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의중(朴宜中)

  • 관리자
  • 2019.0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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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 의중 (朴宜中) (1337년-1403년)
 
* : 자허(子虛)
* 호 : 정제(裏齋
)

선생은 밀양 박씨(密陽 朴氏)로 고려 사문진사 휘 원(高麗四文進士 諱元)의 8세 손이며 밀직부사상호군 우정승 휘 화(密直副使上護軍右政承 諱華)의 손자로 처음에는 실(實)이라 불렀으나 의중(豈中)이라 이름하고, 자(子)는 자허(子虛)요, 호(號)는 정제(貞齋)라 하였다. 판도총랑 용궁현감 휘 인기(版圖總郎龍宮懸監 諱仁紀)의 아들로 서기 1337년 고려 충숙왕(高麗忠肅王) 6년 정축(丁丑)년에 태어났다. 선생은 어려서부터 천품(天稟)이 온화(溫和)하고 명민(明敏)하며 청렴강직(淸廉測直)하여 일찍이 글에 능(能)하신 할아버지와 아버님 밑에서 글을 배우고 덕행(德行)을 익혀 학문(學問)이 깊고 문장, 문필(文章, 文筆)이 능(能)하여 서기 1362년 고려 공민왕(高麗恭懲王) 11년 임인(壬寅)년에는 26세의 나이로 장원급제(壯元及第)하여 전의직장(典儀直長)이 되고, 계속 벼슬이 올라가 헌납을 거쳐 사예(司藝)에 이르고, 다시 문하사인(門下舍人)에서 좌사의대부(左司儀大夫)를 거쳐 대사성겸 직제학(大司成兼直堤學)까지 지냈다. 선생이 관직(官職)에 있을 때에 많은 업적과 공을 세우기도 하였으나, 그 중에서도 특히 서기 1388년 우왕(偶王) 14년 무진(戊辰) 2월에 명(明)나라에서는 철령태북(鐵嶺追北)이 본시 원(元)나라의 땅이라 하여 철령에 동북면 국경감시소(東北面 國境監視所)를 설치(設置)하려는 것을 알고 국서(國書)를 갖고 중국(中國)에 사신(使臣)으로 가서 철령입위(鐵嶺立衛)의 부당성(不當性)을 주장(主張)하여 다시 고려판도(版圖)로 돌아오도록 대임(大任)을 완수(完遂)하는 큰 일도 하였다. 또한 선생은 계일예소(戒逸豫疏)와 서운관(書雲觀)에서 도선(道禪)의 비결(秘訣)을 인용(引用)하여 도읍(都邑)을 한양(漢陽)으로 옮기려하는 것은 옳지 못한 일이라고 주장하고 천도반대상소(遷都反對上疏)를 낸 것은 유명(有名)한 일이다. 선생은 포은 정 선생(圃隱 鄭先生), 목은 이 선생(牧隱 李先生), 야은 길 선생(冶隱 吉先生)들과 자주 문장, 문필(文章, 文筆)과 주장(主張)을 같이 하며 려말기(麗末期)의 국운(國運)을 말하고 서로 나아갈 뜻을 밝히기도 하였으나, 국운은 기울어 서기 1392년 임진(壬辰) 7월 16일 고려 공양왕(高麗 恭讓王) 4년 에 고려가 망(亡)하니 새로이 이씨 왕조(李氏王朝)가 들어섰다. 선생은 이씨 왕조가 들어서자 충신열사(忠臣烈士)가 어찌 이씨(李氏)들의 신복(臣僕)이 될 수 있겠는가 하고 조복(朝服)을 벗어 걸고 평복(平服)으로 변장(變裝)하고 전라도로 내려와서 오늘날의 김제시 흥복동(興福洞)에서 은거(隱居)하였는데, 지금도 선생이 살던 집과 훈몽(訓蒙)하던 강당이 있으며 '박성(朴姓)메'라는 마을 이름조차도 그대로 불러지고 있다. 선생이 숨어서 살며 지낼 적에 복거(卜居) 라는 시(詩)를 읊었는데 여기에 소개(紹介)하면 다음과 같다「숨어서 사는 그 맛을 누가 알리요(畿居幾味小人知) 나흘로 사는 내 집을 안타까이 여기노라(獨愛吾盧護契籬) 아침 바다 구름 보고파 창문을 크게 열고(朝 望海雲開戶早) 밤마다 산 위에 달빛이 그리워 발을 늦게 내리네(夜隣山月下叢邏) 흥이 나면 손님과 새로 익은 술을 마시고(興來邀客嘗新釀) 글을 읊다가는 아이를 불러 먼저 지은 시를 고치기도 한다(吟就呼兒改舊誇) 조그마한 벼슬자리에 늙고 병들었으니(因病拘開身己老) 공명과 업적이 성세에 도움이 되지 못함이 부끄러울(愧無功業補明詩)따름이다」 선생은 처음에는 연안 이씨(延安 李氏)에게 장가들고, 다음으로 청주 한씨(淸州 韓氏)에게 장가들어 경문, 경무, 경찬, 연, 행(景文, 景武, 景贊, 衍, 行) 등 다섯 아들들을 두고 언제나 지필습서(指筆習書)와 글을 읽고 아이들의 가르침에 힘쓰다가, 서기 1403년(太宗 3년 癸末)에 김제시 흥복동에서 향년 67세로 세상을 떠나니 김제시 삼수동에 장원(葬原)하고 통정대부성균관대사성 안동 김복한(通敢大夫成均館司成 安東金福漢)이가 비문(碑文)을 짓고 승록대부판돈령원사 해평 윤영구(祿大夫判敦寧院事 海平尹寒求)가 글을 썼다. 선생이 살아 있을 때 이씨 조정(李氏朝廷)에서 백방(百方)으로 퇴거(退去)를 탐문(探問)하여 알고서는 검교참찬의정부사(檢校參贊議政府事)의 벼슬을 내리었으나 받지를 않았다. 선생이 타계(他界)한 후에 다시 어필(御筆)로 문경(文敬)이라 시호(諡號)하고 매년 향사(每年享祀)토록 명(命)이 내려 후손(後孫)들이 그대로 따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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