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홍섭(金洪燮)

  • 관리자
  • 2019.0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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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형수의 대부(代父)였던 명법관 김 홍 섭 (金洪燮)(1915년∼1956년)
 
사형수(死刑囚)들의 대부(代父)요, 청렴결백한 명법관(名法官)으로 길이 추앙 받고 있는 선생은 1915년 금산면(金山面) 원평리(院坪里)의 가난한 농가의 아들로 태어났다.
품성이 착하고 인정이 많았던 선생은 늘 노타이에 검은 고무신을 신고 다니는 어려운 생활을 계속했다. 그러나 그는 6.25때 친구의 아들에게도 매달 학자금을 얼마씩 보내곤 했었다. 선생이 젊은 법관들에게 늘 타이르는 말은 "한 인간의 생명을 법관 자신의 생명과 비교하여 보라"는 것이었다. 서울 고등법원장으로 재직할 때 관용차를 타지 않고 늘 걸어다니는 것을 보고 다른 사람들이 건강을 위해 그러느냐고 물으면 그는 "공직을 그만둔 후를 생각해서"라고 소박하게 대답했다고 전해 온다. 선생은 광주지법에 근무할 때 성(聖) 프란치스코 수도회에 입회하여 재속(在俗)의 몸으로 성직자 못지 않은 수도 생활을 했고 자식 8남매만 모두 키우면 수도원 종지기로라도 들어가고 싶다고 말했으며 기회 있는 대로 제천(堤川) 배론 성지(聖地)와 전주 치명자산을 찾아 경건히 머리 숙였다.

선생은 사형제도의 폐지를 주장한 법조인이었다. 그러나 현실의 법에 따라야 했기 때문에 그 법을 집행하면서 사형수들에 대한 종교적 구원에 진력하였다. 선생은 사형수들의 대부가 되어 옥중 뒷바라지를 다했었다. 선생이 남긴 수상록 '무상(無常)을 넘어서'에서 선생은 인간이 인간을 재판하는 문제에 대해 이렇게 독백하고 있다. "모든 형사 피고인에게 있어서 그들의 인격과 과거생활을 고려하지 않고 공소장 게재 사실만으로 그의 이전의 운명과는 무관에게 처결해 낼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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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은 보통 학교를 나온 뒤 집안이 어려워 진학하지 못하고 조부로부터 한학(漢學)을 배웠다. 선생은 어려서부터 교회에 나가면서 성서를 열심히 읽었고 문학서적, 위인전기 등을 빼놓지 않고 탐독했으며, 선생의 일생을 법과 연결 짓게 한 링컨 전기에서 결정적인 감명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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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학으로 변호사가 되어 가난하고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 일하고 대통령까지 된 링컨의 생애는 소년의 가슴을 설레게 하기에 충분했던 것이다. 20세 되던 해 전주로 나가 일본인 변호사 사무실에서 일하던 선생은 일본인 주인의 권유로 일본으로 건너가 고학으로 일본대(日本大)에서 공부했다. 이듬해 조선변호사 시험에 합격하자 학업을 중단하고 귀국, 일제 식민지 치하의 억울한 우리 동포들을 위해 법정에 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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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 후에는 서울지검 검사로 임명되어 46년 세상을 놀라게 했던 조선정판사 위조 지폐사건을 당시의 조재천(曺在千) 검사와 함께 낱낱이 파헤쳐 명성을 떨치기도 했다. 당시 선생은 이 사건에 관련하여 무슨 압력을 받았음인지 훌쩍 사표를 던지고 닭과 돼지를 치며 전원생활을 시작했다. "흙으로 된 인간은 흙과 더불어 흙에서 나는 것을 먹으며 살다가 다시 흙으로 돌아간다"는 평소 그의 인생관에 따른 것이다. 그러나 그의 전원생활은 잠깐이고 미군정청의 김병로(金病魯) 사법부장으로부터 "할 일이 태산같은데 무얼 하느냐"는 호통을 받고 다시 서울 지법판사로 돌아와 별세할 때까지 법관으로 일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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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은 법관의 된 다음에는 "사람이 과연 사람을 재판할 수 있을 것인가?" 끊임없는 회의에 빠졌다. 그래서 선생은 사형이나 중형에 처해야 할 사건배당을 맡으면 교도소로 피고인을 찾아가 인간의 존엄성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선생과 접촉한 피고인들 치고 교화되지 않은 이가 없었다고 한다. 법관으로서의 선생이 명절 때 들어온 사과상자를 되돌려 주었다던가 매일 도시락을 싸가지고 걸어서 출퇴근 했다던가 하는 대쪽같은 성격을 나타낸 일화는 많다. 선생 동서지간이 조규찬(曺圭璨)박사와 명동에서 낮간에 만난 일이 있었다. 그 때 선생은 같이 점심을 먹자는 동서의 제의를 받고 한사코 달아났었다. 다음에 만난 조박사가

