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일중(宋日中)

  • 관리자
  • 2019.01.08
  • 1499
서예의 대가 송 일 중(宋日中) (1632년∼1717년)
 
* 자 : 문명(文明)
* 호 : 송제(松齋
)
* 출생지: 김제시 백산면 두학


선생은 여산 송씨, 소윤공파 판결사(礪山宋氏少尹公派判決事) 복(復)의 11세 손으로 자(字)는 문명(文明)이고 호(號)는 송재(松齋)라 하였으며 아버지 감역 시헌공(監役時獻公)과 어머니 인동 자사공(仁同 張士恭)의 따님 사이 삼남이녀 중 세째 아들로 서기 1632년(仁祖 10년 壬申)에 김제시 흥사동 두악산하(斗岳山下)에서 태어났다.
선생이 태어나던 날 두악산봉(斗岳山峰)에는 초록빛 서기(瑞氣)가 일어나 공이 태어나자 근동(近洞)에서는 예사로운 일이 아니며 또한 평범(平凡)한 아이가 아닐 것이라고 하였다. 차차 자라자 품성이 단아(端雅)하고 온화인자(溫和仁慈)하여 마치 선학(仙鶴)과 같으면서도 재기(才氣)가 출중영민(出衆英敏)하여 글공부에 힘쓰고 스스로 몸을 닦아 팔세시(八歲時)에는 능(能)히 시명(時名)을 떨쳤을 뿐 아니라 기지(機智)도 뛰어나 세 사람의 어느 선비들이 시비(是非)하며 서로 다 투는 것을 벽(壁) 뒤에서 엿듣고 그 시비 장단 공절(是非長短公折)를 지적하며 서로 감정을 풀고 화의 할 것을 권하자 그 선비들은 우리가불행(不幸)하여 오늘날까지 서로 다투었다고 후회하며 화의하고서는 그 어린 아이의 판단에 놀래며 몹시도 부끄러운 일이라 하며 돌아갔다. 이를 본 백석 유선생 즙(白石柳先生楫)이 장차 큰 인물이 될 것 이라고 칭찬하였다. 또한 이 지방 성주(地方城主)인 창강 조선생 속(滄江趙先生涑)이 보고는 장래가 크게 촉망되는 인재(人材)라 하여 이때부터 창강 문하(滄江門下)에서 사서 삼경(四書三經)과 주역 당송사(周易唐宋史) 등 제자백가서(諸子百家書)에 정진하여 통달하고 특히 서도서법(書道書法)에 능(能)하여 초서(草書), 예서(讀書), 대자(大字)등 오체(五體)에 모두 독보적(獨步的)인 경지로 신묘(神妙)하여 한석봉(韓石峰) 버금가는 대명필(大名筆)이란 명성이 자자하였다. 이렇듯 서한여류(書翰如流)의 필법이 신묘(神妙)하여 전국(全國)의 비문(碑文)이나 현판(懸板)의 대부분 글씨가 선생의 손으로 쓰여졌다.
종실 임양군 한(宗室臨陽君韓)이 중국북경에 자주 왕래하면서 선생의 글씨를 가지고 갔는데 중국인들이 이 글씨를 보고 크게 칭찬하였을 뿐만 아니라 황제(皇帝)께서도 보시고는 크게 칭찬하였다. 또 숙종대왕(肅宗大王)의 명령이 있어 송백능한(松柏凌寒)이라 크게 써서 바치니 숙종대왕(肅宗大王)께서는 비단이며 여러 가지로 크게 답례까지 하였다. 또한 해인사(海印寺) 현판(懸板)을 크게 써서 붙였는데, 해인사가 원인 모를 불이 일어나 승려(僧侶)들이 손을 댈 사이도 없이 절 모두가 탔는데도 유독 공의 글씨가 새겨진 현판(懸板)만은 타지 않고 떨어져 남아 있기로 사람들이 가연 신필(可然神筆)이라 하기도 하였다.
