끊고 있는 가마솥을 그렇게 가볍게 들 수 있을 것인가. 놀란 것은 물론 이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마을 사람들이었다.
   "
아니! 이 양반이 ‥‥‥‥ 조소에 경멸의 눈으로 바라보던 마을 사람들은 이 느닷없는 이변에 모두 입을 벌려 말을 잇지 못했다. 마침내 진묵은 그 가마솥 안에 든 물고기를 한 사발도 남겨 놓지 않고 꿀꺽꿀꺽 다 마셔버리고 만 것이다.
  "
, , 허허 ‥‥‥‥ 마을 사람들은 진묵의 이 호연지기(浩然之氣)와 역발산(力拔山)의 항우같은 힘에 그저 감탄할 뿐이었다.
   "
! 이만하면 어떻소! 덕택으로 잘 먹었소이다. " 이윽고 입을 딱 벌린 채 말 대답조차 못하고
있는 마을 사람들을 뒤에 두고 진묵은 똘물을 타고 한참동안 올라가더니 냇물에 벌건 엉덩이를 내놓고 변을 보는 것이 아닌가. 이 무슨 괴이한 변일까. 진묵의 변이 물위에 흘러내리는데 얼마 전까지 가마솥에서 푹푹 삶아져 그의 입으로 들어갔던 물고기들이 펄펄 뛰며 살아서 도랑으로 헤엄쳐 내려오는 것이었다. 꿈속인양 그 광경을 바라보고 있던 마을 사람들은 그 때에야 모두 무릎을 꿇고 사죄하는 것이었다.
  "
미흡한 인간들이 미처 고명하신 대사님을 몰라 뵈옵고 ‥‥‥ 황공 무지로소이다. 그러하오나 고기가 다 살아서 저렇게 펄펄 뛰어 노는데 어찌하여 저놈 한 마리는 꼬리가 잘라진 채 소생을 못하옵니까?" 하고 공손히 물었다.
   "
하나 ‥‥‥ 과연 그렇군! 그놈의 꼬리는 저 가마솥가에 있을 것이요." 아닌게 아니라 마을 사람들이 가마솥을 들여다 보았더니 거기엔 잘라진 꼬리 한 토막이 붙어 있는 것이었다.
  
마을 사람들은 다시 한 번 엎드려 잠시동안의 허물을 계속 사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이야기는 바로 진묵이 불도 도통했다는 경지의 이야기이기도 하겠으나 또 어혼(魚魂)이 인도환생(人道還生)해서 바로 진묵이 되었다는 이야기와 함께 전주지방과 김제, 만경지방에 아직도 전해지는 전설이기도 하다.

  
·8만대장경(八萬大藏經)과 진묵대사

  진묵
이 도승으로 그 경지를 높였을 무렵에는 가야산 해인사(伽飾山海印寺)에서 수도하고 있었는데 진묵은 해인사에 소장되어 있는 팔만대장경을 줄줄 암송 통독하였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진묵과 팔만대장경과 얽힌 또 하나의 이야기가 있다.

  
진묵이 완주 봉서사에 있었을 때였다. 춘하추동 절후를 맞춰 해인사를 가는 진묵이 그가 다녀온지 얼마되지도 않았는데 하루는 갑자기 상좌에게 해인사에 갈 행장을 꾸리라는 것이었다.  의아한 상좌가 "아직은 가실 때가 아니온데 어찌 행장을 꾸리라 하시옵니까?" 하고 물을 수 밖에.
그러자 진묵은 "글쎄! 해인사 팔만대장경판()에 필유곡절이 생길 것 같구나"하며 그대로 행장을 갖추고  해인사로 내 닿는 것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진묵이 해인사에 닿아 잠시 여장을 풀고 첫밤을 맞으려하니 동편의 경판을 소장해 놓은 장각(藏閣) 옆에서 갑작스럽게 불이 일어났는데 멈출줄 모르고 대장경을 소장해 놓은 장각으로까지  번지는 것이었다.
  