"일부러 라도 점심을 같이 할 터인데 그럴 수가 있느냐 섭섭하다"고 말하자 선생은

"그전에 나에게 무슨 재판에 대해 상의한 일이 있지 않느냐"고 대답했다는 것이다
.
이처럼 선생은 재판에 영향이 미칠 염려가 있다고 생각되면 결코 동서 지간에도 밥 한 끼니를 같이 하지 않는 성격이었다. 선생이 육군 특무대장 김창요 중장 암살 배후조종자로 사형이 확정된 허태영(許泰榮)을 찾아가 나눈 대화를 보면 그의 신앙심이 얼마나 두터웠는가를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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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의 본원에 대해 생각하여 본 적이 있습니까
?"
"전혀 없는 것은 아닙니다
."
"앞으로 신심(信心)을 가져볼 의향은
?"
"글쎄요. 이런 환경에서 구차스럽지 않겠습니까."
"그런 일에 구애받을 필요는 조금도 없소. 마치 부모에게 효도를 하는 것이 떳떳한 일인 것처럼 만유(萬有)의 주재자에게 공경을 드리고 또한 귀의하는 것은 당연지사니까
‥‥‥."

결국 선생을 대부로 영세한 허태영은 형장의 마지막 순간까지도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모습을 보였고, 자신의 행동은 후세에 역사가 증명해 주리라는 말과 함께 선생에게 인생의 빚을 지고 간다는 말을 남겼다는 것이다. 단 (壇)위에 앉아 피고인을 내려보는 재판관의 심상(心像)은 과연 안온하고 자신에 찬 것일까. 과연 인간이 인간을 재판할 수 있을까?" 선생이 중형을 선고하기 전에 "불행히도 세계관(世界觀)이 달라 여러분과 나는 자리를 달리 합니다. 하느님의 눈으로 보면 어느 편이 죄인일는지 알 수 없는 노릇입니다. 이 사람의 능력이 부족하여 여러분을 죄인이라고 단언하는 것이니 ‥‥‥"하고 판결문을 이어 갈 때 피고인들이 모두 소리내어 엉엉 울었다는 일화는 너무나 유명하다.

선생은 1956년 지병인 간암으로 이 세상을 떠났다. 그러나 이들은 밥 한번도 나누지 못하는 청렴결백 때문에 영양실조로 숨을 거뒀다고 믿고 있다. 선생은 죽기 몇 달 전에 경기도 양주군 별내면 천주교 묘원에 가족묘지를 마련해 놓았었다. 생명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예감하고 있었는지 모른다. 그 비석에는 평소에 늘 묵상하고 또 남에게 알려 주던 성경구절을 새겨 넣었다
.

〈먼지는 제가 생겨난 땅으로 돌아가고 영혼은 그를 주신 천주께로 돌아갈지니라.〉


선생은 갔지만 선생이 하던 일인 '카톨릭 교도소 후원회'가 전국 규모로 계속 활동하고 있다.

그의 사형수들에 대한 감화의 사례는 헤아릴 수 없이 많으나 한 사형수의 수기서 그 면모를 살펴보자
.

「‥· 대부 님은 문둥이 같이 더러운 제 영혼을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로 기적적인 영신치료와 함께 흙탕 같은 죄악 속에서 소생시켜 주었다. 또 대부 님은 신앙생활을 할 수 있도록 사재로 많은 책을 차입해 주시고 매주일 찾아주시며 수고를 아끼지 않으셨다. 그런데 뜻밖에 하루는 전주 지방법원장으로 전근을 가시게 되어 왔노라 하며 우리 인간은 모두가 다 변하기 쉽고 약해서 믿을 바 못되니 섭섭히 생각 말고 불쌍한 인간을 항상 생각하며 괴로울 때나 기쁠 때나 언제나 동반해 주시는 하느님만 신뢰해야 한다고 격려할 때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것을 억지로 참았다. 일생에 좋은 일을 제대로 하지 못한 것을 생각하여 언젠가 대부님께서 몇 차례 보내주신 귀한 돈으로 '교부들의 신앙'이란 책을 한 권사고 나머지는 불쌍한 사람에게 세면도구를 사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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