선생의 아버지 감역공(監役公)이 병을 얻어 백약(百藥)이 무효하고 겨울철에 이르자 병세는 더욱 위독하여 의원이 아무래도 산 거북이 있어야 병이 낫겠다 하니 공이 울며 엄동빙판(嚴冬氷板)을 이리 저리 돌아다니다가 어느 한곳에서 빙판(氷板)을 깨고 산 거북 한 마리를 잡아다가 복약(服藥)케 하였다. 아버지 병이 위급하였을 때에는 공의 손가락을 잘라 피를 입에 넣으니 삼일간이나 더 연명(延命)하다가 운명(運命)하니 치장후(治葬後) 묘 옆에다 초려(草廬)를 짓고 3년동안 묘를 지키었다. 하루는 칠흙같이 어두운 밤중에 급히 집에 볼일이 있어 오려는데 어디서 흘연히 불빛이 나타나 십리길을 비추어 인도하여 주기도 하였다. 또 길제일(吉祭日)을 앞둔 어느날 개가 새끼를 배어 낳을 징조가 있어 개의 순산을 근심하고 있는데 밤중에 도적이 들어와 밥과 옷가지 등을 가져가려고 하는 것을 누워서 보고는 도적에게 말하되 다른 것은 가져가되 길제(吉祭) 때 입을 상복(喪服)은 그대로 두고 가라고 타이르자 도적들도 그 위품에 감동되어 그대로 돌아갔다고 전한다.
선생은 서기 1669년 현종 십년 기유(顯宗 十年 己酉)에 생원시(生員試)에 합격하고 동춘 송준길(同春宋浚吉)의 천거로 선원능참봉(璿源陵參奉)을 지냈으며, 서기 1682년(肅宗八年 壬戌)에는 장사랑북부참봉(將仕郎北部參奉)으로 연가종사승사통사랑(連加從仕承仕通仕郎)이고 그 이듬해에는 가무공선교랑(加務功宣敎郎)에 또 이듬해 갑자(甲子)년에는 가승훈랑역(加承訓郎歷)에 사옹원봉사(司饔院奉事)까지 지냈으나 남하(南下)하여 집에 온 후로는 일체 사양하고 오로지 학덕(學德)에만
힘을 쓰고 있던 중 호남거거(湖南巨渠)의 김제 벽골제(金堤碧骨堤)가 홍수(洪水)로 둑이 무너져 많은 농경지가 유실되고 피해가 많았던 것을 관찰사(觀察使)와 수령(守令)에게 고(告)하여 도움을 받고 사재(私財)를 들여 둑을 수리하여 많은 농민들을 구제하니 사람들이 그 둑을 송지거 (宋之渠)라 하였다.
선생은 서기 1713년(肅宗 39年 癸己)에 향년 82세로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올랐으며 다시 서기 1715년(肅宗) 14년 乙未에는 절충장군 용양위 부호군(折衝將軍龍讓衛副護軍)을 제수받기도 하였다.
선생은 집 뜰앞 (老松)한 그루 주위를 여러 가지 꽃으로 가꾸고 대나무를 심어 송창일월(松窓日月)이요, 죽헌청풍(竹軒淸風)으로 노송(老松) 밑에서 시(詩)를 읊으며 소일(消日)하며 자호(自號)로 송재(松齋)라 하였다.
선생은 전주 이공 통덕랑 원종(全州李公通德郎元宗)의 따님과 결혼하여 3남 2녀를 두시고 서기 1917년 (肅宗) 43년 (丁西)에 향년 86세로 김제시 흥사동 두악산하에서 타계(他界)하여 두악산 선영하(斗岳山 先瑩下)에 안장(安葬)되 었다.
이외 선생의 행적(行績)이나 문헌(文獻)이나 서필(書筆) 등은 이재집(肄齋集)과 근역서화증(槿域書畵徵) 또는 전북도지(全北道誌)등에 실려 있다.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