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진호(趙鎭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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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9.0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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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자며 명필가 조 진 호(趙鎭祜) (1793년 -1865년)
* 호 : 관촌(觀村)
* 출생지 : 김제시 청하면 관상리

1793년(正祖 癸丑)에 김제시 청하면 관상 리에서 태어났다. 선생은 양주 조씨 강화공파 휘 성중(諱性中)의 15세 손으로 어릴 적에는 명탁(命鐸)이라 불렀고, 자는 내경(乃警)이며 호는 관촌(觀村)이라 하였다. 아버지 민철공(敏喆公)과 어머니 김해 김공준홍(金公俊洪) 따님 사이 2남매 중 장남으로 어릴 적부터 증조 할아버지 휘 유덕공(諱裕德公)과 할아버지 휘 대수공(諱大壽公)의 지극한 효행으로 정려(旌閭)가 세워진 훌륭한 가문의 자손답게 행의(行誼)가 바르며 강직하고 영특하셔서 문장문필에 능하신 종조(從祖)인 간와(艮窩)선생 문하에서 선계의 도를 닦으며 사서삼경과 문필서화며 제자백가서(諸子百家書)까지도 고루 배웠을 뿐 아니라 학
·덕·행(學德行)을 쌓았고 능하였으며, 더욱 서도, 서화, 시부(書道, 書畵, 詩賦)에는 누가 감히 따를 수가 없었다. 선생은 친상(親喪)을 당하자 초종 장례삼상(初終葬禮三喪)은 물론 묘 옆에 초려(草廬)를 짓고 3년동안 고기와 생선을 먹지 않고 삼제복을 벗어본 일이 없었다. 또 곡재배(哭再拜)하며 부모님의 깊으신 은혜를 생각하면은 뼈가 으스러져도 갚을 길이 없다고 지극한 효행지도를 다하였다. 뿐만 아니라 군자 행세로써 선비 행세로써 만선지도(萬善之道)를 다하면서도 손수 농사일을 하고 누에를 치게 하여 길쌈을 권하고, 자급자족으로 검약(儉約)생활을 하면서도 여인충(與人忠)하며 집사경(執事敬)하는 사표(師表)이기도 하였다. 선생은 서기 1846년 헌종 병오(憲宗 丙午)에 54세로 진 사시(進士試)에 합격하여 절충장군 용양위 부호군(折衝將軍龍朧衛副護軍) 첨지중추부사 겸 오위장(中復府事兼五衡將)에 통정대부(通政大夫)까지 오르셨다. 선생은 장남 경순(琢淳)의 등사(登仕)로 평양 등 서도지방을 답유(踏遊)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는데 출발하여 가는 도중보고 느낀 대로 그곳 특성과 풍물 등을 '서경기행(西京紀行)'이라 이름 붙인 두루마리 40여 척의 지면에 작부화답식(作賦和答式)으로 일기식에 또 날짜별로 기거침식(起居寢食)까지 모두 시구로 기술하였을 뿐 아니라 15여 척의 길이로 묵화 채색하여 평양시가지의 점점산(点点山)과 용용수(溶溶水), 그리고 강가와 섬들, 유적지와 요소 명물, 성곽과 성루 등을 실상(實相) 그대로 그려 놓았다. 그 정교함이 명화요, 그 필체가 필한 여류(筆翰如流)의 명필이며 또한 '남성오노첩(南城五老帖)'이라 명제한 두루마리도 40여 척 이상의 긴긴 두루마리인데 5유(儒)의 선비들이 시부(詩賦)로 운(韻)하고 답하며 서로 명운명체(名韻名體)로 작시하여 기술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 착상이 심오하기 이를 데 없다. 선생은 처음에 풍천 로공 정제의 따님에게 장가드셔서는 장남 경순을 두었는데, 그 아버지의 박식(博識)을 그대로 받았음인지 일찍이 등과(登科)하여 가선대부(嘉善大夫)로 공조와 공조참판을 지내고 올라가 대사간(大司諫)까지 지냈다. 선생은 상처후(喪妻後)에 다시 수원 백공 휴진의 따님에게 장가들어 서 림순, 위순, 염순, 식순 등 4남을 두었는데 모두 아버지를 닮아 문장가요, 명필로 명인들이었다. 선생은 다복한 삶을 누리다가 서기 1865년(高奈 2年 乙丑)에 향년 73세로 김제시 청하면 관상리 자택에서 고요히 운명하니 관상리 선 영하(先瑩下)에 모시고, 큰아들 경순이 묘알(墓謁)하고 좌의정 조두순이 찬(撰)하였으며 예조판서 조증림이 썼다. 현재 선생이 사셨던 생가(生家)에는 증손자인 조성호씨가 살며 선생의 두루마리 등 모든 위품을 귀중하게 간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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