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흥갑(牟興甲)

  • 관리자
  • 2019.0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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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품 동지(從二品 同知)의 벼슬을 제수받은 모 흥 갑 (牟興甲)
 
모흥갑은 송흥록 보다 두 세 살 아래의 후배로 전하며 그는 전라북도 김제시 죽산면에서 출생하였다. 모흥갑은 가창에 있어 천부의 재질을 타고 났으며 성음이 월등하게 청미하였다. 12세 때 입산하여 10년 공부를 마치고 대성한 명창이다.
모흥갑의 특징은 적벽가였고 적벽가만은 어느 누구도 모흥갑 앞에서는 함부로 입을 열지 못할 정도로 당대의 독보라고 평한다. 이 적벽가는 중국의 삼국지에서 적벽대전을 주로 엮은 것인데, 적벽가는 서장, 도원결의, 삼고초려, 공명출려, 공명의 지혜, 동남풍 빌고, 조조의 신세, 화용도, 관우의 관용 등 열 대목으로 구분하고 있다.
적벽가의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유방(劉邦)이 漢나라를 세워 400년에 이르자 후한 헌제(後漢 獻帝)때에 난신적자가 조정에 있어 기강이 문란해지고, 곳곳에서 도적이 일고 백성은 도탄에 빠져서 허덕일제, 유비(劉備), 관우(關羽), 장비(張飛) 세 사람이 도원결의(桃園結義)를 하고 공명(孔明)을 삼고초려(三顧草廬)하여 겨우 출려케 한다. 공명이 강동(江東)으로 건너가 주유(주紬)를 격동시키고, 주유는 공명을 시기하여 화살 10만 개를 만들라 하여 죽이려고 획책하였으나, 공명은 노숙(魯肅)을 데리고 조조(曺操)영에 가서 뇌고눌함(儡鼓訥喊)하여 조조 군사들이 쏜 화살 10만 개를 얻어다가 주유를 준다.
이런 일이 있은 후 주유는 더욱 공명을 시기하고 증오하게 된다. 한
편으로 조조는 방통(龐統)의 연환계로 적벽강에 수백 척 전선을 굳이 모아 육지같이 만든 후에 강동을 일격에 무찌르려 한다. 그러나 어찌 알았으랴, 공명이 빈 동남풍으로 조조의 100만 대군은 불에 타서 죽고 여지 없이 패망한다.
조조는 구사일생으로 혈로를 얻어 허저(許猪), 장요(張遼)와 더불어 정욱(程昱)은 패잔병을 거느리고 산천이 험준한 화용도 좁은 길로 허무 단신 걸어갈제 관우를 만난다. 조조는 어이없이 꿇어 엎드려 살려달라고 애원한다. 전날 관우에게 베푼 은혜를 생각해서라도 목숨만 살려달라고 애원 복걸하여 겨우 살아난다. 관우의 너그러운 마음씨로 조조는 죽을 목숨이 살아서 화용도를 벗어나 허도(許都)로 간다.
이 적벽가는 관운장의 어진 의리를 엮은 것으로 남성적이어서 신나고 흥진 노래 이다.
모흥갑이 10년 공부를 마치고 세상에 나오자 그의 명성은 금방 원근에 자자하였다. 헌종 13년(1847) 당시의 영상 김좌근(金佐根)의 부름을 받고 상경하여 헌종 앞에서 그 특장인 장판교 대전 대목을 불렀던 것이다.
이윽고 삼경지나 풍세가 일어난다.
때때때 나팔소리 쿠쿵쿵쿵 뇌고치며
번개같이 달려들어 적벽에 불이야
고함쳐 외친소리 천지가 진동한다.
한번을 불이 번쩍 하늘이 우루루루
두번을 불이 번쩍 태산이 뒤집는 듯
세번을 불이 번쩍 광풍이 대작하여
화광이 충천하고 연기는 자욱한데
물결은 출렁 전선위 돛배 와지끈질끈
용총활대 뇌화살대 삼발다리 조판풍대
물에 풍 꺼꾸러지고 기치펄펄
장막에 불이 들어 방패통소기 차마
담소 나팔 북 장구 광쇠 쾅
월그렁 질그렁 산산이 부서져
풍파강산 화염중에 설설히 흩어지니
어젯밤 장담하던 조조 홍안이 숯빛같고
정욱 얼굴 동빛이라
허저는 창을 들고 장요는 활을 들고
일엽소선 바삐 저어 조조를 얼른 잡아
태우고 천둥지둥 도망간다
수만 전선 간곳 없고 적벽강상이 뒤끓어
불난리가 이아니냐
가련할 손 백만 군병 날도뛰도 못하고서
일시함몰 다 죽을제 숨막히고 기막히고
살도 맞고 창에도 찔려 앉아 죽고 서서 죽고
울다 죽고 웃다 죽고 밟혀 죽고 맞아 죽고
원통히 죽고 불쌍히 죽고 애써 죽고 똥싸고 죽고
가이없이 죽고 성내어 죽고 술김에 죽고
재담하다 죽고
무단히 죽고 실없이 죽고 열없이 죽고
함부로 덤부로 죽고 땡대그르를 궁글어
아뿔사 가슴탕탕 두드리며 죽고
한 놈은 선두에 우뚝 나서며 고향을 바라보며
앙천통곡 호천망극 어머니 외우고 죽고
한군사 내달아 나는 남의 오대독신이로다
팔십당년 늙은 모친 어느날에 만나볼고
내가 아무 때라도 이 봉변 당하면은
먹고 죽으려고 비상사서 넣느니라.
