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환용(趙煥容)

  • 관리자
  • 2019.0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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곤욕 끝에 신문고(申聞鼓) 조 환 용 (趙煥容)

공은 1823 (純祖 23) 1 9일 김제군 월촌면에서 태어났다.
공은 익성(翊成)의 큰아들로 본관(本貫)은 김제(金堤)요 자()는 복행(福行)이며 ,()는 환복(煥福)이다.

공은 어려서부터 글을 좋아하고 효성도 지극하여 동네 사람을 대할때마다 한결같고 성()과 예(禮)로써 대하였다. 당시 조정에서는 납세(納稅)하는 세물이 잡다 하였던 바 호남지방에서는 농산물(農産物)을 등짐으로 지정(指定)된 창고에까지 운반하여야 함으로 그 노고(勞苦)가 어려웠다.  그리하여 선편(船便)을 이용하는 군현민(郡縣民)은 고통이 경감되지만 육로(陸路)로 군산(群山)창고 외에는 가까운 창고 시설이 없어 그 애로가 많았으나 지방관원(地方官員)들은 실정을 외면하고 있었다. 조정에서는 민성(民聲)을 듣기 위하여 신문고(申聞鼓)가 있었으나 수비관원 (守備官員)의 제지가 심하여 감히 신문고를 칠 엄두를 내지 못하였다. 그러나 공은 위험을 무릅쓰고 수통(數通)의 상소문(진정서)을 가지고 친척 한명과 상경하여 신문고를 치려다가 수비관원에 발각되어 혹독한 곤욕을 당하고 상소문마저 빼앗겼다. 그러나 끝까지 공은 필사적 노력 끝에 신문고를 두드리게 되었고 머리 상투밑에 숨겨둔 상소문을 궐내(闕內)에 전함으로 드디어 김제군 죽산면 해창에 창고가 세워지게 되어 군현민의 숙원이 이루어졌다.
그리하여 김제(金堤) 금구(金溝) 만경(萬頃) 태인(泰仁) 고부(古阜) 정읍(井邑) 6개군현 지방민의 장거리 등 짐의 큰 고통을 면하게 되었다.

그 후에 6개군현 사람들이 공의 공적을 기리기 위하여 김제군 죽산면 해창으로 가는 길가에 송덕비 (頌德碑)를 세웠으나 세월이 흐르는 동안 그 비가 망실(忘失)되었다. 그 후 후손들이 그 비를 찾으려고 수소문하다가 죽산 면민의 말에 의하여 김제군 부량면 월승리 초신동 부락입구 제방에서 발견하였다.

그 비문(碑文) (유학(幼學) 조환용(趙煥容) 영세불망비(永世不忘碑) )라 하여 있는데 전문(全文)내용은 다음과 같다.

(
위험한 형벌을 피하지 아니하고 (不避斧鑛) 주민의 사정을 상부에 전하였다 .(陳達隱情)  빈자를 구하고 도와주니 (懷貧挾海) 김제군민은 다 그 덕을 입었도다. (能被碧城) 읍리 사람은 그 덕을 칭송하여 (德頌邑里) 세 바칠 때마다 말하여 (貢物道程) 이 밝은 덕을 비에 새겨서 그 공을 길이 보존 하리라(銘功一憲) 길이길이 잊지않으리 (永世不忘)   1878 (高宗 15) 무인 (戊賁) 4월 일 입 () )

공은 그야말로 지행합일 (知行合一)을 몸소 실천한 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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