절 안의 수 많은 승려들이 이 난데없는 이변에 모두 나와 발을 동동구르며 어찌할 바를 모르는데 진묵만은 너무도 태연 자약하며 홀로 석가존(釋迦尊)의 불상(佛像) 앞에서 한참동안 기도를 드리고 있는 것이었다. 이윽고 기도를 마친 진묵은 솔잎에 물을 적시어 불길이 번지는 곳에 몇 방울을 뿌리니 이제까지 가는 비로 한 방울 두 방울 뿌리던 비가 갑자기 폭우로 변해 순식간에 불길이 잡아지는 것이었다.
  
이렇게 해서 팔만대장경판이 연소(燃燒)직전에서 위급을 면하고 보존될 수 있었던 것이다.

  
이 이야기는 해인사를 둘러싼 경상도 일대에 널리 퍼져 있는 진묵대사에 얽힌 전설이다.

   
·없어진 모기
  
진묵스님이 지금의 전주시 덕진구 우아동에 있는 용화산 일출암(日出庵)에 머물러 계실 때 절 밑 동네인 왜막촌(왜망실)에 어머니를 모시고 있었다. 왜막촌은 산골 동네로 개울이 있어 여름이면 모기가 많았다. 어머니가 모기 때문에 밤잠이 편치 않으신 것을 알고, 스님은 산신을 불러 모기를 다스려 주도록 당부했다. 그 뒤로 왜막촌에는 모기가 없어졌다. 적어도 진묵스님 이후(유적고)가 간행된 1850년까지 2백여 년간은 모기가 없었다.
  
이 밖에도 나무로 오리를 만들어 날려 보낸 일, 국수를 먹겠다고 졸라대는 대중들의 발우에 바늘 한 개씩을 넣어 주고 스님 발우에도 똑같이 바늘을 넣어 스님 발우에는 국수가 가득 차는데 대중들의 발우에는 바늘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는 일 등 신비스런 일들이 많다.
  
그러나, 이 모든 신통을 스님은 결코 대도(大道)라고 생각하시지 않으셨다는 점이 중요한 것이다.

  
○ 진묵대사의 호연지기와 인간애

   
·호연지기

  
진묵대사가 태어난 화포는 진봉면과 만경면의 바다를 면한 중간에 끼인 자그마한 포구로 고깃배들이 졸듯 떠 있고, 이름 모를 바닷새들이 한가로이 날며, 끝없는 수평선에 피어오르는 저녁노을이 휘황하도록 눈이 부셨다는 고장이다. 이런 아름다운 경치를 진묵은 어려서부터 익혔을 뿐만 아니라 그 웅대한 대자연에 심취되었던 것이 분명하다.
  
한국불교사화에 나오는 다음의 시() 한 수는 진묵의 너른 인간적 생애와 그의 호연지기(浩然之氣)를 충분히 엿보게 하는 한 대목이다.

   
천금지석산위침 (天衾地席山爲枕)
   
월촉운병해작존(月燭雲屛海作樽)
   
대취거연잉기무(大酵居然仍起舞)
   
겁혐장유괘곤륜(却嫌長褙軸掛崑崙)
 
   
하늘 이불 땅자리 山을 베개로
   
달을 촛불 구름을 병풍 바다를 술통으로
   
크게 취하여 벌떡 일어나춤을추니
   
긴 소맷자락 곤륜산을 걸릴까 하노라.
   
세상의 풍류와 호연지기가 한꺼번에 녹아 있는 시이다.

   
·인간애(人間愛)

  
진묵스님은, 승단이 전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세속기피 의식에 구애되지 않았다.  스님은 출가한 후에도 늘 어머니를 돌보고 '자매(姉妹)들에 대해서 깊은 우애를 가지고 있었다.
  
출가하면 부모형제의 인연까지도 끊어버리고 만나기조차 회피하는 승려의 세속기피사상은 수행단계에 있어서의 정신적 안정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므로, 선정(禪定)에의 출입과 삼매의 현전이 자재한 진묵스님에게는 있을 수 없는 것이었다.
  