실전을 방불케 하는 모흥갑의 완숙한 기량에 헌종 임금을 비롯하여 삼정승 육판서 이하 어전에 나열한 조신들은 지위와 체면을 잊어버리고 흥분하여 탄성을 울리면서 열광하였다고 한다.
헌종은 탄복하고 그 기량을 가상히 여겨 모흥갑에게 종이품(從二品)의 동지벼슬을 제수하였다. 상민으로서는 왕 앞에 나설 수 없었으므로 비록 명예직일지언정 임금의 총애를 받고 벼슬까지 제수받은 것은 모흥갑이 최초의 일이다. 모흥갑은 공경대부의 부름을 받아 명성을 유감없이 떨쳤고 행하(보수)도 수만 냥 벌었다고 한다.
서울에서 반 년동안 묵고 있다가 당시 평양감사로 있었던 김병학(金炳學)의 청으로 평양으로 내려갔던 모흥갑은 연광정에서 소리할제 <덜미소리>를 냅다질러 십 리 밖까지 들리게 하였다 함은 유명한 이야기로 전하고 있다. 그 후 모흥갑은 다시 서울로 올라왔고 귀향할제 헌종의 윤허를 얻어 김제 죽산에서 지금의 전주 시내인 완주군 난전면 귀동으로 이사하여 전라감사의 비호를 받았다.
전주신청에서는 헌종의 총애를 입고 벼슬까지 받았으며 즉시 전라감사의 알뜰한 비호를 받고 있는 국창 모흥갑을 전주로 맞이함은 신청전계원의 영광이요, 자랑이라 하여 계원의 총의로서 모흥갑을 전주신청의 대방으로 추대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그 당시 모흥갑의 명성과 인기도 대단하였으나 불세출의 절창 송흥록의 명성과 인기도는 더욱 유명하였다.
그 때까지 모흥갑은 송흥록의 명성을 진작부터 들어왔지만 직접 만나서 그의 소리를 들어본 일은 없었던 것이다. 송흥록과 모흥갑의 소리를 들어서 아는 사람들은 두 사람을 비교하고 이렇게 평하였다.
「모 명창 과연 명창이야」
「명창은 명창인데 송 명창만은 못하던데」
「어떤 점이 송 명창만 못하다는 말인가」
「첫째로 인물이 다르단 말일세. 모 명창의 소리는 청중을 흥분케는 하지만 송 명창처럼 청중을 웃기고 울리는 재주는 없지 않는가」
이와 같이 이구동성으로 송흥록의 칭찬이 우위이므로 모흥갑은 슬며시 송흥록을 새암하는 생각이 들었다. 사계(斯界)에서는 소리를 「학습」이라고도 하여 「학습쟁이 오기」란 말이 있어 왔다. 예로부터 소리하는 사람들은 상대방의 소리를 깎아내리고 얕잡아보는 것이 보통이었다.
「그게 소린가. 이면도 모르고 하는 소리가 무슨 놈의 소리여.」
「제까짓게 잘하면 얼마나 잘할까. 기껏해야 노랑목이나 쓰는 또랑 광대지」
하고 헐 뜯으면서 모직 자기의 소리만이 격조높은 명창의 소리인 듯이 추켜세웠다.
이것을 이른바 학습쟁이 오기(傲氣)라고 하였다. 이 오기는 남에게 지기 싫어하는 마음일 것이리라. 그러나 모흥갑은 그러한 오기를 부리는 성품은 아니었다.
「도대체 송흥록 선배님은 소리를 얼마나 잘하기에 이렇듯 명성이 진천동지 (震天動地)하는 것 일까!」하면서 모홍갑은 송흥록을 한 번 만나서 기예를 겨루어 보고 싶은 마음 뿐 이었다.
당시 모흥갑의 수행고수 이던 주덕기(朱德基)-훗날 송흥록의 고수가 되었다가 소리공부 열심히 하여 명창이 되었음―에게
「송 선배님이 그토록 유명하시니 한 번 만나뵙고 싶구만.」하고 모흥갑이가 말을 하자 주덕기는
「유명하면 얼마나 유명할랍디까. 그 소리가 그 소리제.」하고 주덕기는 대뜸 반발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모흥갑은
「아니야, 그렇게 할 말은 아니네. 소리란 부르는 사람보다 듣는 사람이 더 잘아는 것일세」하고 나무랐다.
