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간(趙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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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9.0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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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자사서 집주(朱子四書集註)펴 낸 조 간(趙 簡) (1264년 ∼ 1325년)
 
※ 詩, 文集, 遺稿 등을 찾아볼 수 없으나, 문헌인 고려사, 고려사절요 등 한국인명 대사전은 적고 있으며 金堤趙氏奈室 제 2호에 失子團書集註를 퍼냈다고 기록되어 있다.
* 출생지 : 김제시 옥산동
* : 편헌(悅軒)
공(公)의 본관은 김제로 시조(始祖)는 고려 고종 때 천하명장(天下名將)으로 이름을 떨치고 대작(大爵)길에 오른 조연벽(趙連壁)의 셋째 아들로 시호(詩號)는 문양공(文良公)으로 옥호(屋號)는 열헌(悅軒)이었다. 공은 김제 옥거리(現 金堤市 玉山洞)에서 서기 1264년(고려 高宗 5年)에 태어나 서기 1325년(고려 충숙왕 12년) 겨울에 별세하였다. 공은 태어나면서 신체에 특이한 점이 있었다. 첫째, 모골(毛骨)이 특이하고, 둘째 복부에 용린형칠점(龍鱗形七點)이 흡사 북두칠성과 같이 박혀 있었다. 공의 나이 5∼6세 때의 일이다. 집 옆에는 큰 괴목나무가 있었는데, 공은 이따금 이 괴목나무에 올라가 놀았다 한다. 어느 날도 나무 위에서 낮잠을 자고 있었는데 이때 마침 직무에 피곤해 잠깐 낮잠을 자던 이 고을 원님의 꿈속에 괴목나무 위에 난데없는 쌍용이 나타나 이 어린아이를 감고 보살피며 꿈틀거리는 걸보고 깨어 일어나 나졸을 시켜 알아본 즉 다름 아닌 조간(趙簡)이라는 어린이가 놀고 있었다 하매 이 어린아이가 예사아이가아님을 깨달았다. 그래서 곧 취학(就學)케 했더니 생각대로 과연 천재여서 인근 동네에서는 신동이라고 했다 한다. 공은 1279년(고려 忠烈王 5年) 공의 나이 16세 때 문과시험에 장원 급제하고 그 이듬해 임금이 문신들을 친시(親試)했을 때도 제일 특선하여 왕으로부터 황극(黃棘)을 받았다. 그리고 출생지를 용두동(龍頭洞)이라 불렀고 거가(居家)를 열헌(悅軒)이라 호를 지어주었다. 보벽(補闢)에 제수 되어 후학(後學)을 양성하여 인재를 기르는데 전력하였고, 집에 돌아오면 의관을 정제하고 독서에 여념이 없었다. 그 후 부친상을 당하여 3년간 시묘(侍墓)했는데 장의 예절이 법도에 어긋남이 없게 하니 이 지극한 효성에 감동한 충렬왕(忠烈王)이 정문(龍門)을 세우라 명하였다. 관직으로는 1300년 충렬왕 때 경상도 안염사(接廉使), 밀직제학(密直堤學), 찬성사(贊成事), 문하시중(門下侍中), 우의정(右議政)을 역임한 후 벼슬길에서 물러나 고향에 돌아왔다. 그 후 공은 유생(儒生)들과 경전(經傳)을 강론하고 충효를 권면(勸勉)하니 사대부(士大夫)들이 말하기를 주자정자학(朱子程子學)이 있다고 하였다. 당시 조정 백관과 거유(巨儒)들이 문묘에 배향할 것을 주장하였으며 조선조 성종(成宗 20년) 때에는 유림들이 계(啓)를 올려 고 유허지에 비(碑)를 세우고 제각을 지어 모셨다. 그 후 용암서원(龍岩書院)에 배향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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