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초(朴礎)

  • 관리자
  • 2019.01.08
  • 1458
박 초 (朴 礎) (1367년∼1454년)
 
* : 토헌(土軒)
* 출생지: 김제시 입석동


선생은 1367년(고려 공민왕 16 년)에 김제시 입석 동에서 태어나 1454년에 88세로 별세하였다. 호는 토헌(土軒)이며 본관은 함양이다. 선생은 어려서부터 포은 정몽주 선생의 문하에 들어가 학문을 닦았으며 15세에 진사에 합격하여 태학(太學)에 입학하였다. 선생은 손수 '척불소수천언'이란 불교숭상이 지나침을 내용으로 하여 나라에 올리니 선생의 명성이 떨쳤으며 급기야 퇴거하여 흙집을 짓고 토헌이라 호를 짓고 성리학에 몰두하였다. 1396년에 문과에 급제하고, 1399년에 중시(重試)에 합격하여 좌헌납을 거쳐 1403년에 수찬으로 이조정랑이 되고, 사복시첨정, 사헌부장령, 교서관판교를 지냈다. 임금과 동조(同朝), 동갑(同甲)의신하 28명이 갑계(甲契)를 모으니 선생이 열 번째로 선장의 받음이 있었다. 이듬해에는 승정원 우부승지로 올
라 대사간이 되었는데, 백성들에게 짐이 되는 팔로호포를 특히 면제할 것과 모든 진축수제를 없앨 것을 상소하여 윤허를 얻었다. 1413년에 해진 군사에 임명되었으나 나아가지 않다가, 1415년에 전라도순사를 제수 받아 관찰사 박습 등과 함께 군민 1만 명을 동원하여 김제 벽골제를 수축하니 태종 임금이 그 노고를 가상이 여겨 전토와 장확을 주고 총애하였으니 주민들이 사급평 또는 박공제(朴公堤)라 하였다. 1421년 전라도 관찰사 장윤화가 벽골제 개결(開決) 즉 인공적으로 벽골제를 파괴할 것을 건의했다. 이렇게 조의가 기울자 당시 전라도 수군도 절제사였던 선생은 상왕에게 상서를 올려 장윤화의 파괴론과 정반대인 국가적으로나 농민들에게 유익한 점을 낱낱이 열거하여 강력한 상서를 올렸다. 그러자 이조 판서 허지는 선생의 의견을 따를 것을 청하였다. 영의정 유정현 등 일동은 전자에 장윤화의 의견에 찬동한 체면이 있어서인지 모두 "박초와 장윤화의 의견이 부동(不同)하니 마땅히 조정 관리를 파견하여 두 사람과 함께 심사하여 상문토록 합시다. " 하고 말하였다 한다. 사적 111호로 지정될 때 벽골제의 사적 비문을 지은 사람을 그 동안 몰랐었는데 연전의 사적비 후면의 탁본에서 역시 출중하였음을 보여 주고 있다. 뿐만 아니라 서예에도 뛰어나서 대가로 알려졌다고 한다. 선생의 벼슬을 정리하면 전라도 수군도 절제사를 지냈고, 이어서 우군 통제와 경상수군안무처치사를 제수한 후 1424년에는 천조의 진하사가 되었다. 이듬해에는 관서 안무와 함길, 경기 양도 백을 역임했다. 1432년에는 강계절제사로서 변방에 침입한 야인들을 토벌하였으며, 1439년에는 이조판서 겸 예문관 대제학에 올랐다. 이 때 선생은 성삼문, 신숙주, 정인지 등을 조정에 천거하기도 하였다. 80이 넘어 비로소 향제로 퇴거하여 시문(詩文)을 즐기다가 별세하였는데, 1967년 유림들이 모덕사를 창건하고 선생을 배향하였다. 선생의 시, 시문을 모은 문집으로 '토헌집'이 발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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