그 후로 얼마 안 되어 모흥갑은 송흥록과 한자리에서 맞붙게 되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전라감사의 생일연 때 전주감영에서 송흥록과 모흥갑을 동시에 청하였기 때문이다. 선화당에는 감사를 위시하여 각 고을 수령방백과 관기들이 자리를 메웠고, 넓은 뜰에는 민중이 운집한 가운데먼저 모흥갑이 적벽가를 불렸다. 이때의 모흥갑 고수는 주덕기였고, 송흥록의 고수는 그의 동생인 송광록이었던 것이다.
모흥갑은 그의 특장인 적벽가를 불렀는데, 실전을 방불케 하는 장판교대전 대목에 이르러 관장과 청중은 다같이 손을 쥐고 흥분하였고 박수갈채와 탄성이 장내를 뒤엎는 듯하였다.
다음으로 대상에 나선 송흥록을 바라본 청중은 「와아,! 선풍도골이다」하고 그의 풍채에 감탄을 연발하였다. 송흥록은 단가로 목을 풀고 춘향가를 처음부터 시작하였다.
청중은 송흥록의 소리에 혼취되어 정신을 잃고 있다가 광한루 대목에서 춘향을 데려오라는 이도령의 분부를 받고 방자가 춘향을 위협하며 으름장을 놓는 대목, 책방으로 돌아온 이도령이 해지기를 애타게 기다리면서 천자 뒤풀이 할제 방자의 익살에 청중은 마냥 즐거워하였고, 사랑가 대목에서는 한결같이 황활하였다가, 이별가 대목에서는 측은한 동정으로 눈시울을 적셨고, 신관사또 수청을 거절하다가 춘향이가 곤장을 맞는 십장가 대목에 이르자 청중은 다같이 격분하여 치를 떠는가 하면,옥중가로 진입하자 청중이 다 눈물을 흘렸으며, 더구나 기생들은 좌우 체면을 잃고 흑흑하고 흐느껴 울었고, 소리가 귀곡성에 이르자 청중은 무서워 소름이 끼치는 듯 몸을 떨기까지 하였다.
이와 같이 청중을 즐겁게 하고 기쁘게 하며 격분케 하면서 웃기고 울리는 송흥록의 절등한 기예는 필설로써 도저히 표현하기 어려울 정도였던 것 이 다.
모흥갑은 송흥록 앞에 자연히 머리가 숙여지는 것을 어찌할 수 없었다. 무엇보다도 송흥록의 뛰어난 인물치례와 격조 높은 창제, 그의 고매한 인격과 기예의 절륜은 모흥갑이 도저히 미치지 못할 바였다. 그 후 모흥갑은 전라도 각 고을 신청의 대방을 소집하고 전주신청에서 계원 전원이 참례한 자리에서 송흥록을 가왕으로 떠받드는 봉대식(奉戴式)을 거행하였던 것이다. 이리하여 송흥록을 가왕 또는 가중왕이라 하였다.
모흥갑은 만년에 후진을 지도하면서 여생을 보냈는데, 어느날 전주장 에 가다가 다가정(多佳亭)에서 수천 군중을 모아 놓고 주덕기가 소리하는 광경을 목격하였다.
「송흥록과 모흥갑에 못지 않는 명창이다. 」하고 추켜 올리자 주덕기는 방자하여쪄서
「모흥갑의 소리가 그게 소리입니까? 송흥록의 소리는 더 말할것이 없지요.」하고 그 학습쟁이 오기로 자기야말로 천하의 명창인 듯이 우쭐대기 시작하였다.
그 때까지 얼굴을 가리고 청중 뒤에서 듣고 있었던 모흥갑은 괘씸한 생각이 들어 정각 위로 올라갔다. 청중은 모흥갑을 알고 박수갈채로 환영하였으나 주덕기는 몹시 당황하였다. 모흥갑은 청중 앞에서 주덕기를 꾸짖었다.
「나 모흥갑은 모자라는 소리로되 송흥록 선배님은 자타가 공인하는 불세출의 절창이며 가왕으로 떠받들고 있거늘 그대의 소위는 무례하기 짝이없다. 내 춘향전 중에서 이별가 대목을 한 번 부를 것이니 따라 불러서 그 승점을 표시해 보라.」하며 앞니가 다 빠진 모홍갑은 순음(盾音)으로 장쾌하게 불렀다.
주덕기는 원래 모흥갑의 수행 고수였다가 후에 송홍록의 고수 노릇을 하였고, 송흥록이 상경한 뒤로 소리 연마에 지력하여 명창의 반열에 끼기는 하였으나, 송흥록과 모흥갑에게는 도저히 미치지 못하였다. 주덕기는 입을 열지 못하고 모흥갑에게 그저 사죄하였다. 그 후로는 주덕기가 전주지방에 나타나지 않았다고 하거니와 모흥갑의 (순음조)가 특이하고 아름다운 것이 타인은 따르지 못할 바라 하여 후일 주덕기의 방창으로 전파되었고, 이것이 유명하게도 앞니 없는 순음으로 모방하여 오늘에 전하는<강산제더늠>인 것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대명창이었던 모흥갑의 의발(衣鉢)을 이어 받은 사람이 전하는 바 없으니 참으로 애석한 일이라 하겠다.<판소리 200년사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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