이것은 인간애 넘치는 보살행이며, 인간본연의 상정적인 것이다. 진묵스님의 대 보살된 인간애를 엿보게 하는 (어머니의 發文)이 전해지고 있는 것은 다행한 일이다.

 始中十月之恩 何以報地 膝下三年之養未能忘矣. 萬歲上更加萬歲 子之心 猶爲嫌焉. 街年內 未滿百年. 母之壽 何其短也單飄路上 行乞一僧旣云溫矣 橫차闔中 末婚小妹 率不哀哉. 上壇7 下壇罷僧尋各雇. 前山疊後山重 魂歸何處 鳴呼哀哉」

「열달 동안 태중의 은혜를 무엇으로 갚으오리까. 슬하에서 3년동안 길러 주신 은혜 또한 잊을 수 없습니다. 만세 위에 만세를 더하여도 자식의 마음에는 오히려 불만이온데, 백년 생애에 백년도 못 채우시니, 어머님의 수명은 어찌 그리도 짧으십니까. 한 쪽 표주박을 들고 길에서 걸식하는 이 중은 이미 말할 것이 없거니와 규중에 비녀를 꽂고 들어 앉아 아직 출가하지 아니한 어린 누이야 어찌 슬프지 아니하겠습니까. 상단불공도 마치고, 제사도 끝나니 스님네는 제각기 방으로 찾아 들었습니다. 앞산은 첩첩하고 뒷산은 겹겹한데, 어머님의 혼은 어디로 돌아가셨습니까.  ! 애 닳으옵니다.

  
스님의 효심은 단연코 타의 추종을 허락치 않는 것이었다.  어머니가 서거하신 곳이 정확하게 어디인지는 밝히지 못하고 있지만, 그 곳이 불거촌이 아닌 것만은 확실한 듯 하다.  왜그러냐 하면 진묵스님은 어머니의 만년을 늘 가까이서 모셨고, 진묵스님이 주석하신 곳이 봉서사, 원등암, 일출암 등 전주 일원이고 월명암과 대둔산 태고사(太古寺)까지 연장하여 어머니의 만년을 생각하기에는 무리가 간다. 아무튼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에 진묵스님과 두자매가 모두 세상을 떠나더라도 길이 길이 만인의 향화 참배를 받게 되도록(無子孫千年香火之地: 자손 없이도 천년동안 향화를 올릴 명당지)를 찾아 불거촌에 어머니의 묘를 모셨다. 봉서사나 일출암에서 불거촌까지는 백리가 넘는 먼 길이다.
  
스님은 어머니의 유해를 모신 상여를 스님이 태어난 고향땅 불거촌까지 메고 가서 거기에 가서 안장한 것이다.  출가한 신분으로 어머니와 그 자매들에 나타내 보인 이 지극한 효와우애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인가.

    
·입적 (入寂)

   
이런 진묵대사도 말년에는 고향을 찾아 부안 변산에서 입산수도를 계속하다가 1592(宣祖 25아주 퇴락(頹落)되었던 월명암(月明庵)을 손수 중수하고 거기에서 그의 여생을 마쳤다고 기록이 전하고있다. 그리고 대사의 생향이기도 한 화포리에서 그곳 사람들에 의해 진묵대사를 영원히 추모하기 위해 주행 조앙사(舟行 祖仰寺)라는 조그마한 절간을 세워 오늘에까지 보존되어 나오고 있다.  그리고 원불포( =현 화포부락)에는 진묵대사의 어머니 묘가 아직도 동그랗고 크나 큰 무덤 그대로 남아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이 묘가 또한 '천년향화(千年香火)'의 명당으로서 진묵이 잡은 것이며 춘하추동 근 4백 년동안의 풍마우세(風磨雨洗) 가운데도 그 윤곽을 뚜렷이 하는 것은 역시 진묵 같은 대각의 대사가 직접 '무자손 천년향화(無子孫 千年香火)'의 명당을 잡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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